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원

좌파도서관

개요

이청원(한자: 李淸源)은 사적유물론에 입각해 한국사를 체계화하려 한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조선사회사독본>(1936), <조선독본>(1936), <조선역사독본>(1937)을 펴냈다. 『조선근대사연구』(1947)가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는 등 건국 초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1955)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숙청당한다.

생애

생애 초기

이청원에 관한 학문적 검토가 이뤄진 것은 최근 10년의 일이다. 히로세 데이조, 박형진, 홍종욱 등이 이청원 연구에 참여했다. 그들의 연구 성과 덕분에 이청원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크게 확장됐다. 1914년 2월 6일,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초리에서 빈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그의 가정형편은 호구도 걱정하는 정도였으며, 이청원은 외가에서 출생했다. 그가 세 살먹은 해 부모가 풍산군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이청원은 외가에서 외조모에 의해 길러졌다.

다만,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14년 4월 18일에 출생했고, 본적은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신풍리 59(咸鏡南道 豊山郡 里仁面 新豊理 59, 현 양강도 김형권군 김형권읍)이라고 적혀있기도한다.[1] 또한 1940년대 일본 관헌에 제출한 전향서에는 ‘상당한 농가’에서 태어났다고 적었다.[2]

이청원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1923년(10살)부터 1929년(16살)까지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신풍리에 소재하는 풍산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풍산공립보통학교는 1925년 개교했다는 총독부 기록이 있다. 왜 이러한 불일치가 생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 여하튼 이청원은 중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난한 부모는 아들의 공부하려는 정신을 높이 평가했지만 학자금과 도회지 유학 경비를 뒷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상급학교 진학 기도는 좌절됐다.

어려서는 기독교 신자였다. 1930년 8월 잡지 『종교교육』에 조선 교회에 관해 투고한 것이 확인된다. 『종교교육』 1-8호(1930.8.)의 「紙上討論 續論: 금일 조선교회의 발전에는 인물이냐? 금전이냐?」는 독자 투고란에 ‘咸南豊山 李靑垣’ 이름으로 금전보다 인물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실었다. 「‘금전은 악마의 무긔’란 우리의 슬로간(표어)」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스왈라지를 돈으로는 사지 못 한다”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조선의 난국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루터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향서에도 “원래 기독교 신자”라고 적었다.

그는 사회과학과 역사학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마치 빨려들듯이 그에 관한 책과 팸플릿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보통학교 4학년 때 겪은 6·10 만세운동이 그에게 역사와 사회과학에 관한 관심을 일깨워줬다. 신문에 게재된 사건 관련 기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조선 민족의 행복과 자유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독립시켜야만 얻을 수 있음을 이해했다. 13살 소년의 마음에 민족해방 사상이 일어났다. 이청원의 회고에 따르면 불꽃 일어나듯 타올랐다고 한다.

도일과 노동운동

17살 되던 봄에 그는 마침내 도회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일본 도쿄였다. 인구 499만의 대도시이자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도착한 것은 1930년 5월이었다. 처음 목격한 도쿄는 세계 대공황의 내습으로 위기 현상에 휘말려 있었다. 실업자는 나날이 늘고 혁명적 열기는 고조되던 때였다. 뒷날 이청원은 혁명운동의 격화가 눈에 보이는 듯이 강렬해서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이청원이 도일한 1930년 5월은, 1928년 코민테른 제6회 대회 이후 확립된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을 해체와 전협 즉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가입이 결정된 이후였다.[4] 이청원이 전협과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등에서 활동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청년 이청원은 생계를 위해 최하층 노동시장에 몸을 던졌다. 낫토 행상, 막노동, 고물상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 가장 중히 여긴 것은 토목건축 노동이었다. 건설 현장의 고된 육체노동을 다행히 감당할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일용직 육체노동자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청원은 연구자이자 동시에 혁명운동가의 역할을 겸했다는 평을 받는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청원은 도쿄에 도착한지 불과 두 달 만에 노동조합운동에 가담했다.[5] 1930년 7월에 도쿄 토목건축노동조합 성서지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노동조합의 하급 간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이청원은 성서지구를 거점으로 혁명운동 참가 범위를 동심원처럼 확장해갔다. 그해 11월에는 반제동맹에도 가담해 성서지구 위원직에 올랐다. 노동조합운동과 반제운동에서 보인 열성 덕분일까, 그는 1931년 2월에는 비밀결사 일본 공산당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이청원은 공청(공산청년회)운동에도 발을 내디뎠다. 1931년 2월에는 ‘요주의’ 인물로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31년 2월 16일부터 ‘소재 불명’으로 당시 주소는 “요도바시정 카시와기 316 신노다카스케淀橋町 柏木 三一六 新納隆輔方”(현 도쿄도 신주쿠 기타신주쿠)였다. 1931년 10월에 도쿄 부근에서 열린 ‘와타마사의 날(渡政デー)’[6] 데모에 참가했다가 고지마치 경찰서(麹町署)에 검속되기도 했다.[7]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다시 1932년 7월 31일부터 ‘소재 불명’으로 당시 주소는 “牛込区 加賀町 一ノ三 全栄変方”였다. 같은 문서에서는 직업 낫토 행상, 별명 이현규(李炫奎), 키 5척 3촌, 보통 몸집에 머리 길고 둥글고 흰 얼굴에 눈썹 짙으며, 공산주의자로서 다수의 투쟁 경력 있다고 파악했다.[8]

