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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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역사 ==
2009년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노동자공동정치투쟁단>, 1년간의 ‘사회주의당 건설 전면화를 위한 전국토론회'를 걸쳐 출범했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의 창립총회와 출범식은 2010년 5월 9일 4시,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준비모임, 노동자투쟁연대, 사노위 건설을 향한 전원회의 등이 지난 1년 여간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노동자공동정치투쟁단', ‘사회주의당 건설 전면화를 위한 전국토론회'와 현장토론회를 거쳐,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한 정치조직으로서 출범했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의 창립총회와 출범식이 2010년 5월 9일 4시,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준비모임, 노동자투쟁연대, 사노위 건설을 향한 전원회의 등이 지난 1년 여간 전국공동토론회와 현장토론회를 거쳐,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한 정치조직으로서 출범했다.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분회’구성과 관련해서는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천적 권위 확보, 모든 회원은 분회에 속해 활동 20명 이상의 경우 시구 지구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리했다.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분회’구성과 관련해서는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천적 권위 확보, 모든 회원은 분회에 속해 활동 20명 이상의 경우 시구 지구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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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위 출범식에서는 [[백기완]], 이수갑의 축사와 송경동 시인의 축시낭독, 성원정치연설 등과 축하 공연, 그리고 출범 선언문, 결의문 낭독으로 이어졌다.<ref>https://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2992448789</ref>
사노위 출범식에서는 [[백기완]], 이수갑의 축사와 송경동 시인의 축시낭독, 성원정치연설 등과 축하 공연, 그리고 출범 선언문, 결의문 낭독으로 이어졌다.<ref>https://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2992448789</ref>
사노위는 11개 정치원칙을 정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과 ‘강령상의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자의 공동실천 조직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의 출범 정신은,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과 당 건설추진위 운동 전면화로 요약되었다.
사노위의 강령안은 세 개로 나뉘었는데, 사노위 의견그룹(초기 5인 연서명) 안은 [[소련]] 사회성격을 [[국가자본주의론|국가자본주의]]로 보는데 대체로 동의했으며,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인식하고 노동자가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반면 사노준 세력이 제출한 3인안은 소련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실패한 국가로,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자본주의로 보는 것에 반대했다. 단지, 북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체 형성을 지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국제볼셰비키그룹이 제출한 2인안(제4인터내셔널안이라고도한다)은 소련 사회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중국, 북한 등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로 각각 규정했다. 또한 현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한 정세 인식은, 5인안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경향을 얘기했다면, 3인안은 세계자본주의의 장기적-구조적 위기의 산물로 이해했다.
다른 논쟁거리는 당 추진위 건설과 관련한 사노위 조직 활동 원칙과 운영 문제였다. 특히 사노위 안에서 [[민주노총]] 현장조직파인 [[노동전선]]과 어떻게 조직적 위상과 실천 관계를 맺고 활동할 것인가의 문제는 내부적으로 중요한 사항이었다.
사노위 일부 지역은 거의 노동전선 활동에 치중했었다. 사실상 사노위는 당 추진위 기초 조직으로 나가야 할 현장 분회 활동에 대한 자기 규정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노위가 아무리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 대중화를 소리 높여 내걸고 있음에도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뿐, 실제 각각의 일상 활동영역에서 회원들의 실천은 노동전선이나 단체, 부문운동의 한계 안에 안주하여 그 틀을 넘어서고 있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노위 1차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가입원서 작성을 거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사노준 경향이 다수인 사노위 중앙위원회는 “3차 총회에서 강령초안이 채택되지 않을 경우, 차기 총회에서 강령초안을 유보 없이 채택한다.”고 결정하여 다수파 중심의 강령 안을 표결로 밀어붙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단일한 강령을 작성할 것을 전제로 강령기초위원을 선출한다”고 결정했다. 이미 단일안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5인안을 제출했던 의견그룹의 강령기초위원들을 배제하고, 의견그룹 이탈 세력들을 새로 구성하는 강령기초위에 포함시킴으로서 단일안 구성에 배제했다.
2011년 9월 7일, 2차 강령위 과정에서 마련된 단일안은 서로의 이견 부분은 삭제하고 공통부분만을 기술하는 강령안이 된 것에 대해 예민한 정치 사안에 통일되고 일관된 입장으로 대응하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혁명을 조직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반대한 국제볼셰비키그룹이 이탈했다.<ref>https://m.cafe.daum.net/umogmin/MEZR/51</ref>





