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독일 철학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4월 11일 (월) 17:37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2. 독일 철학

그런데 18세기의 프랑스 철학과 나란히, 또 그것에 뒤이어 헤겔에게서 완결되는 근대 독일 철학이 발전했다. 이 근대 독일 철학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사유의 최고 형식인 변증법 논자들이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박식한 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변증법적 사유의 가장 본질적인 형식들을 연구했다. 반대로 근세 철학은 그 가운데 변증법의 탁월한 대표자들(예를 들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이 있기는 했으나, 특히 영국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18세기의 프랑스인들 또한 적어도 그들의 특수한 철학적 노작들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이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에 지배되고 있었다.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상기하면 된다. 여기서는 간단히 이 두 사고 방식의 본질을 논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자연이나 인류 역사 또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 활동을 가만히 고찰해 볼 때, 우리 앞에 우선 나타나는 것은 연관과 상호 작용의 끝없이 복잡한 화폭이다. 거기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발생하고 소멸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전체를 보게 되며 부분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둔다. 우리는 바로 무엇이 운동하고 이행하며 연관 속에 있는가에 대해서보다도 운동과 연관 자체에 더 많은 주의를 돌리게 된다. 원시적이고 소박하기는 하나 본질상 정확한 이 세계관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고유한 것으로, 그것을 비로소 명백하게 표현한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다. 그는 모든 것은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발생과 소멸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견해가 현상들의 화폭 전체의 일반적 성격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기는 하나, 이 화폭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는 화폭 전체도 명료하지 않다. 이 부분들을 인식하자면 그것을 자연적 또는 역사적 연관에서 개별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 과학과 역사 연구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다. 그런데 이 과학 부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는 부차적인 위치밖에 차지하지 못했으며,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인들은 우선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적 또는 역사적 자료가 어느 정도 수집된 뒤에야 비로소 비판적 취사 선택, 비교, 또 이에 따른 강(綱), 목(目), 종(種)으로의 구분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밀한 자연 연구의 실마리는 처음에는 오직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그리스 인들에게서, 다음에는 중세기의 아라비아인에게서나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참된 자연 과학은 15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그때부터 그것은 점점 가속적으로 끊임없이 성과를 거두었다. 자연을 개별 부분으로 분해하는 것, 유기체의 내부 구조를 다양한 해부학적 형태에 따라 연구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최근 400년간에 자연 과학의 발전이 거둔 거대한 성과의 기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법은 동시에, 자연 사물과 자연 과정을 커다란 총체적 연관 밖에서 고립적으로, 따라서 운동이 아니라 정지 상태에서,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서, 산 것으로서가 아니라 죽은 것으로 고찰하는 습관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베이컨(Bacon)과 로크가 자연 과학으로부터 철학에 도입한 이러한 인식 방법은 최근 수세기의 특별한 편협성, 즉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을 만들어 냈다.


형이상학자가 보기에 사물과 그것이 사유 속에 반영된 영상, 즉 개념은 하나하나씩 또 따로따로 연구되어야 할 개별적이며 변하지 않고 고정된, 한번 주어지면 그만인 대상이다. 형이상학자는 절대적인 대립 가운데서 사고한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라. 무엇이든지 이를 벗어난 것은 악에서 나오느니라."(마태 복음 제5장 제37절)이다. 형이상학자가 보기에 사물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어느 한 가지다. 마찬가지로 또 사물은 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것일 수는 없다. 긍정과 부정은 절대적으로 서로 배제하며, 원인과 결과 또한 서로 고정된 대립 속에 있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이른바 상식적인 사고 방식이므로, 언뜻 보기에는 아무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 상식은 벽으로 둘러싸인 가정 생활에서는 대단히 존경할 만한 동반자일 것이나, 넓은 영역에 나서 보면 아주 놀라운 모험을 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인식 방법은 대상의 성격에 따라, 넓든 좁든 어떤 영역 안에서는 정당하고 또 필요하기조차 할 것이나, 얼마 안 있어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 한계를 넘으면 그것은 일면적이고 국한되고 추상적인 것이 되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인식 방법은, 개별 사물때문에 그것들의 상호 연관을 보지 못하고, 그것들의 존재 때문에 발생과 소멸을 보지 못하며, 그것들의 정지 상태 때문에 운동을 잊어 버리고, 나무만 보지 숲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는 어떤 동물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나, 좀더 정밀하게 연구할 때는, 태아 살해가 살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 합리적인 한계를 발견코자 헛되이 애써 온 법률가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대단히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된다. 생리학은 죽음이 돌발적이고 순간적인 현상이 아니라 대단히 긴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만큼, 죽음의 순간 또한 규정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물체가 각 순간마다 같은 것이며, 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순간마다 외부에서 섭취한 물질을 동화(同化)하고 자체로부터 다른 물질을 배설하며, 또 각 순간마다 유기체의 어떤 세포들은 죽고 새 세포들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는 이 유기체의 물질은 완전히 갱신되어 다른 원자로 바꾸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체는 언제나 같은 것이면서도 같은 것이 아니다. 