19살 되던 1932년 12월에는 일본공산청년동맹의 중앙부에도 진출했다. 중앙위원회 조사자료부 지도원으로 선임된 것이다.[9] 중앙위원은 아니지만 그 직할 아래서 조사업무의 고급 책임자로 일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내부에서 그가 담당한 직무는 조사였다. 혁명운동의 주·객관 조건에 관련된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풍부한 독서에 더하여 논리적인 언변과 문필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업무였다. 일본에 건너간 뒤에도 사회과학 탐구 열정을 더욱 불태웠음을 짐작게 한다. 이청원은 육체노동·비밀운동과 관련을 맺으면서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한때라도 중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33년 1월과 1934년 9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4년 1월에는 12월에 풀려났으나 고문으로 얻은 병 탓에 요양을 해야 했고, 1934년 9월 당시에는 ‘공청 중앙부 조직’,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도쿄지부 재건준비회 조사이(城西)지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0] ‘공청, 반제, 전협’ 소속 이청원은 1934년 12월 일본 검찰에서 기소유보 처분을 받았다.[11]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

이청원은 후일 작성한 전향서에서 “기소유예 처분 후는 실천 운동에서 손을 뗐지만, 유물론연구회, 조선고대사연구회 등에 관계”했다고 밝혔다. 전향서를 해설한 일본 검찰 보고서에서는 1935년 8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적었는데, 1934년 12월의 기소유보 처분과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12] 1935년에 이청원은 유물론연구회 사회과학부 주최 연구회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조선 봉건 사회사」, 「조선 봉건 사회사」를 발표했다.같은 내용을 기관지 『유물론연구』에 게재하기도 했다.[13]

유물론연구회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의 핵심적 단체였다. 1928년 결성된 나프(NAPF,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는 1930년을 전후한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1931년 11월 예술가의 공산주의화를 내걸고 코프(KOPF,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로 개조된다. 카프 도쿄지부, 무산자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은 역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코프에 가입하여 코프 조선협의회를 결성하게 된다. 코프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 최후의 빛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활동의 상당 부분이 조선협의회에 결집한 재일조선인에 의해 이루어졌다.[14] 코프 조선협의회는 기관지로 『우리동무』를 발간했는데, 이청원은 제3호(1933.1.1.)에 「신흥? 「만주국」에 조선인민의 생료, 민족개량주의책동을 분쇄하라!」를 투고했다.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의 중심에는 이북만이 있었다. 나카노 시게하루가 쓴 시 「비내리는 품천역」(『개선』 1929.2.)에 부친 “이북만, 김호영에게 보낸다”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북만은 프롤테타리아과학연구소 조선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유물론연구회는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진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를 대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청원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과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이 만나는 지점 가까이에 있던 셈이다. 이북만은 스스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기소유보 처분을 받고 풀려난 이청원이 1935년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역사학 논문을 발표하게 된 데는 이와 같은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청원은 『조선사회사독본朝鮮社會史讀本』(1936)의 서문에서 책 출판을 도운 “黑田, 李北滿 및 戶坂潤, 朴容七” 등에게 감사의 뜻을 밝혔다. 도사카 준(戸坂潤)은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유물론연구회의 리더였다. 도사카는 유물론연구회 활동의 하나로서 이청원의 논문 발표를 든 바 있다.[15] ‘黑田’는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역사학자인 구로다 젠지(黑田善次)를 가리킨다. 구로다 역시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했다. 박용칠은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하던 조선인 유학생이다. 1936년 6월에 ‘조선유학생연학회朝鮮留學生硏學會’를 만드는 재도쿄 조선인 유학생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다.[16] 이청원의 역사학 연구는 이북만, 박용칠 등 재일조선인 문화운동과 도사카, 구로다 등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의 접점에서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펴내진 <조선사회사독본>은 한국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저술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였다. 이청원도 “과학적 통사로서는 최초의 책”이라고 자부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는 일약 명사로 떠올랐다. 조선학계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청원은 1936년 11월 구로다 젠지가 인민전선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에 건너가는 것을 알고, 조선에 관한 자료로서 동양협회 발행 잡지를 건네고 그를 격려했다.[17] 1936년 12월 10일 재동경 조선유학생연학회에서 「조선경제의 현단계」라는 강연을 했다. 출석자는 140명이었다.[18] 1937년 5월부터 1938년 7월 사이에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의 ‘지대론’ 등의 좌익 문헌을 읽도록 권하고, 조선 사회운동을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해설하여 좌익의식을 높이려고 했다.[19]

