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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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Lenin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0월 23일 (월) 11:11 판
제목: 스페인 내전(1936-39년)의 교훈
부제: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저자: 진보노동당
주제: 스페인 내전
발표시기: 1974년
출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스페인 내전(1936-39년)의 교훈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저자: 진보노동당 /번역: 편집부


편집자의 주
이 글은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Progressive Labor. Vol. 9. No. 5 Oct.-Nov. 1974), pp.106-116)의 번역이다. 이 글은 스페인 내전기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동안 스페인 내전에 대해 한국에 번역·소개된 것들(책, 영화 등)이 대개 트로츠키주의자들 혹은 우익들의 악선동이었음에 반해, 이 글은 스페인 내전기 공산당의 활동상을 정확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글이다. 다만, '인민전선'을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역사적으로 다소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어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오류는 PLP의 다른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이 선전주의 혹은 최대강령주의에 일정하게 경도되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인민전선'에 관련한 보다 깊은 논의는 다름을 참조하라: 문영찬 "통일전선 전술의 현재적 의미", <<노동사회과학>> 제2호, 2009.6.). 이 점만 주의해서 읽는다면, 이 글은 스페인 내전에 관한 진실을 접근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들어가며

스페인 내전은 유럽에서의 제2차 대전의 서막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파시즘에 대한, 그리고 구(舊) 공산주의 운동이 극복하지 못했던 계급협조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실험장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에 뒤이은 제2차 대전과 달랐다. 스페인에서는 주요한 자본가 세력들이―상호 간의 모순에도 불구하고―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위협, 1934년의 아스투리아 봉기로 현실화된 위협에 대항하여 단결했던 것이다.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민주국가들’로부터 적극적 혹은 ‘중립적’ 지원을 받으며 쏘련을 공격하고 있던 히틀러의 독일과, 제국주의자들이 원했던 것과 같이, 전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제국주의자들은 서로 싸웠고, 쏘련의 노동자들은 사실상 자력으로 히틀러를 분쇄하지않으면 안 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역사는, 스페인 공산당원들이나 코민테른, 스탈린을 헐뜯으려는 온갖 종류의 공산주의 탄압자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선점되어 왔다. 반공적 저술가들은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거의 10월 혁명에 대해서만큼이나 많은 거짓말을 양산해왔다. 이 글은, 이러한 거대한 쓰레기 더미 밑에 묻혀온, 노동자 계급을 위한 스페인 내전의 교훈의 일부를 발굴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내전의 연구는 많은 점에서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실천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서 스페인 공산당(PCE)과 코민테른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정치적 군사적 리더쉽을 발휘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스페인 공산당은, 오웰(Orwell)에서부터 촘스키(Chomsky)까지의 반공적 저술가들에 의해 사랑 받는 모든 ‘좌익’ 비겁자 집단들과 달리, 거대한 물질적 곤란들과 자신들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수십만의 근로인민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조직할 수 있었다.

스페인 공산당의 오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진보노동당(PLP) 노선의 다음과 같은 주요 요점들을 입증해주고 있다.

(1)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을 방기할 때 패배한다 (2) 파시즘과의 투쟁은노동자의 승리에 결정적이다 (3) 민족주의나 자본가들과의 동맹은 재앙이다 (4) 다양한 사이비 좌익 집단들―무정부주의자들(Anarchists) 및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단결’은 자본가들과의 ‘단결’ 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스페인 공화국

스페인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농업적이고 공업의 주요 부분이 외국의 자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2류의(minor) 자본주의 국가이다. 1930년대에는 공업이 아스투리아와 바스크(Basque) 주의 북부 해안을 따라서(주로 광업), 그리고 동부 해안의 카탈로니아(Catalonia)에(경공업) 집중되어 있었다. 영국인이나 프랑스인, 벨기에인, 캐나다인, 미국인 자본가들이 주요한 외국인 소유자들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대토지소유자였고, 제수이트회(Jesuits)는 주요 은행들과 철도, 광산, 공장들을 소유 혹은 통제하고 있었다.[1]

스페인 공화국은 1931년에 국왕 알폰소 13세(Alfonso XIII)가 “(그의) 국왕대권의 사용을 보류”하기로 결정하고 나라를 떠남으로써 수립되었다.[2] 모로코 북부 산악지대주민들과의 (8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든) 여러 해에 걸친 식민지 전쟁으로 약화되고 평판이 나빠져서, 그리고 세계대공황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왕정은 더 이상 유효한 부르주아 지배형태일 수 없었고, 처음에는 부르주아 공화정에 의해서 그리고 다음에는 파시즘에 의해서 대체되었던 것이다.