좀더 면밀히 연구해 볼 때 우리는 또한, 어떤 대립물의 양극---긍정과 부정---은 서로 대립하면서 동시에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들은 그 둘 사이의 모든 대립에도 불구하고 서로 침투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개별적인 경우를 세계 전체와의 일반적 연관에서 고찰하자마자, 원인과 결과는 계속 그 위치를 바꾸는 보편적 상호 작용 가운데서 서로 겹치고 얽히게 된다. 즉 여기서 또는 지금은 원인인 것이, 거기서 또는 그때에는 결과가 되며, 또는 이와 반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과 이러한 사고 방법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유의 틀에는 맞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사물과 그것의 개념적 반영을 주로 상호 연관에서, 연쇄에서, 운동에서, 발생과 소멸에서 파악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변증법으로 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정은 변증법 자체의 고유한 연구 방법을 확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자연은 변증법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다.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할 점은, 현대 자연 과학은 이러한 검증을 위해 아주 풍부하고 나날이 늘어나는 재료를 제공했으며, 그리하여 자연계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는 것, 자연계는 영원히 똑같고 늘 되풀이되는 순환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사를 거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다윈을 들어야겠다. 그는 현재의 모든 유기체, 즉 식물과 동물, 따라서 인간 또한 수백만 년 계속된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자연관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변증법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자연 과학자는 손꼽을 만큼 적기 때문에 이룩한 성과와 인습적인 사고 방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현재 이론적 자연 과학을 지배하고 있는 끝없는 혼란, 교사나 학생, 필자나 독자를 다같이 절망에 빠뜨리는 끝없는 혼란은 모두 이런 충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그 발전에 관한, 인류 발전에 관한, 따라서 또 이 발전이 인간 두뇌에 반영되는 것에 관한 정확한 관념은 오직 변증법적 방법으로써만, 발전과 소멸, 즉 전진적 변화와 퇴행적 변화 사이의 일반적 상호 작용을 계속 고찰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근대 독일 철학은 처음부터 바로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칸트는 뉴턴의---이른바 맨 처음의 충격이 한번 가해진 뒤에는---태양계를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즉 선회하는 성운(星雲)에서 태양과 모든 유성들이 생겨나는 과정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활동을 개시했다. 이때 그는 벌써 태양계의 발생이 장래의 필연적 멸망을 전제로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견해는 반세기 뒤에 라플라스에 의해 수학적으로 입증되었으며, 또 반세기 뒤에는 작열하는 가스 덩어리가 밀도를 각각 달리해 우주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분광기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 근대 독일 철학은 헤겔의 체계에서 완성되었다. 헤겔의 위대한 공적은, 그가 처음으로 자연·역사·정신적 세계 전체를 한 과정으로, 즉 끊임없는 운동·변화·전화·발전으로 보았으며 또 이 운동과 발전의 내적 연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이제 인류의 역사가 오늘의 성숙한 철학적 이성이 심판 앞에서 그저 일률적으로 단죄되고, 될수록 빨리 잊혀야 할 무의미한 폭력의 조잡한 혼돈으로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반대로 인류 역사는 인류 자체의 발전 과정으로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제 이 과정의 모든 미로 속에서 그 연속된 단계들을 추적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우연성 속에서 이 과정의 내적 합법칙성을 증명하는 것이 사유의 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헤겔의 체계가 스스로 내세운 이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괘념치 않아도 좋다고 본다. 이 체계의 역사적 공적은 이 과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이런 과제를 혼자서 해결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헤겔은 생 시몽과 함께 당시 가장 해박한 사람이었으나, 어쨌든 그는 첫째로 자기 자신의 지식이 지닌 피할 수 없는 한계로 말미암아, 둘째로 범위와 깊이에서 또한 국한되어 있는 그 시대의 지식과 견해로 말미암아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 밖에 또 세번째 사정이 있었다. 헤겔은 관념론자였다. 즉 그가 보기에는 우리 두뇌의 관념이 많든 적든 현실의 사물과 과정의 추상적인 반영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과 그것의 발전이란 다만 이미 세계가 생겨나기 전에 어딘가 존재하고 있던 '이념'이라는 것이 현실화하여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머리로(거꾸로) 세워졌고, 세계 현상의 현실적 연관이 헤겔에 의해 아무리 정확하게 또 천재적으로 파악되었다 해도 그의 체계의 세세한 부분에서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전 인수 격이고 인공적이며 허구적인 것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왜곡된 것으로 될 수밖에 없는 점이 많이 있었다. 헤겔의 체계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유산(流産)이었으나, 그 대신 그러한 체계로서는 마지막의 것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아직 구원할 수 없는 내적 모순으로 앓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인류 역사를 하나의 발전 과정으로 보는 견해, 즉 이른바 절대적 진리의 발전을 통해서 지적 완결에 이르렀다고 보지 않는 견해가 이 체계의 본질적인 전제로 되어 있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체계가 바로 이 절대적 진리의 완결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역사에 관한, 전체를 포괄하며 마침내 완결된 인식 체계라는 것은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 법칙과 모순된다.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 법칙은 외부 세계 전체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세대가 바뀜에 따라 거대하게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독일 관념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유물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단순히 18세기의 형이상학적인, 따라서 전적으로 기계적인 유물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과거의 모든 역사를 소박한 혁명적 태도로 간단히 배척해 버리는 것과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역사를 인류의 발전 과정으로 보고 이 과정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자기 과업으로 삼는다. 18세기의 프랑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헤겔의 경우에도 자연이란 뉴턴이 가르친 영원한 천체들과 린네가 가르친 변하지 않는 유기체의 종(種)들로 이루어진, 똑같고도 제한된 원 안에서 운동하는 늘 변하지 않는 하나의 총체라고 보는 자연관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관과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자연 과학의 최신 성과를 개괄한다. 