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제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
a)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이론의 중요성;
b) 자생성 이론에 대한 비판;
c)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
1) 이론의 중요성
어떤 사람은 레닌주의의 중요한 요지가 맑스주의의 명제를 행동으로,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라는 의미에서 레닌주의가 이론보다 실천을 우위에 둔다고 생각한다. 이론에 관한 한, 레닌주의는 다소 그것에 무관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플레하노프가 이론, 특히 철학에 관해 레닌이 ‘무관심’하다고 여러 번 비웃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많은 레닌주의적인 실천적 노동자들이, 특히 상황이 그들에게 부과하는 막대한 양의 실천적 작업 때문에 이론에 커다란 호의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나는 레닌과 레닌주의에 대한 이러한 매우 기묘한 의견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진실에 대해 전혀 어떤 관계도 없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실천적 노동자들이 이론을 무시하려는 시도는 레닌주의의 전체 정신에 반하며 사업에 심각한 위험으로 가득차 있음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은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 운동의 경험을 일반적인 측면에서 취한 것이다. 물론 실천의 길이 혁명이론에 의해 조명되지 않았을 경우 실천이 어둠 속을 헤매게 되듯이,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이론은 목적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불가분의 연관 위에서 단련된다면 그것은 노동계급운동에서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론, 그리고 이론만이 운동에 확신을, 방침을 결정할 힘을, 그리고 주위의 사건의 내적 연관에 대한 이해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 단지 이론만이 실천을 도와 현재 제계급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를 역력히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 말고는 이 잘 알려진 논제를 수없이 반복해서 말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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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1](Vol. IV, p. 380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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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특히 우리 당과 같은 당이 몰락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투수라는 점과 당이 처한 복잡한 국내외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는 일찍이 1902년에 우리 당의 이러한 특수한 역할을 예견하면서 다음을 지적하는 것이 그 당시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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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선진적인 이론에 의해 지도되는 당만이 전위투사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Vol. IV, p. 380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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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당의 역할에 대한 레닌의 예측이 실현된 지금, 레닌의 이 테제가 특별한 힘과 특별한 중요성을 획득했다는 증거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레닌이 이론에 부여했던 커다란 중요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는 것은 아마도 레닌 외에는 어떤 사람도 맑스주의자들 사이의 반유물론적 경향에 대해 포괄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뿐 아니라 엥겔스의 시대로부터 그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유물론적 철학을 기초로 하여 일반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과제를 떠맡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엥겔스는 "유물론은 새로운 위대한 발견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측면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2] 레닌이 자신의 시대에 이 작업을 수행한 것은 그의 놀라운 저작 『유물론과 경험론 비판』에서 잘 알려져 있다.[3] 레닌이 철학에 '무관심하다'고 비난하기를 좋아했던 플레하노프는 그러한 작업을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 자생성의 ‘이론’에 대한 비판. 또는 운동에서 전위의 역할
자생성의 ‘이론’은 기회주의 이론이자 노동운동의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이며 노동계급 전위, 노동계급의 당의 지도적 역할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이론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노동계급 운동의 혁명적 성격에 결정적으로 대립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항하는 투쟁 노선을 추구하는 운동과는 상반되며, 오로지 자본주의에서 ‘허용될 수 있는’ 요구, ‘실현가능한’ 요구의 노선을 따라 진행되는 운동에 지지를 보낸다. 그것은 ‘최소저항 노선’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자생성의 이론은 노동조합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자생적인 운동에 정치적으로 의식적 계획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에 결정적으로 반대한다. 그것은 당이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서 나아가는 것에, 당이 대중들을 정치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당이 운동을 지도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운동이 그 자신의 경로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운동이 지니는 정치의식적인 요소에 찬성을 보낸다. 그것은 당이 다만 자생적 운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의 꽁무니를 질질 끌려 다니는 것에 찬성한다. 자생성의 이론은 운동에서 의식적 요소가 갖는 역할을 경시하는 이론이자 ‘대중추수주의’사상이며 모든 기회주의의 논리적 토대이다.
실제로 제1차 러시아 혁명 이전에 이미 무대에 등장했던 이 이론은 소위 ‘경제주의자’라 불리워진 그 이론의 신봉자들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독립적인 노동자당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차르의 타도를 위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반대하고, 운동에 있어서 순전히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책을 설교하고, 또 일반적으로 노동운동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에 내맡겨 버리도록 이끌었다.
옛 이스크라의 투쟁과 레닌의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대중추수주의" 이론에 대한 빛나는 비판은 이른바 '경제주의'를 분쇄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동계급의 진정한 혁명적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이 투쟁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독립적인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혁명의 주역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발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예외없이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에 다소 다른 형태로 매우 널리 퍼져 있다. 나는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에 의해 변조된 소위 ‘생산력’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만사를 정당화시키고 모든 사람을 회유하며, 사람들이 신물이 나서 싫증을 내게 된 후에야 사실을 기록하거나 설명하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나서는 만족해 버린다. 맑스는 유물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에 머무를 수 없으며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4] 그러나 카우츠키 일파는 이것에 유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맑스의 정식 첫 부분에 만족한 채 있고 싶어한다.
다음은 이 "이론"의 적용에 대한 수많은 예시 중 하나이다. 제국주의 전쟁 전에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시작하면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전쟁 직전에 이 정당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구호를 묵살하고, 반대 구호, 즉 "제국주의 조국을 위한 전쟁"을 적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구호 변경의 결과로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렸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노동자 계급에 불충실하거나 배신했다고 비난할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은 당연히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다. 첫째, 국제노총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우세했던 "생산적인 힘의 수준"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은 ‘생산력’에 있다. 이것이 카우츠키씨의 ‘생산력 이론’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정확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 ‘이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맑스주의자가 아니게 된다. 당의 역할은? 운동에 있어 그것들의 중요성은? 그렇다면 ‘생산력의 수준’과 같은 결정적 요소 앞에서 당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맑스주의의 위조에 대한 유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이 인용할 수 있다.
기회주의의 민낯을 감추기 위해 고안된 이 가짜 '맑스주의'가 레닌이 러시아 혁명 이전에도 싸웠던 '대중추수주의식'의 유럽식 변종에 불과하다는 증거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이 이론적 위조의 철폐가 서구에서 진정한 혁명적 정당이 탄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증거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 ↑ 강조 추가 --필자의 주
- ↑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카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 2권, 모스크바 1951, 338쪽 참조).
- ↑ V.I. 레닌, 작품집, 4차 러시아판, 14권 참조
- ↑ 카를 맑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고전 독일 철학의 종말, 부록 참조).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Selected Works, Vol. II, Moscow 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