이청원은 일본의 사회주의운동과 좌익 문화운동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조선 역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그런 이청원을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은 존경하면서 따랐고, 일본 경찰은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의 거두’[20]로서 경계했다.

뿐만 아니라 이청원은 신문과 잡지를 매개체로 활발한 기고 활동을 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에 그가 출간한 저서는 4권이고, 미디어 기고문은 도합 36건이었다. 저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고문은 3분의 1이 일본어로, 3분의 2는 조선어로 쓰였다.[21] 특히 1935년 말부터 1937년 말까지 2년간의 활동상이 눈부셨다. 미디어 기고문 대다수가 이 연대에 몰려 있었다. 심지어 1936년 1월에는 같은 시기에 3대 신문에 연재 기사 투고를 병행할 정도였다. <동아일보>에는 ‘조선인 사상에 있어서의 ‘아세아적’ 형태에 대하야’(전 5회)와 ‘작년 중 일본학계에 나타난 조선에 관한 논저에 대하여’(전 4회)를 연재했다. <조선일보>에는 ‘고전연구의 방법론’(전 3회)과 ‘시사소감’(時事小感·전 3회)을, <조선중앙일보>에는 ‘작년 조선학계의 수확과 추세 일고(一考)’(전 11회)를 기고했다.

투옥과 전향

1938년 5월부터 이청원은 다시 잠적한다. 식민지 조선의 미디어에 대한 투고도 그 무렵에서 중단된다. 자서전에 따르면 1937년 12월에 검거되었다가, 1938년 2월에 풀려나 잠시 요양을 한 뒤, 1938년 5월부터 일본 나가노 현의 수력전기발전소 건설 공사에 종사했다고 한다. 1937년에 검거되었다는 기술은 다른 기록이나 정황에 비추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다만 1938년 5월에 일본 나가노 현으로 갔다는 기술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22]

일본 관헌 기록에 따르면 이청원은 1940년 5월 14일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반파쇼전선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공산주의자 구로다 젠지 및 중국 인민전선파 첸야, 유다오위안 등과 연락하고, 조선인 좌익 그룹을 지도한 사실이 밝혀져 12월 3일에 검찰에 넘겨졌다.[23] 1941년 1월 27일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24]

그해 9월 27일에는 보석으로 풀려났다.[25] 12월 13일 제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의 실형(미결 100일 통산)이 언도되었다.[26] 1942년 9월 6일 상고를 취하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27]

중일전쟁기 신문과 잡지에서는 일본이 제기한 동아협동체론에 고무 받아 식민지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통제경제론과 민족협화론이 터져나왔다. 중일전쟁기 내선일체의 위협 속에 조선이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1930년대 중반 조선연구의 문제의식, 즉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고민을 굴절된 형태로 계승한 셈이다. 중일전쟁기 조선이라는 주체에 착목한 임화김남천의 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성과에 입각했다. 그러나 정작 이청원이나 백남운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는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백남운도 1938년 3월 체포되어 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중일전쟁기 이청원의 생각은 전향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1941년도 사상특별연구원 판사 樋口勝 보고서’인 「좌익 전력자 전향문제에 대하여」에는 다른 일본인 전향자와 더불어 이청원이 ‘예심 판사에게 상신한 전향의 심경’을 분석하고 있다.