이에 따르면 자연도 또한 시간상의 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천체 또한 환경이 적합하여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생겨나며 또 소멸한다. 그리고 순환은---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한---끝없이 더 거대한 규모로 된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경우에도 현대 유물론은 본질상 변증법적이어서 다른 과학 위에 군림하는 철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물과 사물에 관한 지식 사이의 일반적 연관 속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밝힐 필요가 모든 개별 과학 앞에 제기됨에 따라, 이 일반적 연관에 관한 과학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게 된다. 그래서 종래의 온갖 철학 가운데서 아직 독자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은 사유와 사유 법칙에 관한 학문, 즉 형식 논리학과 변증법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자연과 역사에 관한 실증 과학 속에 동화되고 만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자연관은 변혁은 필요한 실증적 인식 재료가 연구에 의해 제공됨에 따라서만 일어날 수 있었으나, 역사관에 결정적 변혁을 일으키게 한 역사적 사건들은 이미 훨씬 전에 일어났다. 1831년 리용에서 노동자 폭동이 처음으로 일어났고 1838~1842년에는 최초의 전국적 노동 운동인 영국 차티스트들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대공업이,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 전에 쟁취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가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투쟁이 유럽 선진 국가들에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여러 사실들은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의 이해 관계가 같다느니, 자유 경쟁의 결과로 반드시 전반적 조화와 민중의 전반적 복지가 찾아 온다느니 하는 부르주아 경제 학설의 모든 허구성을 더욱더 명료하게 폭로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또 비록 아주 불완전하기는 하나 이러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표현한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아직 청산되지 않은 낡은 관념론적 역사관은, 물질적 이해 관계에 기초를 둔 계급 투쟁을 알지 못했으며, 대체로 어떤 물질적 이해 관계도 알지 못했다. 생산과 모든 경제 관계는 '문화사'의 부차적인 요소로서 단지 부차적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종래의 모든 역사를 새로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시 상태를 뺀 과거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사회 계급들은 해당 시기의 생산 관계와 교환 관계, 한마디로 말하면 그 시대의 경제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 따라서 해당 시기의 사회 경제적 구조가 실재적 토대를 이루며, 어떤 역사적 시기의 법률·정치적 제도와 종교·철학적 및 그 밖의 견해의 상부 구조 전체는 결국 이 토대를 바탕으로 설명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헤겔은 역사관을 형이상학에서 해방해 변증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이었다. 이제 관념론은 마지막 피난처인 역사관에서조차 내쫓기고 유물 사관이 수립 되었으며, 이전과 같이 인간의 존재를 그의 의식에서 설명하는 대신에 인간의 의식을 그의 존재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회주의를 이러저러한 천재적 두뇌의 우연한 발견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겨난 두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투쟁이 낳은 필연적 결과로 보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임무는 되도록 완전한 사회 제도를 구상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계급들과 그들 사이에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하는 역사·경제적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으며, 그 과정에 의해 조성된 경제적 상태에서 충돌을 해결할 수단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 사회주의는,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자연관이 변증법이나 최신 자연 과학과 양립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유물 사관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이전의 사회주의는 비록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결과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끝장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나쁜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전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는 피할 수 없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에 격분하면 할수록, 이 착취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제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발생이 그 역사적 연관에서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역사적 시기에는 필연적이라는 것, 따라서 그 몰락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 생산 양식의 내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잉여 가치의 발견으로 이루어졌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의 점유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이 생산 양식으로 실현되는 노동자 착취의 기본 형태라는 것, 자본가는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상품 시장에서 갖는 가치를 그대로 다 지불하고 사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 노동력에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거기서 짜 낸다는 것, 그리고 이 잉여 가치가 결국은 유산 계급에 의한 축적을 통해 계속 늘어나는 자본량의 원천이 되는 가치액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어떻게 수행되며 또 자본은 어떻게 생산되는가가 설명되었다.


이 두 가지의 위대한 발견---유물 사관과 잉여가치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니는 비밀을 폭로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 발견으로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이 과학을 모든 세세한 부분에 걸쳐서 또 모든 상호 연관 속에서 앞으로 더욱 완성해 나가는 것이 문제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