공화국은 (양성의) 보통선거권을 확립했고, 충분치 못한 토지개혁을 선포했으며, 공공교육을 확대하고, 군과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축소했다. 카탈로니아주와 바스크 주에는 제한적인 독립성이 부여되었고, 바르셀로나의 지방자치 정부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으로 불리는 카탈로니아 정부로 재편되었다.[3]

1932년에 산후르호(Jose Sanjurjo, 1872. 3. 28.-1936. 7. 20.) 장군이 소집단의 왕정주의자들, 지주들, 성직자들 및 군 장교들을 이끌고 공화정에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지배계급 주요 세력들의 지지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하지만, 1933년 11월의 선거에서는 우익 세력들이 사실상 승리했다. 의회(Cortes)의 최대 다수당은 우익 가톨릭 정당인 CEDA였지만, 최초의 정부는 중도 정당들과의 연립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정부는 이전의 개혁의 다수를 중단하거나 역전시켰고 산후르호를 사면했다.[4]

1934년 10월 CEDA 출신의 각료[3인: 역자]가 포함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자 노총(UGT, Union General de Trabajadores)의 사회당원들과 공산당원들은 이를 파시즘의 개시로 간주, 마드리드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UGT의 지도부는지하로 잠입했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끌던 거대 노총인 CNT(Confederacion Nacional del Trabajo)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파업은 단명으로 끝났다.[5] 카탈로니아에서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 자치정부)이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다시 이에 참가하지 않았고, 반란은 단명했다.

그런데 아스투리아 지방에서는 사회주의적 광부들과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광부들이 협력,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켜 쏘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정부는 외인부대와 고데드(Goded) 장군 및 프랑코(Franco) 장군이 지휘하는 무어인(Moorish) 정규군을 불러들였다. 모로코 전쟁에서 군단을 지휘하여 명성을 얻은 프랑코는 백만장자인 후안 마르시(Juan March)에 의해 이 진압 작전을 지휘하도록 선발되었는데, 후안 마르시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6]치열한 전투 끝에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3,000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 항복 후에 살해되었다. 3만 명이 수감되었다.[7]

아스투리아 반란은 스페인 정치의 전환점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주기적인 반란과는 달리 그것은 스페인에서의 노동자계급 혁명의 가능성을 고려할 만큼 광범하고 잘 조직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교훈을 잘 배웠으나, 대부분의 좌익은 그렇지 못했고, 이 때문에 장래에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36년 2월에 있을 다음 선거에 대비하여 좌익 정당들은 이른바 ‘인민전선’ 명부를 작성했다. 파시즘 및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을 고려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 및 일부 부르주아적 분자들과 동맹을 형성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평화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상인 인민전선 전략은 제7차 코민테른 총회[1935년]에서 개발되었다. 이 강령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의 구성을 시도하고, 때로는 공산당원들의 부르주아 정부 참여를 시도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인민전선은 그리하여 기층민중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계급협조주의적 지도부도 포괄한 동맹이었고, “나쁜” 파쇼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좋은”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을 지원한 동맹이었다. 이 노선은 G. 디미트로프(Dimitroff)에 의해서,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의 그의 모든 면에서 신중한 연설에 의해서 명시되었다. 디미트로프는 루즈벨트의 ‘뉴딜’을 파시즘과 결부시키는 동무들은 연합전선에 대하여 ‘판에 박은 접근’을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를 공격하고 있는, 미국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이 무엇보다도 우선, 미국에서 파시즘 운동을 고무․조직하고 있는 바로 그 세력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진부한 책략의 고질적 옹호자임에 틀림없다.[8]

그러나 스페인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의 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주게 되는 것처럼,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의 차이는 단지 잠정적이고 전술적일 뿐이다. 동일한 자본가들이 어떤 곳 어느 때에는 ‘민주주의’에 의해서, 다른 곳 따른 때에는 파시즘에 의해서 자신들의 지배를 확보하려고 한다. 아래에서 우리는, 스페인 공화국이 원조를 호소했던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의 자본가들이 스페인 공화파를 원조하는 대신에 어떻게 자국의 파시스트들을 도왔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배계급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스페인 공산당원들의 완전히 무익한 노력이 어떻게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는가도 보게 될 것이다. 지원의 최소 조건은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사실상 노동자 지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노동자 지배가 즉각적인 목표임을 부인했다. 이는 대중적 선전을 고려한 노선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당원을 모집하고 당의 기초를 조직한 노선이었다. 그리하여 공화국 정부의 배신과 무능, 패배주의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되었을 때 스페인 공산당은 일부 최악의 배신자들을 정부에서 추방하고자 했고 추방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투쟁을 노동자 정부 수립으로 이끌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파시스트의 발흥

승리를 위한 공산당원들의 조직

아라곤과 카탈로니아 -무정부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혁명놀이-

트로츠키주의자들, 무대를 잃다

POUM 지도자들은 프랑코의 첩자들?

공산당원들의 오류, 인종주의

게릴라전

사회주의 -승리로의 유일한 길-

각주

  1. Frank Jellinek, The Civil War in Spain, London, 1938, 제1, 2, 4장.
  2. Hugh Thomas, The Spanish Civil War, New York, 1961, p. 19.; (1931년 4월 1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공화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국왕 올폰소 13세가 프랑스로 망명했다.―역자)
  3. 같은 책, 제3, 4, 5, 6, 7장.
  4. 같은 책, 제 7, 8장.
  5. [역주] 스페인 노동운동에는 맑스주의가 소개되기에 앞서 바쿠닌 파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먼저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적-쌩디칼리스트적 경향이 강했다.
  6. Arthur Landis, Spain! The Unfinished Revolution, Baldwin Park, Cal., 1972, p.58.
  7. Thomas, pp. 80-5.
  8. G. Dimitroff, United Front Against Fascism, New York, 1937, p.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