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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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파 계열 노동단체
전 신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준비모임
사회주의노동자연합(개별합류)
노동자투쟁연대
국제볼셰비키그룹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후 신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추진모임

사노위 정치적 해산 선언자 모임
볼셰비키그룹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社會主義勞動者政黨 建設 共同實踐委員會
창립일
창립일
2010년 5월 9일
해산일
해산일
2014년 1월 18일
기관지
기관지
정치신문 사노위
역사
역사


개요

역사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의 창립총회와 출범식은 2010년 5월 9일 4시,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준비모임, 노동자투쟁연대, 사노위 건설을 향한 전원회의 등이 지난 1년 여간 '사회주의혁명정당 건설 노동자공동정치투쟁단', ‘사회주의당 건설 전면화를 위한 전국토론회'와 현장토론회를 거쳐,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한 정치조직으로서 출범했다.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분회’구성과 관련해서는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천적 권위 확보, 모든 회원은 분회에 속해 활동 20명 이상의 경우 시구 지구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리했다.

사노위를 이끌 집행부로 공동대표으로 이경수, 양효식이, 중앙집행위원으로 박성인, 박준선, 정명진, 고민택이, 강령기초위원으로 오세철, 양효식, 장혜경, 남구현이, 선출직 중앙위원으로는 오세철, 양규현, 정윤광, 이종회, 조돈희를 각각 선출했다.

사노위 출범식에서는 백기완, 이수갑의 축사와 송경동 시인의 축시낭독, 성원정치연설 등과 축하 공연, 그리고 출범 선언문, 결의문 낭독으로 이어졌다.[1]

사노위는 11개 정치원칙을 정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과 ‘강령상의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자의 공동실천 조직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의 출범 정신은,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과 당 건설추진위 운동 전면화로 요약되었다.

사노위의 강령안은 세 개로 나뉘었는데, 사노위 의견그룹(초기 5인 연서명) 안은 소련 사회성격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는데 대체로 동의했으며,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인식하고 노동자가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반면 사노준 세력이 제출한 3인안은 소련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실패한 국가로,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을 자본주의로 보는 것에 반대했다. 단지, 북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체 형성을 지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국제볼셰비키그룹이 제출한 2인안(제4인터내셔널안이라고도한다)은 소련 사회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중국, 북한 등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로 각각 규정했다. 또한 현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한 정세 인식은, 5인안이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경향을 얘기했다면, 3인안은 세계자본주의의 장기적-구조적 위기의 산물로 이해했다.

사노위 강령토론에는 상이한 안(案)이 세 가지 제출됐다. 이를 다수에 의한 견해로 단일안을 만들자는 세력(사노위 다수파)에 대해, ‘정치토론’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는 쪽(사노위 의견그룹 28인)이 사노위의 정치적 해산을 선언하는 일이 2일 발생했다.

의견그룹 측은 관련 문건에서 “밀실 논의를 통해 단일안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은 정치적 통일에 기초한 당 강령의 정립이 아니라 조직 보존주의를 앞세운 야합”이며, “이제 다수파 앞에는 ‘주체형성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조합운동과 부문운동들을 병렬적으로 모아놓는 연방주의, 추수주의 조직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고 밝혔다. 다수파가 주장하는 민주집중제 거부 및 조합주의·부문주의(여성, 환경 등) 경향 등은 사회주의 운동 방식이 아니라고 정면 비판했다.[2]

2011년 9월 7일, 2차 강령위 과정에서 마련된 단일안은 서로의 이견 부분은 삭제하고 공통부분만을 기술하는 강령안이 된 것에 대해 예민한 정치 사안에 통일되고 일관된 입장으로 대응하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혁명을 조직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반대한 국제볼셰비키그룹이 이탈했다.[3]

사노위는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 복원을 목표로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전국 활동가 모임(약칭 변혁모임)'으로 개편된다. 12월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이끌어온 김소연 전 기륭전자 분회장을 무소속 노동자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여 진보신당연대회의 등과 공동 선거운동을 벌여 16,687표로 0.05%의 득표를 얻어 5위로 낙선했다.

역대 지도부

인물

의의 및 한계

사노위 안에서 중요한 과제는 강령과 조직 활동 문제였다.

첫째, 사노위에서 필요한 것은 3주체와 개별 활동가 등의 각각의 이질적인 세력들이 그간 활동했던 사회주의 이론적 실천과 부문, 영역, 현장 투쟁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혁명주의 입장에 선 ‘총체적인 사회주의 강령 노선의 통일’이었다.

이러한 성과 위에서, 공공연한 사회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강령’과 가장 ‘구체적인 정치 투쟁’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강령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강조하건데, 강령은 단지 이론의 산물이 아니다. 강령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국제 노동자 계급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의 몰락 원인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성격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당추진위가 추구할 건설할 사회주의 상이며, 사회주의 정치 선전 선동과 직결된다.

또 다른 측면은 현 시기 자본주의 위기를 둘러싼 시대 규정이다. 시대 규정은 정치조직의 전략과 전술을 규정한다.

그러나 사노위 다수파는 현 사노위 구성원들을 하나의 조직에 남아있게 하는 데에는 최선일지 모르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기를 피하였다.

둘째는 당 추진위 건설과 관련한 사노위 조직 활동 원칙과 운영 문제였다. 특히 사노위 안에서 민주노총 현장조직파인 노동전선과 어떻게 조직적 위상과 실천 관계를 맺고 활동할 것인가의 문제는 내부적으로 중요한 사항이었다.

사노위 일부 지역은 거의 노동전선 활동에 치중했었다. 사실상 사노위는 당 추진위 기초 조직으로 나가야 할 현장 분회 활동에 대한 자기 규정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노위가 아무리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 대중화를 소리 높여 내걸고 있음에도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뿐, 실제 각각의 일상 활동영역에서 회원들의 실천은 노동전선이나 단체, 부문운동의 한계 안에 안주하여 그 틀을 넘어서고 있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노위 1차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가입원서 작성을 거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사노위가 비록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추진하는 세력을 통합하는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의는 있다. 현 시기 남한 노동자계급운동 속에서 혁명정당 건설투쟁이 넘어야 할 강령적 과제와 토론, 조직 활동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당 건설 운동을 전면화하는 데서 일정한 진전을 이루어냈다. 마지막으로 사노위 강령· 조직 문제를 둘러싼 내부 투쟁에서, 구 서클적 질서와 해체를 통해, 명확한 정치적 지향과 강령적 사고 틀에 입각한 세력이 새롭게 결집되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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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