이청원은 전향서에서 통제경제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총동원법령은 사유재산, 생산, 분배, 배급 등에 대해, 또한 자유주의적 경제기구에 대해 하나의 커다란 제약을 부여하는 동시에, 한편에서 새로운 건설적 태도, 경제 도덕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는 빈부의 균형화로 방향 지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가 일찍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총동원법령 제11조의 발동을 중심으로 하는 재계와 군부의 의지의 차이는 내게 군부의 초계급적 존재와 그 신체제에서 추진적 역할을 충분히 인식시켜 주었습니다.”[28] 일본의 전시 통제경제가 자유경제를 제약하는 상황, 특히 재계와 갈등하며 신체제를 추진하는 군부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다음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이청원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지나 민족주의의 승인”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우리 조선민족’도 “동문동종이고 또한 도의성에 의해 표징되는 일본 국체를 신용하여 동양공동체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고도화하기 위해 이 공동체의 일 구성분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청원은 일본인의 토지 독점, 조선인 의무교육 결여, 일본으로의 도항 규제 등을 열거한 뒤 “일시동인이라는 아시아 민족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왜 이러한 차별이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고 조선인에게 ‘문화와 빵’을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협화적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했다.[29]

1938년 가을 우한, 광둥을 점령한 뒤에도 중국 국민정부가 굴복하지 않자, 일본 정부는 화평을 통한 전쟁 종결을 모색하게 된다. 그 해 10월 일본 정부는 중국에 대해 ‘공동방공...’을 제안하는 이른바 동아신질서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의 민족주의를 인정하고 일본이 주도하고, 만주국, 중국이 참여하는 일종의 연방국가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일본이 중국의 민족주의를 승인한 것을 평가하는 이청원의 주장은 명백하게 동아신질서론을 의식한 것이다. 이청원은 이를 ‘동양공동체’라고 받아들인 뒤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만주국, 중국 외에 조선도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의 의도를 넘어서는 주장이었다. 이청원은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를 ‘차별로부터의 탈출’를 위한 기회로 삼고자 했다. 나아가 조선 민족의 말살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주체를 ‘동양공동체’의 일원으로 세우려는 주장이었다.

일본 검찰은 이청원의 이러한 태도를 놓고, “총동원법령의 중요성을 그 빈부의 균형화라는 면에서 강조하거나 재계와 군부를 비교해서 후자의 초계급성 등을 운운하는 데 오히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일단 계급적 입장으로 환원하여 판단하려는 습관 –그것은 일종의 좌익적인 상식이다- 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일시동인이나 협화적 통일이라는 것이 온갖 차별을 무시한 평면적 절대 평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고 경계했다.[30] 일본 관헌은 조선인 전향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청원은 1944년 6월까지 도쿄의 도요타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반년 정도 도쿄에서 요양을 한 뒤 12월에 귀국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귀국 후에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부근 탄광 노동자들과 접촉했다고 한다. 1945년 5월에는 사회주의자 최익한(崔益翰)의 딸 최분경과 결혼했다.[31] 최익한과 이청원의 인연은 확실하지 않다. 최익한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활동하다 1928년 2월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12월에 출옥한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관계하면서 정약용을 비롯한 한국사 관련 글을 발표했다. 같은 시기 이청원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한국사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서전에서는 “8·15 해방 직전에 정세를 알려고 서울시에 갔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적었는데, 결혼 시점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북에서의 활동과 숙청

해방 직후 이청원은 장안파 공산당에 참여했다. 장안파 공산당은 직접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내건 박헌영 주도 재건파 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후 이청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 참여하여 1947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치한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1947년에 이청원이 집필한 『조선근대사연구』는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어 건국 초기 조선 역사학을 대표하는 성과로 인정 받았다. 이청원은 과학원 역사연구소의 기관지인 『력사과학』 책임편집위원을 맡는 등 조선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서 활약했다. 다만,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면서, 이청원은 연안파 지도자인 최창익 일파로 몰렸다.

이청원은 1955년 가을에 『력사과학』 제9호와 제10호에 상하로 나누어 「반일 민족 해방 투쟁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같은 해 이를 엮어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단행본을 출판했다. 이청원이 식민지기에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해 고립정책을 폈다고 서술한 데 대해, 김일성의 조국광복회에서 보듯 민족부르주아지와 연대하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폈기 때문에 애국적 역량을 모을 수 있었다면서, 이청원을 교조주의 혹은 형식주의라고 비판했다. 민족통일전선을 둘러싼 식민지기 이래의 대립이 이청원 숙청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셈이다. 가지무라 히데키는 이청원의 숙청을 놓고 “구래의 연구와 공화국 민중에게 필요한 자국사 상 사이에 어긋남이 생긴 것”[32]이라고 분석했다.

