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전략과 전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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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7일 (목) 00: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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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의 기초
VII. 전략과 전술
4절 전략적 지도

4)전략적 지도


혁명의 예비군은 다음과 같다.


  • 직접 예비군
    1. 국내의 농민과 다양한 중간층
    2. 인접국의 프롤레타리아트
    3. 식민지 종속국의 혁명운동
    4.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리품과 성과 一 프롤레타리아트는 강력한 적을 회유하여 숨 돌릴 시간을 얻기 위해 힘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전리품과 성과의 일부를 양보할 수 있다.


  • 간접 예비군
    1. 국내의 대립하고 충돌하는 비프롤레타리아트 계급들, 프롤레타리아트는 적을 약화시키며 예비군을 강화하기 위해 이런 대립과 충돌을 이용할 수 있다.
    2. 서로 간에 대립, 충돌, 전쟁(예컨대, 제국주의 전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적대적인 부르주아 국가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들 국가를 공격하는 경우나 부득이 퇴각하는 경우 기동작전에 이들의 충돌 및 전쟁을 이용할 수 있다.


첫째 범주의 예비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그 의미가 명백하므로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 의미가 항상 애매한 둘째 범주의 예비군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은 간혹 혁명의 전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혁명 동안과 그 후에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사회혁명당)와 자유주의적 군주주의 부르주아(카데트)간에 있었던 충돌의 엄청난 중요성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충돌은 농민이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는데 역할을 하였다. 10월 혁명시기에 제국주의의 주요한 그룹들이 격렬한 전쟁에 몰두해 있었다는 사실의 거대한 중요성을 부인할 근거는 더욱 없다. 이 때 제국주의자들은 자기들 끼리 전쟁에 몰두하여 신흥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역량을 조직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전력을 다하여 콜차크와 데니킨에 승리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 그룹 간의 모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새로운 전쟁이 불가피한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종류의 예비군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더욱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전략적 지도의 임무는 혁명발전의 매단계에서 혁명의 기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모든 예비군을 적절하게 운용하는 것이다.


예비군의 적절한 운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몇 가지 필수적 조건의 실행인데 그 주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결정적 시기에 혁명의 주력을 적의 가장 약한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다. 결정적 시기란 혁명이 이미 성숙되고 공세가 최고조에 달하고 봉기가 임박하여 예비군을 전위대에 집결시키는 것이 성공의 결정적 조건으로 된 그런 순간이다. 예비군을 운용한 이러한 실례는 1917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당의 전략이 보여준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시기 적의 가장 약한 지점은 전쟁이었다. 예비군 운용에 있어 기본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를 중심으로 광범한 대중이 단결하는 것이다. 이 시기 당의 전략은 성명과 시위를 통한 가두진출로 전위를 훈련시키는 한편 후방에서는 소비에트를 통해, 전방에서는 병사위원회를 통해 예비군이 전위대를 뒤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혁명의 결과는 예비군이 적절히 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레닌은 봉기에 관한 맑스와 의 유명한 명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혁명역량을 전략적으로 운용하는 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결코 봉기는 경솔하게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단 봉기를 시작했다면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2.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지점으로 훨씬 더 우세한 역량을 집중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준비와 조직에서 보다 유리한 적이 봉기한 세력을 절멸시킬 것이다.
  3. 일단 봉기를 시작했다면 최대의 결단성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모든 수단을 다하여 무조건 공격해야 한다. ‘방어는 무장봉기의 죽음이다.’
  4. 적을 불의에 기습해야 하며, 적이 흩어진 틈을 포착해야 한다.
  5. 아무리 작은 승리일지라도 매일 매일(한 도시의 경우 매 시간마다) 거두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기의 우세’를 유지하라.(레닌전집, 제21권, P. 319-320을 보라)[1]


