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좌파도서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Communist International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창립일
창립일
1919년 3월 2일
해산일
해산일
1943년 5월 15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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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제2인터내셔널이 해체되면서 레닌은 1914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쓰러졌다. … 제3 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위치와 임무', CW 28, p. 40

이러한 제3 인터내셔널-일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또는 코민테른이라고도 불린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중부 유럽에 혁명적 열기가 고양되던 시기에 볼세비키의 제창으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졌다. 1차 총회에서 레닌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1]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 후에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선언했다.[2]은 비록 그것이 1935년 이후에 쇠퇴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식적인 목적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1920년 7월∼8월 사이에 열린 제2차 총회에는 41개국의 당과 조직으로부터 대표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USPD에서도 참관인이 참석했는데, 이들 프랑스와 독일 사회당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불안정한 사회민주적 요인들에 의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는 데 유의하여 총회는 엄격한 21개항의 가입 조건을 규정하였다. 가입을 원하는 모든 당들은 개량주의자와 온건 중도파들을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모두 축출해야 하며, 군대 내에서의 체계적인 선전을 포함하여 합법적인 운동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펴나가야한다. 그 시대를 '첨예화된 시민전쟁' 시기의 하나로서 규정하면서 당을 중심으로 한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했다. 즉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코민테른의 집행권 아래서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를 요구했다.[3]

코민테른은 그 법령에 백색인종만을 위해서 존재했던 제2인터내셔널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모든 유색인종 노동자들을 포용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총회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 테제는 민족 및 식민지 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 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4] 1920년에 쓰여진 레닌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적 혼란'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있어서의 '극좌익적인' 경향과 대립했으며, 코민테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 내에서의 작업과 의회 선거에 공산주의의 원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목도했던 조류였다. 그때 그는 혁명의 파고가 퇴보하고 러시아 외부의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하며, 근본적으로 러시아적 경험에 근거한 이전까지의 공세적 혁명 저술이 더 이상 서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회의는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위해 투쟁할 국내외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와 제2 인터내셔널, 그리고 비엔나 동맹이 1922년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1923년 10월에 독일 11월 혁명에 대한 희망이 좌절된 이후로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상대적인 안정화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 뒤 몇 년 동안은 소련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코민테른에서 전개되었다. 치열한 투쟁이 여러 번 전개된 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과 앵글로 러시아 노동조합 전체 위원회, 그리고 1925∼27년의 중국혁명에 적용되었던 전술과 전략이 패배하였고, 트로츠키는 1927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로부터 추방되었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 (1922)

1922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대회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국가파시스트당이 로마 진군이 일어난 며칠 후,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 유럽의 혁명 퇴조기라는 상황이 고려된 대회였다.

이 대회는 1922년 2월 24일에서 3월 4일까지 진행된 제1차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확대회의의 결과를 공식화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통일전선 전술의 제도적 확립이었다. 논의된 통일전선 전술은 제1차 확대회의가 개최되기 약 두 달 전에 제기된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전술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 경제공황은 격화되고 있다. 실업이 늘고 있다. 국제 자본은 거의 모든 나라 노동자에 대해 계통적인 공세로 전화하고 있다. 이 공세는 무엇보다 먼저 자본가가 임금과 노동자 생활수준 전체를 하락시키는 일에 상당히 노골적으로 노력하는 점에서 드러나고 있다. 베르사유 강화의 실패는 극히 광범한 노동자층의 눈에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의 지배를 거꾸러뜨리지 못한다면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 아니 몇 번의 제국주의 전쟁조차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워싱턴 회의는 이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5]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노동자 통일전선에 대하여》(1921.12.18)

집행위원회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독점자본의 전면적이고 노골화된 공세가 강화되었음을 공식화하고, 이를 위한 노동자 통일전선이 확립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6]:

