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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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4월 3일 (일) 19:57 판 (새 문서: {{인물 |배경색 = #005ba6 |글씨색 = #ffc224 |너비 = |문양 = Flag of the President of South Korea.svg |문양 크기 = 75px |직책 =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이름 = 노무현 |다른 이름 = 盧武鉉 |명언 =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그것을 거역할 순 없습니다.<br>그러나 최소한 자주국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출생일 = 1946년 9월 1일 |출생지 = 미군정 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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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그것을 거역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주국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출생
출생
1946년 9월 1일

미군정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30
(現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
사망
사망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금오로 20
국적
국적
미군정 → 대한민국
약력
약력


개요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민주화운동가, 인권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정부를 참여정부라고 한다.

생애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6년에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하였다.

어망 제조업체에 잠시 다녔으며,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968년 입대하여 1971년 만기제대하였다.

1973년 1월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다.

1978년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으며, 6월 항쟁에 앞장섰다.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으며,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5공화국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에 대해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19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고 낙선하였다.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과 물결유세단 단장을 거쳐 1993년 통합민주당의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고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맡았다.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였으며,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으며,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4년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에게 탄핵되었으나,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2007년 10월 4일 대통령으로서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다.

퇴임 이후에도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국정원은 전문가를 동원[1]하여 허위사실을 조작하였고 언론은 합심하여 노무현을 극단적으로 인격살해하였다.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각주

  1. http://m.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28 “‘논두렁 시계’…국정원, 더 치명적 프레임 위해 심리학자들 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