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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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ructivist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2일 (월) 20:59 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Communist International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창립일
창립일
1919년 3월 2일
해산일
해산일
1943년 5월 15일
역사
역사

개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제2인터내셔널이 해체되면서 레닌은 1914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쓰러졌다. … 제3 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위치와 임무', CW 28, p. 40

이러한 제3 인터내셔널-일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또는 코민테른이라고도 불린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중부 유럽에 혁명적 열기가 고양되던 시기에 볼세비키의 제창으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졌다. 1차 총회에서 레닌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1]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 후에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선언했다.[2]은 비록 그것이 1935년 이후에 쇠퇴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식적인 목적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1920년 7월∼8월 사이에 열린 제2차 총회에는 41개국의 당과 조직으로부터 대표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USPD에서도 참관인이 참석했는데, 이들 프랑스와 독일 사회당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불안정한 사회민주적 요인들에 의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는 데 유의하여 총회는 엄격한 21개항의 가입 조건을 규정하였다. 가입을 원하는 모든 당들은 개량주의자와 온건 중도파들을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모두 축출해야 하며, 군대 내에서의 체계적인 선전을 포함하여 합법적인 운동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펴나가야한다. 그 시대를 '첨예화된 시민전쟁' 시기의 하나로서 규정하면서 당을 중심으로 한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했다. 즉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코민테른의 집행권 아래서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를 요구했다.[3]

코민테른은 그 법령에 백색인종만을 위해서 존재했던 제2인터내셔널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모든 유색인종 노동자들을 포용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총회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 테제는 민족 및 식민지 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 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4] 1920년에 쓰여진 레닌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적 혼란'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있어서의 '극좌익적인' 경향과 대립했으며, 코민테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 내에서의 작업과 의회 선거에 공산주의의 원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목도했던 조류였다. 그때 그는 혁명의 파고가 퇴보하고 러시아 외부의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하며, 근본적으로 러시아적 경험에 근거한 이전까지의 공세적 혁명 저술이 더 이상 서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회의는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위해 투쟁할 국내외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와 제2 인터내셔널, 그리고 비엔나 동맹이 1922년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1923년 10월에 독일 11월 혁명에 대한 희망이 좌절된 이후로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상대적인 안정화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 뒤 몇 년 동안은 소련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코민테른에서 전개되었다. 치열한 투쟁이 여러 번 전개된 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과 앵글로 러시아 노동조합 전체 위원회, 그리고 1925∼27년의 중국혁명에 적용되었던 전술과 전략이 패배하였고, 트로츠키는 1927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로부터 추방되었다.

코민테른 6차 대회

1928년에 열린 코민테른 6차 대회는 사회민주당과 통일전선을 추진하면서 그 주축을 이루는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의 관료들을 고립시키고, 공산당의 대중적 지반 확대를 골자로 삼는 포괄적인 강령을 채택했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1929)을 통해 사회민주주의의 성격 변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코민테른 6차 총회에서 제시된 통일전선의 방법론은 기존의 입장에 대한 계승으로서 사회민주당 산하의 노조원들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근로대중들을 견인하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통일전선전술을 올바르게 적용하고 대중획득의 임무 일반을 해결하는 것은 그 자체 노동조합과 기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조직들 내부에서의 체계적이며 끈질긴 활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아무리 반동적인 노동조합일지라도 대중적인 조직인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공산주의자 한사람 한사람의 직접적인 의무이다. 노동자들의 이익을 가장 단호하고 정력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노동조합 내부와 기업에서 끊임없이 일관되게 활동함과 더불어 개량주의적 관료들과 가차없이 투쟁함에 의해서만 노동자들의 투쟁 지도권을 획득하고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대중을 당의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1929), 코민테른과 통일전선, p. 274

이 당시 코민테른의 사회민주주의 비판은 유효했다. 코민테른은 1920년대 말엽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에서 사회민주당의 계급협조적 성격을 비판했고 통일전선을 강화했다.[5] 1931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는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이에, 그리고 의회 형태의 부르주아 독재와 그것의 공공연한 파시즘적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천명하였다.[6] 그러나 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각국의 노동자 봉기를 진압하는 데에 협력했으며, 192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법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공산당 산하 조직을 불법화하고, 군경을 동원하여 파시스트 조직들과 더불어 공산당원들을 탄압했다는 점에서[7]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정당한 규명이었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각국 사회민주당의 기층 당원들이 공산당들의 통일전선에 대한 제의를 호의적으로 수용했던 데에 반해 지도부의 미온한 대응은 노동운동의 통일과 단결을 저해했고,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입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기폭제로서 작용했다.

1933년 3월에 나치 독재의 확립에 뒤이어 코민테른 집행부는 코민테른에 가입된 모든 당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와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발전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785,000명을 포함해서 65개 정당에 속해 있던 300만이 넘는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하여 1935년에 열린 7차이자 마지막 코민테른 회의는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과 파시즘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인민전선으로의 확대에 유력한 실례를 만들어냈다. 보고문에서 디미트로프는, 이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간의 선택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테러주의적인 부르주아 독재 간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전략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분쇄하기 위한 소련과 서구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평화전선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항한 스페인 공화국의 투쟁에 국제적 지지를 결집시켰다.

소련 공산당에 의해 항상 효과적으로 주도되던 코민테른은 1930년대의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스탈린의 정책에 의해 몇몇 지도자가 추방되었으며 1938년 폴란드 공산당이 해체되었다. 1939년 8월의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코민테른은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스트 국가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 근거한 기존의 전략을 수정하였다. 1939년으로부터 1941년까지 코민테른은 전쟁 당시자는 모두가 부당하고 반동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 코민테른은 소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추축국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서구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1943년 6월에 소련 최고회의 상임간부회의 제안에 따라서 해체되었다. 그 상임간부회의는 크게 확대되어 있는 공산주의 운동이 과업을 수행해야 할 상황이 매우 다양하므로, 국제적 중심부에서 방향을 하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해체는 서구와의 동맹을 합리화하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각주

  1. 앞의 책, 28권 p. 477
  2. 앞의 책, 31권 pp. 197∼8)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세계 연합(Degras 1971, 2권, p. 465)'
  3. Degras, 1권 pp. 166∼172
  4. Degras, 1권 pp. 138∼44
  5. 에른스트 텔만(Ernest Thalmann)과 독일 공산당은 1928년 5월 1일의 노동절 집회에서 사민당에게 공동행동을 제의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군함 건조에 대항하여 시위를 제안했으며,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임금 삭감에 반대하여 공동행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전간기 통일전선 전술은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도 적용됐으며, 오스트리아의 경우 엥겔베르트 돌푸스에 맞서 공산당이 사회민주당에게 공동 총파업을 제의했다.
  6. Sobolev 1971, p. 313
  7. 이에 대한 예시로, 1932년 7월 17일 함부르크의 알토나(Altona) 구에서 사회민주당 당원이기도 했던 엥거슈테트(Eggerstädt)와 휘하의 경찰들은 공산당의 맞불집회에 압도당한 나치당 시위대를 구출하기 위해 기관총을 동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