(1) 강화하는 자본의 공세 속에서 영향을 받은 노동자계급에게서는 자연발생적으로, 즉 문자 그대로 억누를 수 없는 '통일에의 염원'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광범한 노동자 대중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신뢰가 점차 높아가는 것과 더불어 더욱 진전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3조)
(2) 공산당은 대중의 무관심이라는 극히 불리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광범한 노동대중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통일 열의는 증가하고 있으며, 공산주의자에 대한, 사회민주주의 주류파의 공격은 새로운 노동자의 인식 수준에서 조응되지 못 하고 있다. (제4조)
(3) 노동대중에게 사상적으로 작용을 미칠 수 있는 완전한 조직상의 확보한 뒤에는, 모든 국가의 공산당은 오늘날 모든 경우에 이들 대중의 실천적 행동의 가능한 한 광범위하며 완전한 통일을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6조)
(4) 여러 정세를 고려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코민테른 제3차 대회의 '대중에게로'라는 슬로건과 공산주의 운동 전체의 일반적 이익이 각국 공산당과 코민테른 전체에게 노동자 통일전선의 슬로건을 지지하고, 이 문제에서 주도권을 쥘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각 나라 조건에 맞게 실행되어야 한다. (제8조)
(5) 독일 공산당은 전국 당협의회에서 노동자 통일전선을 지지하였으며, 자본에 대항할 의향을 가진 '통일 노동자정부'라면, 당은 이를 지지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제9조)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생디칼리스트의 분열 책동에 대항하고 있다. 쥬우와 메란의 개량주의 일당의 노동총동맹이 프랑스 노동계급의 투쟁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분자는 대중 행동이 개시되기 전에, 이 행동을 지지할 것을 개량주의자에게 제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개량주의자들이 이 투쟁에 대한 협력을 거절한다면, 공산당은 가차없이 그들의 반동적 행위를 폭로해야 한다. (제10조)
(6) 전투적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자의 옷을 걸친 개량주의자와 중앙주의자의 우유부단함과 배신을 조금도 용서 없이 폭로하는 동시에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노동자 통일전선을 위해 점점 강화되어가는, 점점 광범한 대중 속에 침투하여가는 정치적 운동을 지칠 줄 모르고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의 모범을 전인터내셔널에 보여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확신하고 있다. (제18조)

이 내용은 1922년 1월 1일 정형화되어 국제 노동자 조직 및 당에 배포되었다.[7] 1923년 6월 23일 코민테른은 〈파시즘에 대한 결의〉를 통하여 노동자 통일전선을 파시즘에 대한 투쟁과 통일하였다. 코민테른은 파시즘을 "노동자계급에 대한 독점자본의 노골화한 테러 독재"라고 규정하였다.[8]

코민테른은 각국 공산당에게 파시즘과 투쟁함에 있어서 다음 여섯 가지의 사항을 지시하였다: 자기 나라의 파시즘 운동의 여러 사실을 수집할 것 (제1조), 신문논설, 소책자, 플랭카드, 집회 등을 통해 파시즘 운동의 반(反)계급적 성격에 대해 체계적으로 계몽할 것 (제2조), 새롭게 프롤레타리아화한 대중과 확실히 프롤레타리아화할 위협하에 있는 대중에 대하여 그들의 상태와 대자본의 도구로서의 파시즘의 기능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계몽할 것 (제3조), 노동자의 자위적 무장조직을 설립하고 그것을 무장시킴으로써 노동자의 방위 투쟁을 조직할 것 (제4조), 그 경향에 상관없이 노동자를 이 투쟁에 끌어들일 것, 즉 모든 노동자정당, 노동조합, 일반적으로 모든 프롤레타리아 대중조직에게 파시즘에 대한 공동방위를 호소할 것 (제5조), 의회와 모든 공공기관 내에서 파시즘과 투쟁하고 그들의 제국주의적, 극단적인 배외주의적인 성격을 특히 강조할 것 (제6조).[9]

코민테른 제6차 대회 (1928)

1928년에 열린 코민테른 6차 대회는 사회민주당과 통일전선을 추진하면서 그 주축을 이루는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의 관료들을 고립시키고, 공산당의 대중적 지반 확대를 골자로 삼는 포괄적인 강령을 채택했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1929)을 통해 사회민주주의의 성격 변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코민테른 6차 총회에서 제시된 통일전선의 방법론은 기존의 입장에 대한 계승으로서 사회민주당 산하의 노조원들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근로대중들을 견인하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통일전선전술을 올바르게 적용하고 대중획득의 임무 일반을 해결하는 것은 그 자체 노동조합과 기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조직들 내부에서의 체계적이며 끈질긴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아무리 반동적인 노동조합일지라도 대중적인 조직인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공산주의자 한사람 한사람의 직접적인 의무이다. 노동자들의 이익을 가장 단호하고 정력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노동조합 내부와 기업에서 끊임없이 일관되게 활동함과 더불어 개량주의적 관료들과 가차없이 투쟁함에 의해서만 노동자들의 투쟁 지도권을 획득하고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대중을 당의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1929), 코민테른과 통일전선, p. 274