둘째. 결정적 타격의 순간, 봉기를 개시할 순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선택의 순간은 위기가 극도에 달하고, 전위대가 끝까지 싸우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며, 예비군이 전위대를 지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고, 적 대렬 내에 극도로 혼란된 상황이 널리 퍼져있는 시기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1)우리에게 적대적인 모든 계급세력이 과도한 힘을 사용하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완전히 말려들어 내분이 일어나고 충분히 약화되었다”면, “(2) 머뭇거리며 동요하고 침착하지 못한 모든 중간분자들, 즉 부르주아지와는 구별되는 소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가 인민 앞에 완전히 폭로되고 실천에서도 완전히 파탄나 망신당했다”면 “(3)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 부르주아지를 반대하는 매우 결정적이며 최고로 과감하게 혁명적 행동을 지지할 만큼 대중적 분위기가 일어나고 더욱 왕성하게 고조되기 시작했다”면 결전의 시기가 완전히 성숙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야말로 혁명이 성숙되었고, 우리가 위에서 지적한 모든 조건을 정확히 판단하여 … 시기를 정확히 선택한다면 우리의 승리는 보장된다.”(제25권, p.229을 보라)[2]


10월 봉기의 거행은 이러한 전략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에 어긋나면 “속도 상실”이라는 위험한 오류에 빠진다. 그러면 당은 운동에 뒤처지거나 지나치게 앞서가게 되어 실패의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 봉기시기를 잘못 선택한 “속도 상실”의 실례는 1917년 9월 민주주의 협의회 성원들의 체포를 계기로 봉기를 개시하려한 일부 동지들의 시도를 들 수 있다. 이 때 소비에트는 내부적으로 동요하고 있었고 전선에서 군대는 여전히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으며 예비군은 아직 전위대를 뒤따르지 않고있었다.


셋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난관과 장애를 꺼리지 않고 이미 정한 방침을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위가 투쟁의 주된 목적을 놓치지 않고 대중이 전위 주위에 결집하여 투쟁하며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 조건을 준수하지 않으면 어부들에게 잘 알려진 “방향 상실”이라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방향 상실”의 실례로 민주주의 협의회 직후 예비의회에 참가한다는 결정을 채택한 우리 당의 잘못된 행동을 들 수 있다. 예비의회는 나라를 쏘비에뜨의 길에서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길로 변경시키려는 부르주아의 기도이며, 당이 이런 기관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계획을 혼란시키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하에 혁명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을 어리둥절하게 한다는 점을 당은 말하자면 잠시 망각했다. 이 오류는 예비의회에서 볼쉐비끼가 탈퇴하여 바로잡았다.


넷째. 적절한 퇴각을 고려하여 예비군이 기동작전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적이 강할 때, 퇴각이 불가피할 때, 적이 유인한 전투에 응하는 것이 명백히 불리할 때, 주어진 세력관계로 보아 전위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예비군을 보전하기 위해 퇴각이 유일한 길일 때, 이 때가 퇴각할 시기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혁명적 정당은 완벽하게 배워야 한다. 지금까지 공격하는 것을 배웠다. 이제 적절하게 퇴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공격하는 방법과 더불어 적절하게 후퇴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혁명적 계급은 자신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이것을 깨닫게 된다.(제25권, p. 177을 보라)[3]


이러한 전략의 목적은 시간을 벌고 적을 분열시킨 다음 공격하기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의 모범은 브레스트 강화조약의 체결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조약으로 당은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며, 제국주의 진영 내의 충돌을 이용하여 적의 힘을 와해시켰으며, 농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또한 콜차크와 데니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힘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독강화를 체결함으로써 우리는 적대적 두 제국주의그룹으로부터 현재 가능한 최대한도로 자유롭게 되었다. 그들의 반목과 전쟁을 이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반대하는 협정체결을 어렵게 하였다. 그래서 일정 기간 사회주의 혁명을 전진시키고 공고히 하기 위한 자유를 얻었다.”(제22권, p. 198을 보라)[4]


레닌은 브레스트 강화 조약을 체결한 후 3년이 지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아무리 멍청한 바보라도 ‘브레스트 강화’가 우리의 힘을 강화하였으며 국제 제국주의 세력을 분산시킨 양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제27권, p. 7을 보라)[5]


이상이 올바른 전략적 지도를 보장하는 주요 조건들이다.


  1.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6 , p. 180.
  2.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92, p. 105-106.
  3. 같은 책, p. 22-23.
  4. 레닌, “불행한 강화조약에 관한 문제의 역사에 대하여”, 임채희 번역, ≪노동자정치신문≫ 제 47호 (2008년 11월), 전국노동자정치협회.
  5.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33, 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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