아돌프 히틀러
나치독일의 초대 총통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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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강한 자가 지배해야 하고 더 약한 자와 짝을 지어서는 안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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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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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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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초기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 있는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형들과 3명의 친형이 있었지만 친형들은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사망했기에, 어린시절의 히틀러는 형제가 없이 자랐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기에, 어린 히틀러에게 폭력을 자주 휘둘렀고, 이는 히틀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의 그는 수학을 빼놓고는 성적이 좋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히틀러는 16살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올라와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고자 미대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이때부터 히틀러는 방황하면서 일정한 목표 없이 살았고, 1909년 12월까지 노숙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1907년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물려받은 유산에다가 그림엽서 등을 팔면서 생활하였다. 당시 그는 오페라와 바그너에 심취하였고 매일 도서관을 다니며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이때부터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익혔으며 정치사상이 형성되었다. 그래도 히틀러는 화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히틀러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였고,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1913년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군의 징집을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슬라브인들을 싫어했던 것과, 순수 독일인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히틀러는 최초로 독가스가 사용되었던 이프르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에 배치되었고, 수많은 독일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히틀러는 1914년 말에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상병으로 진급했으며,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는 1916년과 1918년에 전투에서 부상당하는데, 1916년에는 그 유명한 솜 전투에서 부상당했었고, 1918년에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잠시 실명하기도 했었다. 잠시 실명했던 눈은 1918년 11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게 항복했던 시점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나치당의 지도자가 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히틀러는 계속 군에 남아있었다. 그는 군에 남아 정치 활동을 감시하는 일을 했었지만, 독일 노동자당에 잠입했다가, 노동자당 사람들이 하는 연설에 감명을 받았고,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했다. 이로써 히틀러는 정치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1920년 초,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까지 올랐던 히틀러는 1920년 2월 국민당을 창당하였고,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당내 경호 조직인 돌격대(SA)를 조직하였고, 1922년에는 800명의 돌격대를 앞세워 사회주의 진영 노동자와 노동조합원들과 충돌하여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사례에 감명을 받아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독일군에게 진압당했고,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재판과정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 능력을 토대로 재판관들을 매료시켰고, 원래 받아야 했던 형량보다 적게 받았으며, 6개월 이내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감옥생활 도중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하였다. 나의투쟁 제1권은 1925년에 출간되었고, 제2권은 1926년 12월에 출간되었으며, 그의 자서전은 그가 집권하던 시기 독일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리고 나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SS는 1925년 쯤에 창설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나치당의 활동은 지지부진하다가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했는데,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이 그런 기회를 제공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하여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빠졌다. 1924년에 등장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빛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터지며 독일이 받아야 했던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28년 까지만 해도 총선 득표율이 2.6%였던 나치당은 1930년 들어 대략 20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해 9월에 치러진 제국의회 선거에서 18.3%의 득표율을 얻으며 제2의 당으로 부상했다. 1931년 11월 헤센 주의회 선거에서 37.1%의 득표율을 얻은 나치당은 당시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합친 것 보다 높은 지지율을 얻게 되었고, 1932년엔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했다.
독일의 지도자가 된 후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고, 그는 독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재무장 정책을 수립하였고, ‘국회 의사당 방화사건’을 빌미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며 숙청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독일 내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을 휘둘렀고, 이에 따라 독일 내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나치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한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 전 나치 돌격대(SA)의 대장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나치 돌격대 지휘관들과 나치당의 반대파들을 향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숙청을 감행한 그날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수백 명이 죽었다. 그리고 1934년 8월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대통령과 총리를 겸하는 총통의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 국민의 90% 이상이 이를 지지했다. 1935년 3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병력 증강과 징병제 도입을 선포했고, 1935년부터 나치독일은 군비를 대폭적으로 증강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1936년 3월에는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했고, 뉘른베르크법을 선포하여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당시 히틀러는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경제를 재건하였다. 