이 당시 코민테른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유효했다. 코민테른은 1920년대 말엽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에서 사회민주당의 계급협조적 성격을 비판했고 통일전선을 강화했다.[10] 1931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는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이에, 그리고 의회 형태의 부르주아 독재와 그것의 공공연한 파시즘적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천명하였다.[11] 그러나 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각국의 노동자 봉기를 진압하는 데에 협력했으며, 192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법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공산당 산하 조직을 불법화하고, 군경을 동원하여 파시스트 조직들과 함께 공산당원들을 탄압했다는 점에서[12]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정당한 규명이었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각국 사회민주당의 기층 당원들이 공산당들의 통일전선에 대한 제의를 호의적으로 수용했던 데에 반해 지도부의 미온한 대응은 노동운동의 통일과 단결을 저해했고,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입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기폭제로서 작용했다.

반파시스트 인민전선의 확립

1933년 3월에 나치 독재의 확립에 뒤이어 코민테른 집행부는 코민테른에 가입된 모든 당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와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발전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785,000명을 포함해서 65개 정당에 속해 있던 300만이 넘는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하여 1935년에 열린 7차이자 마지막 코민테른 회의는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과 파시즘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인민전선으로의 확대에 유력한 실례를 만들어냈다. 보고문에서 디미트로프는, 이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간의 선택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테러주의적인 부르주아 독재 간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전략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분쇄하기 위한 소련과 서구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평화전선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항한 스페인 공화국의 투쟁에 국제적 지지를 결집시켰다.

해체와 그 이후

소련 공산당에 의해 항상 효과적으로 주도되던 코민테른은 1930년대의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스탈린의 정책에 의해 몇몇 지도자가 추방되었으며 1938년 폴란드 공산당이 해체되었다. 1939년 8월의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코민테른은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스트 국가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 근거한 기존의 전략을 수정하였다. 1939년으로부터 1941년까지 코민테른은 전쟁 당시자는 모두가 부당하고 반동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 코민테른은 소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추축국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서구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1943년 6월에 소련 최고회의 상임간부회의 제안에 따라서 해체되었다. 그 상임간부회의는 크게 확대되어 있는 공산주의 운동이 과업을 수행해야 할 상황이 매우 다양하므로, 국제적 중심부에서 방향을 하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해체는 서구와의 동맹을 합리화하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같이보기

각주

  1. 앞의 책, 28권 p. 477
  2. 앞의 책, 31권 pp. 197∼8)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세계 연합(Degras 1971, 2권, p. 465)'
  3. Degras, 1권 pp. 166∼172
  4. Degras, 1권 pp. 138∼44
  5. 편집부 역 (1989), 《코민테른 자료선집》, 제3권, 동녘, p. 68.
  6. 위와 같은 문헌, pp. 68-75.
  7. 편집부 역 (1988), 《코민테른과 통일전선》, 백의, p. 71.
  8. 위와 같은 문헌, p. 93.
  9. 위와 같은 문헌, p. 95.
  10. 에른스트 텔만(Ernest Thalmann)과 독일 공산당은 1928년 5월 1일의 노동절 집회에서 사민당에게 공동행동을 제의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군함 건조에 반대하는 시위를 제안했으며,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임금 삭감에 반대하여 공동행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전간기 통일전선 전술은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도 적용됐으며, 오스트리아의 경우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집권에 맞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에게 공동 총파업을 제의한 바 있었다.
  11. Sobolev 1971, p. 313
  12. 일례로, 1932년 7월 17일 함부르크의 알토나(Altona) 구에서 사회민주당 당원이기도 했던 엥거슈테트(Eggerstädt)와 휘하의 경찰들은 공산당의 맞불집회에 압도당한 나치당 시위대를 구출하기 위해 기관총을 동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