이론

내재적 발전론에서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첫 역사학 논문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 대한 서평이었다.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로 보고, 원시공산제 → 노예제(삼국시대) → 봉건제=아시아적 생산양식(통일신라~이조)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백남운의 역사상과 동일했다. 또한, 사노 마나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적 한국사 인식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을 지지했다.[33]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독자적인 사회형태가 아니라 ‘봉건제도의 동양적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히라노 요시타로(平野義太郎)에 대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하나의 사회구성체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 유물론과 모순된다고 비판했다.[34] 이청원은 마자르 학파를 ‘트로츠키주의적 편견’을 가졌다고 비판하고, 그 ‘정치적 결론’은 “동양에는 봉건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당면한 정치적 과정은 이른바 시민적인 그것이 아니라 노동자적인 그것이다”가 될 거라고 지적했다.[35] 중국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 트로츠키주의로 받아들여지면서 반(反)봉건이라는 과제 즉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경시한다고 비판받은 상황을 의식한 언급이었다.

이청원은 한국사에서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중시했다. 19세기 말까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존속했다는 김광진의 이론을 비판하고, ‘내재적 모순의 발전’에 따라 조선 중기부터 봉건제 즉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서 제한적이나마 ‘매뉴팩처’가 존재한 점과 더불어 “상공업의 지방화, 보편화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사회적인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설명했다.[36] 고대 사회에 대해서도 금속 사용은 중국에서 전해졌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원시 사회 생산력의 내적 필연에 바탕한 발전 그 자체여서 외부에서 전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37] 또한,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의 역사 인식을 봉건제 결여론이라고 지적하고 후쿠다 도쿠조(福田徳三)의 “낡은 교리를 노예적으로 복사했다”고 비판했다.[38]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던 이청원은 1936년 들어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전환한다. 먼저 봉건제 붕괴의 내재적 요인으로서 주목하던 상인자본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이청원은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이 양반과 직접 결부되어, 박해를 받기는커녕 법규적 보호를 받았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봤다.[39] 이청원은 1936년 4월 『조선사회사독본』을 펴냈는데,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고려)→봉건제(이조)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40] 이 책의 특징은 고려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 없이 한국사를 정체성론적으로 이해한 데 있었다.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에 쓴 서평을 통해 고려 노예제론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설명 부족을 비판했다.[41] 김우헌(金佑憲)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서평에서 고려 노예제론을 비판하고 이청원이 사용한 사료만 가지고도 이청원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다면서『조선사회사독본』의 모순을 지적했다. 상업 발달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도 “결코 상업 발달은 상층계급의 정언적・명령적 의도에 의해서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내에 이미 발달된 요소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라고 비판했다.[42]

이청원은 1934년 말에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1937년 3월에는 “전형적인 로마 희랍적인 노예사회를 그대로 조선의 역사 발전 행정에 적합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구출할 수 없는 결점은 공식주의’라고 비판했다.[43] 백남운은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1937) 서문에서 이청원의 고려 노예제론을 ‘소아병적 희화술(戱畵術)’이라고 비판했다.[44]

이청원은 1937년에 『조선사회사독본』에 근대사 부분을 추가하여 『조선역사독본』을 펴냈다. 여기서는 “이양선 출몰 이전 아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을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선 사회는 한번 외국 자본주의의 강요적 개국에 부딪히자마자 그 봉건적 구성은 갑자기 취약하게도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45] 백남운과 이청원 자신이 비판했던 “상업자본도 발생되지 못한 구사회가 「이양선」의 침입으로 돌연히 붕괴되엇다”는 김광진의 정체성론과 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가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는 쪽으로 전환하게 된 배경에는 이청원이 참가한 유물론연구회에는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등 서구 사회와 다른 아시아 사회의 특수성, 정체성에 주목하는 강좌파 역사학자들 때문이었다.

이청원이 『조선사회사독본』(1936) 서문에서 감사의 뜻을 밝혔고 또 개인적인 교류도 있었던 구로다 젠지는 사쿠 다쓰오(佐久達雄)라는 필명으로 『일본고대사회사』, 『동양고대사회사』(모두 백양사, 1934)를 펴낸 역사학자였다. 이청원을 유물론연구회로 이끈 고리로 판단되는 이북만은 「조선에서 토지소유형태의 변천」 등의 논문을 일본 좌파 역사학의 아성인 『역사과학』에 세 차례나 게재한 사회경제사 연구자였다.[46] 그리고 구로다 젠지, 이북만의 역사상 역시 아시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이청원은 『조선사회사독본』(1936)의 서문에서 “여러 명의 공동연구 성과도 반영하여 고심을 거듭했으므로 충분히 계몽적 의의를 지닌다”고 밝혔다. 당초 이청원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에 관심을 가졌지만, 유물론연구회 등에서 일본 학자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국사에 대한 정체성론적 인식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시아적 특수성