이는 미국의 뉴딜 정책 만큼이나 성공적이었으나 이를 군사주의를 강화하는데 이용하였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올림픽을 세계로부터 알리는 데 이용하였고, 그 효과는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1936년과 1937년 일본과 이탈리아와 반(反)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하였고,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와 나치당은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을 일으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 있는 유대인 상점과 시민들을 공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영토 팽창은 라인란트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 끝나지 않았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였고, 그해 8월에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9월에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였다.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전략전술을 구사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폴란드군의 전투기 부대와 기병대를 궤멸시켰고, 수도 바르샤바를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였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 3월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4월에는 덴마크를 침공했으며, 5월 10일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를 침공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차례대로 항복했고, 수십만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덩케르크에서 대대적인 철수작전을 감행하여 영국으로 후퇴했으며,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하였다. 프랑스까지 점령한 독일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본토 항공전을 개시하여 수도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대도시들을 초토화 시켰고, 수 천대의 독일군 비행기들이 영국의 대도시와 군사기지를 폭격했다. 영국 공습에 나선 히틀러는 1940년 9월 이탈리아와 일본과 ‘3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1941년에는 북아프리카에 군대를 파병하였으며, 1941년 4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까지 점령해버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벌인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했고, 그는 서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동부전선으로 보냈으며,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300만 이상의 병력과 수천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동원한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다. 1941년 9월에는 발트 삼국과 레닌그라드까지 진격했고, 그해 11월 말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모스크바 진격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다. 거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에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서 히틀러 또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까지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정세는 히틀러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독일군은 1942년 스탈린그라드를 침공했지만, 1943년 2월 20만 대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하면서 패배로 끝났고, 그해 7월 마지막 진격인 쿠르스크 전투도 소련군의 T-34 물량 공세에 밀리면서 패배했다. 그와 더불어 1941년 롬멜 장군이 파견된 아프리카 전선도 1943년 5월 튀니지까지 함락되면서 독일군의 패배로 끝이 났고, 그해 7월 영미 연합국이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게 되면서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연합국에게 밀렸다. 이렇게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히틀러와 나치독일은 ‘최종 결정(Final Solution)’이라 하여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같은 수많은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치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 까지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500만 명 이상의 전쟁 포로 및 반나치인사 동성애자, 장애인, 집시 등을 수용소에서 학살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국에게 밀린 독일군은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전개되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그 과정에서 몇몇 나치 인사들이 히틀러를 암살고자한 발키리 작전을 수립했지만 실패했다. 1944년 8월에는 프랑스의 파리가 해방되고, 1945년에는 벌지 전투에서 패배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도 소련군에게도 패전을 거듭했다. 연합국은 1945년부터 독일의 도시를 공습했으며 대부분의 독일 도시가 연합국의 공습을 받으면서 초토화 되었다. 1945년 4월 25일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엘베강에서 만났고,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길 꺼려했던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는 지하 벙커에서 아내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결국 독일군 잔존병력과 히틀러의 뒤를 이은 카를 되니츠 제독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사상
인종주의
“ | 어떤 인종 혹은 여러 인종들이 인간 문화의 최초의 담당자였는가. 따라서 우리가 인간성이라는 말 안에 포괄하고 있는 것의 실제 창시자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 문제 제기는 보다 간단하며, 대답 역시 쉽고 또 명백하기도 하다. 우리가 오늘날 인류 문화에 대해, 즉 예술ㆍ과학 및 기술의 성과로 보는 것은 모두 한결같이 아리아 인종의 창조적 소산이다. | “ |
《나의 투쟁》中 |
“ | 역사적 경험은 이와 같은 것에 대해 무수한 예를 보여준다. 그것은 놀랄 정도로 명석한 아리아 인종이 보다 열등한 민족과 혼혈한 결과 문명의 주도권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참으로 명료하게 제시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열등한 유색 인종과는 거의 섞이지 않은 게르만적 요소로 구성된 북아메리카의 경우, 수차례 광범위하게 원주민과 혼혈한 라틴계 이주민으로 구성된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와 비교해서 훨씬 우수한 인간성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 하나의 예만으로도 인종혼혈의 영향을 극히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인종적으로 순수하고 혼혈된 적이 없는 아메리카 대륙의 게르만인은, 그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다른 피가 섞이지 않는 한 그들은 지배자의 지위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 “ |
《나의 투쟁》中 |
반유대주의
“ | 이 세상에 유대인만 존재한다면, 그들은 진흙탕이나 오물에 질식할 지경이 되면서도 증오에 가득 찬 투쟁 속에서 서로 속이고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유대인의 투쟁 과정, 혹은 그들이 이웃에게서 강탈하는 경우에 보이는 단결심을 보고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전형적인 희생이 존재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그런 경우에도 유대인을 이끄는 것은 역시 개개의 노골적인 에고이즘이다. | “ |
《나의 투쟁》中 |
“ | 라인 지방에 흑인을 데려온 것은 유대인이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경우 그들에게는 항상 같은 저의와 뚜렷한 목표가 있다. 즉 유대인은 혼혈화를 통해 증오의 대상인 백인종을 파멸시키고, 그 문화적ㆍ정치적 위치에서 끌어내려 자신들이 그들의 지배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혈통을 자각하고 있고 인종적으로 순수한 민족은 절대로 유대인에게 정복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단지 혼혈민족의 지배자로 그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획적으로 개개인의 끊임없는 독화(毒化)를 통해 인종적 수준을 끌어내리려 한다. | “ |
《나의 투쟁》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