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2일 (월) 13:07 판

제3 인터내셔널

개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제2인터내셔널이 해체되면서 레닌은 1914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쓰러졌다. … 제3 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위치와 임무', CW 28, p. 40

이러한 제3 인터내셔널-일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또는 코민테른이라고도 불린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중부 유럽에 혁명적 열기가 고양되던 시기에 볼세비키의 제창으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졌다. 1차 총회에서 레닌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1]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 후에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선언했다.[2]은 비록 그것이 1935년 이후에 쇠퇴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식적인 목적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1920년 7월∼8월 사이에 열린 제2차 총회에는 41개국의 당과 조직으로부터 대표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USPD에서도 참관인이 참석했는데, 이들 프랑스와 독일 사회당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불안정한 사회민주적 요인들에 의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는 데 유의하여 총회는 엄격한 21개항의 가입 조건을 규정하였다. 가입을 원하는 모든 당들은 개량주의자와 온건 중도파들을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모두 축출해야 하며, 군대 내에서의 체계적인 선전을 포함하여 합법적인 운동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펴나가야한다. 그 시대를 '첨예화된 시민전쟁' 시기의 하나로서 규정하면서 당을 중심으로 한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했다. 즉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코민테른의 집행권 아래서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를 요구했다.[3]

코민테른은 그 법령에 백색인종만을 위해서 존재했던 제2인터내셔널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모든 유색인종 노동자들을 포용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총회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 테제는 민족 및 식민지 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 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4] 1920년에 쓰여진 레닌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적 혼란'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있어서의 '극좌익적인' 경향과 대립했으며, 코민테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 내에서의 작업과 의회 선거에 공산주의의 원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목도했던 조류였다. 그때 그는 혁명의 파고가 퇴보하고 러시아 외부의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하며, 근본적으로 러시아적 경험에 근거한 이전까지의 공세적 혁명 저술이 더 이상 서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회의는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위해 투쟁할 국내외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와 제2 인터내셔널, 그리고 비엔나 동맹이 1922년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1923년 10월에 독일 11월 혁명에 대한 희망이 좌절된 이후로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상대적인 안정화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 뒤 몇 년 동안은 소련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코민테른에서 전개되었다. 치열한 투쟁이 여러 번 전개된 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과 앵글로 러시아 노동조합 전체 위원회, 그리고 1925∼27년의 중국혁명에 적용되었던 전술과 전략이 패배하였고, 트로츠키는 1927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로부터 추방되었다. 1928년에 열린 코민테른 6차 총회는 대부분 부하린에 의해 초안된 포괄적인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제3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그 당시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파시즘'으로 비난되었으며, 그 지도자들과의 통일전선에 대한 제안이 거부되었다. 1931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는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이에, 그리고 의회 형태의 부르주아 독재와 그것의 공공연한 파시즘적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천명하였다.[5] 이러한 정책의 위험스런 결과가 특히 독일에서는 1933년부터 코민테른 전략 수정으로 발전하였다. 1933년 3월에 나치 독재의 확립에 뒤이어 코민테른 집행부는 코민테른에 가입된 모든 당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와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발전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785,000명을 포함해서 65개 정당에 속해 있던 300만이 넘는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하여 1935년에 열린 7차이자 마지막 코민테른 회의는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과 파시즘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인민전선으로의 확대에 유력한 실례를 만들어냈다. 보고문에서 디미트로프는, 이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간의 선택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테러주의적인 부르주아 독재 간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전략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분쇄하기 위한 소련과 서구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평화전선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항한 스페인 공화국의 투쟁에 국제적 지지를 결집시켰다.

소련 공산당에 의해 항상 효과적으로 주도되던 코민테른은 1930년대의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스탈린의 정책에 의해 몇몇 지도자가 추방되었으며 1938년 폴란드 공산당이 해체되었다. 1939년 8월의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코민테른은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스트 국가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 근거한 기존의 전략을 수정하였다. 1939년으로부터 1941년까지 코민테른은 전쟁 당시자는 모두가 부당하고 반동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 코민테른은 소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추축국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서구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1943년 6월에 소련 최고회의 상임간부회의 제안에 따라서 해체되었다. 그 상임간부회의는 크게 확대되어 있는 공산주의 운동이 과업을 수행해야 할 상황이 매우 다양하므로, 국제적 중심부에서 방향을 하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해체는 서구와의 동맹을 합리화하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각주

  1. 앞의 책, 28권 p. 477
  2. 앞의 책, 31권 pp. 197∼8)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세계 연합(Degras 1971, 2권, p. 465)'
  3. Degras, 1권 pp. 166∼172
  4. Degras, 1권 pp. 138∼44
  5. Sobolev 1971, p.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