세계사적 보편성을 강조한 백남운과 아시아적 특수성을 주목한 이청원을 놓고 보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백남운과 그렇지 못한 이청원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달리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에서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고려했다. 나아가 해방 직후인 1946년의 글에서는 원시공산사회와 고대사회 사이에 ‘초(初)계급사회’로서 아시아적 단계를 상정하고, 이후 아시아적 노예제, 아시아적 봉건제가 이어진다고 서술했다. 일찍이 자신이 비판했던 1930년대 일본 강좌파 역사학의 시대 구분을 수용한 셈이다. 다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 참여한 후에는 고조선을 전형적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등 사적 유물론의 기계적 적용으로 회귀했다. 신생 독립국의 국민사 서술이라는 시무에 쫓겨, 세계사적 보편성과 아시아적 특수성의 조화라는 과제는 중단된 것이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높게 평가하는 등 내재적 발전의 모순을 중시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의 좌파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점차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렇게 변화된 역사상은 『조선사회사독본』(1936)에 담겼다. 이후 이청원과 백남운은 날 선 비판을 주고받았다. 백남운이 내재적 모순 발전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했다면, 이청원은 아시아적 정체성을 직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해방 후 한국사 연구에서도 아시아적 특수성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했다. 자칫 공식주의에 빠지기 쉬운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 온 미야지마 히로시, 이영훈의 연구를 생각한다면, 세계사적 보편성은 선이고 아시아적 특수성은 악이라는 단순한 규정을 내리기는 어렵다. “일찍이 미야지마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입각한 조선사의 시기 구분을 시도하여,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준으로 ‘이조기’를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宮嶋 1984b, 64)으로 규정한 바 있다. 나아가 소농사회론의 다른 한 사람의 유력한 논자인 이영훈은 미야지마의 주장을 발전시켜, 소농민 경영의 안정성에 바탕한 지주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중시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였다[47]. 흥미로운 사실은 미야지마의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간의 소농사회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스스로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했던,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영훈에 의해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되었던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를 ‘초기 근대’(宮嶋 2004, 180)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48]

『조선사회사독본』에 드러난 검열의 흔적

『조선사회사독본』은 1936년 4월에 발행되었는데, 불과 한 달 후인 5월에 개정판이 나왔다. 선행연구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발행 금지를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했지만[49], 『출판경찰보』 1936년 5월호에 실린 「내지출판물취제상황内地出版物取締狀況」을 통해 부분 ‘삭제 처분’을 받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삭제 대상은 242쪽, 247쪽, 249쪽인데 모두 “내선융화 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는 이유였다.[50]

삭제 대상으로 『출판경찰보』에서 적시한 것은 242쪽의 “이 무렵 일본 거류민의 조선인에 대한 소치는 실로 극히 ××(참혹)하여 조선인이 빌린 돈이나 외상값을 내지 않을 때는 그 조선인의 문에 못 질을 했다. 그게 점점 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 조선인을 잡아 와 그 안에 넣고 가족이나 친구가 돈을 갚기를 기다려 비로소 풀어 줬다”라는 부분이다. 이렇게 242쪽에서는 ‘나카이 킨조'中井錦城라는 일본인 관리의 ‘조선회고록'朝鮮回顧録를 인용하여 한국병합 전에 벌어진 재조 일본인의 고압적인 행위를 고발하면서 “착착 식민지화에의 준비 공작을 진행해 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47~249쪽에서는 청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했다고 서술하고, 갑오개혁을 설명하면서 “대한만세! 자유·평등·우애!”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이 ‘개혁’에 대한 동의는 그리고 협력은 조선 자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식민제도를 전제로 하여 그리고 그 발전적 완료를 위해 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다”라고도 서술하였다. 여기서 ‘×××’는 ‘일본의’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청전쟁의 참화가 한국의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삭제 처분은 발행일인 4월 5일에서 아흐레 지난 4월 14일에 내려졌다. 그렇다면 책이 이미 유포된 뒤의 삭제 처분은 어떻게 행해졌을까. 다음 달인 1936년 6월호 『출판경찰보』에 실린 「差押其の他執行狀況」에 따르면 홋카이도에서 규슈에 걸쳐 처분이 집행되어 약 20%의 압류율을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경찰 측도 “다수 부현(府縣)의 집행이 우선 주목할 만하다”라고 실적을 평가했다.[51]

일본 전국 도서관을 중심으로 소장이 확인되는 초판본을 전수 조사한 결과 전체의 약 30%에서 241-242쪽이 잘려나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사회사독본』은 초판이 내용 일부에 대해 ‘삭제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정판을 낸 것으로 판단된다.

