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원
개요
이청원(한자: 李淸源)은 사적유물론에 입각해 한국사를 체계화하려 한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조선사회사독본>(1936), <조선독본>(1936), <조선역사독본>(1937)을 펴냈다.
생애
생애 초기
이청원에 관한 학문적 검토가 이뤄진 것은 최근 10년의 일이다. 히로세 데이조, 박형진, 홍종욱 등이 이청원 연구에 참여했다. 그들의 연구 성과 덕분에 이청원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크게 확장됐다. 1914년 2월 6일,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초리에서 빈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그의 가정형편은 호구도 걱정하는 정도였으며, 이청원은 외가에서 출생했다. 그가 세 살먹은 해 부모가 풍산군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이청원은 외가에서 외조모에 의해 길러졌다.
이청원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1923년(10살)부터 1929년(16살)까지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신풍리에 소재하는 풍산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풍산공립보통학교는 1925년 개교했다는 총독부 기록이 있다. 왜 이러한 불일치가 생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 여하튼 이청원은 중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난한 부모는 아들의 공부하려는 정신을 높이 평가했지만 학자금과 도회지 유학 경비를 뒷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상급학교 진학 기도는 좌절됐다.
그는 사회과학과 역사학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마치 빨려들듯이 그에 관한 책과 팸플릿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보통학교 4학년 때 겪은 6·10 만세운동이 그에게 역사와 사회과학에 관한 관심을 일깨워줬다. 신문에 게재된 사건 관련 기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조선 민족의 행복과 자유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독립시켜야만 얻을 수 있음을 이해했다. 13살 소년의 마음에 민족해방 사상이 일어났다. 이청원의 회고에 따르면 불꽃 일어나듯 타올랐다고 한다.
일본 유학
17살 되던 봄에 그는 마침내 도회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일본 도쿄였다. 인구 499만의 대도시이자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도착한 것은 1930년 5월이었다. 처음 목격한 도쿄는 세계 대공황의 내습으로 위기 현상에 휘말려 있었다. 실업자는 나날이 늘고 혁명적 열기는 고조되던 때였다. 뒷날 이청원은 혁명운동의 격화가 눈에 보이는 듯이 강렬해서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청년 이청원은 생계를 위해 최하층 노동시장에 몸을 던졌다. 낫토 행상, 막노동, 고물상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 가장 중히 여긴 것은 토목건축 노동이었다. 건설 현장의 고된 육체노동을 다행히 감당할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일용직 육체노동자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청원은 연구자이자 동시에 혁명운동가의 역할을 겸했다는 평을 받는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청원은 도쿄에 도착한지 불과 두 달 만에 노동조합운동에 가담했다.[2] 1930년 7월에 도쿄 토목건축노동조합 성서지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노동조합의 하급 간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이청원은 성서지구를 거점으로 혁명운동 참가 범위를 동심원처럼 확장해갔다. 그해 11월에는 반제동맹에도 가담해 성서지구 위원직에 올랐다. 노동조합운동과 반제운동에서 보인 열성 덕분일까, 그는 1931년 2월에는 비밀결사 일본 공산당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이청원은 공청(공산청년회)운동에도 발을 내디뎠다. 19살 되던 1932년 12월에는 일본공산청년동맹의 중앙부에도 진출했다. 중앙위원회 조사자료부 지도원으로 선임된 것이다.[3] 중앙위원은 아니지만 그 직할 아래서 조사업무의 고급 책임자로 일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내부에서 그가 담당한 직무는 조사였다. 혁명운동의 주·객관 조건에 관련된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풍부한 독서에 더하여 논리적인 언변과 문필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업무였다. 일본에 건너간 뒤에도 사회과학 탐구 열정을 더욱 불태웠음을 짐작게 한다. 이청원은 육체노동·비밀운동과 관련을 맺으면서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한때라도 중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청원은 일본어에 능했다. 외국어 능력을 묻는 설문에 그는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일본인과 다름없는 언어구사력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언어능력이 그에게 비밀결사에서 조사업무를 가능하게 했고, 또 1935~1937년 왕성한 ‘과학적 조선학’ 저술을 펴낸 동력이 됐다.
이청원이 사적유물론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 <조선사회사독본>(1936)을 펴낸 것은 23살 때였다. <조선사회사독본>은 한국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저술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였다. 이청원도 “과학적 통사로서는 최초의 책”이라고 자부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는 일약 명사로 떠올랐다. 조선학계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앞서 거론한 세 도서 외에도 신문과 잡지를 매개체로 활발한 기고 활동을 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에 그가 출간한 저서는 4권이고, 미디어 기고문은 도합 36건이었다. 저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고문은 3분의 1이 일본어로, 3분의 2는 조선어로 쓰였다.[4] 특히 1935년 말부터 1937년 말까지 2년간의 활동상이 눈부셨다. 미디어 기고문 대다수가 이 연대에 몰려 있었다. 심지어 1936년 1월에는 같은 시기에 3대 신문에 연재 기사 투고를 병행할 정도였다. <동아일보>에는 ‘조선인 사상에 있어서의 ‘아세아적’ 형태에 대하야’(전 5회)와 ‘작년 중 일본학계에 나타난 조선에 관한 논저에 대하여’(전 4회)를 연재했다. <조선일보>에는 ‘고전연구의 방법론’(전 3회)과 ‘시사소감’(時事小感·전 3회)을, <조선중앙일보>에는 ‘작년 조선학계의 수확과 추세 일고(一考)’(전 11회)를 기고했다.
평가
이청원은 노동자 출신의 역사학자였다. 그의 저술 활동은 고된 토목건축 노동과 동시에 병행된 것이었다. 또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실천에 가담함과 동시에 ‘과학적 조선학’ 연구를 수행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기층계급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다. 그의 연구 현장은 고등교육기관의 연구실이 아니라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조사부였다. 이청원의 저술은 학계보다는 대중 사이 소통에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매체 지면을 널리 이용했고, 단행본도 모두 ‘독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독본은 교과서 형태로 출간된 텍스트면서, 동시에 ‘노동자·농민 대중의 계몽’을 위한 텍스트였다. 그의 책이 소수 지식인에게만 유통되고 읽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대중의 의식화와 자기 주체화를 의도했음을 잘 보여준다.[5]
참고자료
각주
- ↑ 홍종욱, ‘제국의 사회주의자-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이청원의 삶과 실천’, <상허학보> 63, 상허학회, 123쪽, 2021년
- ↑ 리청원, ‘자서전’, 3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8-21об
- ↑ 리청원, ‘간부리력서’, 4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6-17об
- ↑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21-2, 역사문제연구소, 248~249쪽 참조, 2017년
- ↑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21-2, 역사문제연구소, 249쪽 각주 21 참조,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