2024년 2월 14일 (수) 05:51 판

현장파 계열 노동단체
전 신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준비모임
사회주의노동자연합(개별합류)
노동자투쟁연대
국제볼셰비키그룹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후 신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추진모임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자 모임
볼셰비키그룹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社會主義勞動者政黨 建設 共同實踐委員會
창립일
창립일
2010년 5월 9일
해산일
해산일
2014년 1월 18일
기관지
기관지
정치신문 사노위
역사
역사


개요

역사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의 창립총회와 출범식은 2010년 5월 9일 4시,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준비모임, 노동자투쟁연대, 사노위 건설을 향한 전원회의 등이 지난 1년 여간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노동자공동정치투쟁단', ‘사회주의당 건설 전면화를 위한 전국토론회'와 현장토론회를 거쳐,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한 정치조직으로서 출범했다.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분회’구성과 관련해서는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천적 권위 확보, 모든 회원은 분회에 속해 활동 20명 이상의 경우 시구 지구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리했다.

사노위를 이끌 집행부로 공동대표으로 이경수, 양효식이, 중앙집행위원으로 박성인, 박준선, 정명진, 고민택이, 강령기초위원으로 오세철, 양효식, 장혜경, 남구현이, 선출직 중앙위원으로는 오세철, 양규현, 정윤광, 이종회, 조돈희를 각각 선출했다.

사노위 출범식에서는 백기완, 이수갑의 축사와 송경동 시인의 축시낭독, 성원정치연설 등과 축하 공연, 그리고 출범 선언문, 결의문 낭독으로 이어졌다.[1]

사노위는 11개 정치원칙을 정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과 ‘강령상의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자의 공동실천 조직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의 출범 정신은,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과 당 건설추진위 운동 전면화로 요약되었다.

사노위의 강령안은 세 개로 나뉘었는데, 사노위 의견그룹(초기 5인 연서명) 안은 소련 사회성격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는데 대체로 동의했으며,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인식하고 노동자가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반면 사노준 세력이 제출한 3인안은 소련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실패한 국가로,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자본주의로 보는 것에 반대했다. 단지, 북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체 형성을 지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국제볼셰비키그룹이 제출한 2인안(제4인터내셔널안이라고도한다)은 소련 사회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중국, 북한 등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로 각각 규정했다. 또한 현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한 정세 인식은, 5인안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경향을 얘기했다면, 3인안은 세계자본주의의 장기적-구조적 위기의 산물로 이해했다.

다른 논쟁거리는 당 추진위 건설과 관련한 사노위 조직 활동 원칙과 운영 문제였다. 특히 사노위 안에서 민주노총 현장조직파인 노동전선과 어떻게 조직적 위상과 실천 관계를 맺고 활동할 것인가의 문제는 내부적으로 중요한 사항이었다.

사노위 일부 지역은 거의 노동전선 활동에 치중했었다. 사실상 사노위는 당 추진위 기초 조직으로 나가야 할 현장 분회 활동에 대한 자기 규정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노위가 아무리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 대중화를 소리 높여 내걸고 있음에도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뿐, 실제 각각의 일상 활동영역에서 회원들의 실천은 노동전선이나 단체, 부문운동의 한계 안에 안주하여 그 틀을 넘어서고 있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노위 1차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가입원서 작성을 거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사노준 경향이 다수인 사노위 중앙위원회는 “3차 총회에서 강령초안이 채택되지 않을 경우, 차기 총회에서 강령초안을 유보 없이 채택한다.”고 결정하여 다수파 중심의 강령 안을 표결로 밀어붙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단일한 강령을 작성할 것을 전제로 강령기초위원을 선출한다”고 결정했다. 이미 단일안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5인안을 제출했던 의견그룹의 강령기초위원들을 배제하고, 의견그룹 이탈 세력들을 새로 구성하는 강령기초위에 포함시킴으로서 단일안 구성에 배제했다.

2011년 9월 7일, 2차 강령위 과정에서 마련된 단일안은 서로의 이견 부분은 삭제하고 공통부분만을 기술하는 강령안이 된 것에 대해 예민한 정치 사안에 통일되고 일관된 입장으로 대응하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혁명을 조직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반대한 국제볼셰비키그룹이 이탈했다.[2]



역대 지도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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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