평가

이청원은 노동자 출신의 역사학자였다. 그의 저술 활동은 고된 토목건축 노동과 동시에 병행된 것이었다. 또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실천에 가담함과 동시에 ‘과학적 조선학’ 연구를 수행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기층계급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다. 그의 연구 현장은 고등교육기관의 연구실이 아니라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조사부였다. 이청원의 저술은 학계보다는 대중 사이 소통에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매체 지면을 널리 이용했고, 단행본도 모두 ‘독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독본은 교과서 형태로 출간된 텍스트면서, 동시에 ‘노동자·농민 대중의 계몽’을 위한 텍스트였다. 그의 책이 소수 지식인에게만 유통되고 읽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대중의 의식화와 자기 주체화를 의도했음을 잘 보여준다.[52]

그러나 이청원은 식민지 사회주의자라기보다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정영환은 재일조선인 운동사를 설명하면서 1930~1955년을 “일본 공산당 입당기”라고 파악했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조선인들은 1930년 무렵 조선인 독자 조직을 해체하고 일본인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바로 이청원이 걸었던 길이다. 1920~30년대 비식민화(decolonization)의 방향을 둘러싸고 제국 내 비식민화와 탈제국 비식민화가 길항했다. 전자가 동화라면 후자는 독립이었다. 이청원처럼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인과 같은 조직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은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일본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선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연대하여 제국의 부르주아지에 맞서고자 한 이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민족부르주아지와의 연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45년 이후에도 미국의 일본 점령, 중국의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으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 1955년 재일조선인들은 북한의 해외공민이라면서 일본공산당을 탈퇴하여 총련 즉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결성했다. 도베 히데아키 님은 1955년의 변화를 ‘일본공산당의 국민화’라고 정의했다. 북한에서는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소련계와 연안계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동아시아 제국 질서의 해체와 국민국가 체제의 확립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제국의 사회주의자 이청원의 역사 인식은 설 자리를 잃었다.

참고자료

논저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
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일자 분류
李靑垣 외 今日朝鮮敎會의 發展에는 人物이냐? 金錢이냐?: 紙上討論 續論 宗敎敎育 1(8) 朝鮮主日學校聯合會 1930년 8월 잡지
李靑垣 新興? 「滿洲國」에 朝鮮農民의 生路,民族改良主義策動을 粉碎하라! 우리동무 3 1933년 1월 잡지
李靑垣 日本에 잇서서의 經濟恐慌은 어듸로 가나 新階段 1(8) 朝鮮之光社 193305 잡지
李靑垣 世界經濟恐慌과 國際經濟會議 -國際經濟會議는 무엇을 할까?- 新階段 1(9) 朝鮮之光社 1933년 6월 잡지
李靑垣 資本主義 第三期와 石油 -石油을 支配하는 者는 世界을 支配한다- 大衆 1(3) 大衆科學硏究社 1933년 6월 잡지
李靑垣 朝鮮農業の根本問題 大衆經濟 1934년 1월 잡지
李淸源 朝鮮に於ける小作農の狀態と小作令の制定(資料) 經濟評論 1(3) 1934년 11월 잡지
李淸源 「社會經濟史」を讀む 唯物論硏究 26 1934년 12월 잡지
李淸源 朝鮮に於ける階級分化に就いて 文化集團 3(2) 1935년 2월 잡지

각주

  1. 「豊特高秘第1700號 要注意鮮人所在不明手配ノ件」(1932.6.24.)(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76쪽).
  2.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思想研究資料 特輯 第九十五号 左翼前歴者の転向問題に就て』, 司法省刑事局, 1943.8.(『社會問題資料叢書 第1輯』, 1972), 195쪽.
  3. 홍종욱, ‘제국의 사회주의자-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이청원의 삶과 실천’, <상허학보> 63, 상허학회, 123쪽, 2021년
  4. 김인덕, 『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운동 연구』, 국학자료원, 1996, 278~298쪽.
  5. 리청원, ‘자서전’, 3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8-21об
  6. 1928년 경찰에 쫓기다 자결한 일본공산당 지도자 와타나베 마사노스케(渡邊政之輔)를 기념하는 날.
  7. 「豊特高秘第2686號 要視察要注意鮮人並要視察臺湾人所在不明手配ニ関スル件」(1932.10.8.)(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108쪽).
  8. 「豊特高秘第2686號 要視察要注意鮮人並要視察臺湾人所在不明手配ニ関スル件」(1932.10.8.)(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108쪽).
  9. 리청원, ‘간부리력서’, 4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6-17об
  10. 內務省警保局, 『社会運動の状況』(1934)(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三巻』, 三一書房, 1976, 129~141쪽).
  11.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34),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三巻』, 三一書房, 1976), 836쪽.
  12.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6쪽.
  13. 「報告」, 『唯物論研究』 30, 1935.4., 197쪽. 「報告」, 『唯物論研究』 32, 1935.6., 145쪽. 広瀬貞三, 「李清源の政治活動と朝鮮史研究」, 『新潟国際情報大学 情報文化学部 紀要』 7, 2004.3., 38쪽.
  14. 오무라 마스오, 「코프 조선협의회와 『우리동무』」, 『윤동주와 한국 근대문학』, 소명출판, 2016, 233~265쪽.
  15. 「唯物論硏究會關係者手記(二)(戶坂潤)」, 『極秘 思想資料パンフレット特輯 第一五號』(1940.6.)(『昭和統制史資料 第十三巻 左翼・文化運動篇①』, 1980).
  16. 內務省警保局, 『社会運動の状況』(1938)(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95~98쪽.)
  17.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5~196쪽.
  18.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36),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三巻』, 三一書房, 1976, 849쪽).
  19.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6쪽.
  20.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0),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1쪽.)
  21.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21-2, 역사문제연구소, 248~249쪽 참조, 2017년
  22.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23.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0),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6쪽).
  24.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1),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7쪽).
  25.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1),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62쪽).
  26.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6쪽.
  27.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2), 『社会運動の状況』(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94쪽).
  28.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7쪽.
  29.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200~203쪽.
  30.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9·203쪽.
  31.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32. 梶村秀樹. 1977c(1993). “日本帝国主義の問題.” 『梶村秀樹著作集 第2巻 朝鮮史の方法』. 東京: 明石書店. 318쪽.
  33.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読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34.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朝鮮封建社會史」, 『唯物論硏究』 30, 1935.4.
  35. 李淸源, 「亞細亞的生産樣式에 關하야」, 『新東亞』, 1935.9., 52·56쪽.
  36. 李淸源, 「朝鮮封建社會史(二)」, 『唯物論硏究』 31, 1935.5., 125쪽.
  37. 李淸源, 「朝鮮原始氏族共産體硏究」, 『東亞』 8-7, 1935.7., 113쪽.
  38. 李淸源, 「朝鮮原始氏族共産體硏究」, 『東亞』 8-7, 1935.7., 113쪽.
  39. 李淸源, 「朝鮮農業의 生産規模(一)(二)(三)」, 『批判』, 1936.4.・1936.6.・1937.2.
  40.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4.
  41. 旗田巍, 「批判と紹介:李清源著朝鮮社会史読本」, 『歴史学研究』 6(9), 1936.9.
  42. 金佑憲, 「李清源氏著 『朝鮮社會史讀本』를 읽고(1)~(10)」, 『朝鮮中央日報』 1936.7.23.~8.6.
  43. 李淸源, 「「朝鮮의 얼」의 現代的 考察」, 『批判』 5-3, 1937.3., 78쪽.
  44. 白南雲,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改造社, 1937.
  45. 李淸源, 『朝鮮歷史讀本』, 白揚社, 1937, 311쪽.
  46. 李北滿, 「朝鮮に於ける土地所有形態の変遷」, 『歴史科学』 1-4, 1932; 「日清戦争論」, 『歴史科学』 2-4, 1933; 林田朝人, 「李朝末葉の経済状態に関する若干の考察: 特に資本制生産様式への転化の基本的前提条件の欠如に就いて」, 『歴史科学』 5-12, 1936.
  47. 이영훈 1987, 93-94
  48. 홍종욱, 「내재적 발전론의 임계 –가지무라 히데키와 안병태의 역사학-」, 강원봉 외 편,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아연출판부, 2014, 98~99쪽.
  49. 広瀬貞三, 「李清源の政治活動と朝鮮史研究」,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 7, 2004.3, 38쪽.
  50. 「内地出版物取締狀況」, 『出版警察報』 92, 警保局圖書課, 1936.5., 136쪽.
  51. 「差押其の他執行狀況」, 『出版警察報』 93, 1936.6., 132·170쪽.
  52.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21-2, 역사문제연구소, 249쪽 각주 21 참조,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