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의 교훈

좌파도서관
제목: 스페인 내전(1936-39년)의 교훈
부제: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저자: 진보노동당[1]
주제: 스페인 내전
발표시기: 1974년
출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스페인 내전(1936-39년)의 교훈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저자: 진보노동당[1] /번역: 편집부


편집자의 주
이 글은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Progressive Labor. Vol. 9. No. 5 Oct.-Nov. 1974), pp.106-116)의 번역이다. 이 글은 스페인 내전기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동안 스페인 내전에 대해 한국에 번역·소개된 것들(책, 영화 등)이 대개 트로츠키주의자들 혹은 우익들의 악선동이었음에 반해, 이 글은 스페인 내전기 공산당의 활동상을 정확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글이다. 다만, '인민전선'을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역사적으로 다소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어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오류는 PLP의 다른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이 선전주의 혹은 최대강령주의에 일정하게 경도되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인민전선'에 관련한 보다 깊은 논의는 다름을 참조하라: 문영찬 "통일전선 전술의 현재적 의미", <<노동사회과학>> 제2호, 2009.6.). 이 점만 주의해서 읽는다면, 이 글은 스페인 내전에 관한 진실을 접근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들어가며

스페인 내전은 유럽에서의 제2차 대전의 서막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파시즘에 대한, 그리고 구(舊) 공산주의 운동이 극복하지 못했던 계급협조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실험장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에 뒤이은 제2차 대전과 달랐다. 스페인에서는 주요한 자본가 세력들이―상호 간의 모순에도 불구하고―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위협, 1934년의 아스투리아 봉기로 현실화된 위협에 대항하여 단결했던 것이다.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민주국가들’로부터 적극적 혹은 ‘중립적’ 지원을 받으며 쏘련을 공격하고 있던 히틀러의 독일과, 제국주의자들이 원했던 것과 같이, 전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제국주의자들은 서로 싸웠고, 쏘련의 노동자들은 사실상 자력으로 히틀러를 분쇄하지않으면 안 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역사는, 스페인 공산당원들이나 코민테른, 스탈린을 헐뜯으려는 온갖 종류의 공산주의 탄압자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선점되어 왔다. 반공적 저술가들은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거의 10월 혁명에 대해서만큼이나 많은 거짓말을 양산해왔다. 이 글은, 이러한 거대한 쓰레기 더미 밑에 묻혀온, 노동자 계급을 위한 스페인 내전의 교훈의 일부를 발굴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내전의 연구는 많은 점에서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실천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서 스페인 공산당(PCE)과 코민테른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정치적 군사적 리더쉽을 발휘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스페인 공산당은, 오웰(Orwell)에서부터 촘스키(Chomsky)까지의 반공적 저술가들에 의해 사랑 받는 모든 ‘좌익’ 비겁자 집단들과 달리, 거대한 물질적 곤란들과 자신들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수십만의 근로인민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조직할 수 있었다.

스페인 공산당의 오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진보노동당(PLP) 노선의 다음과 같은 주요 요점들을 입증해주고 있다.

(1)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을 방기할 때 패배한다 (2) 파시즘과의 투쟁은노동자의 승리에 결정적이다 (3) 민족주의나 자본가들과의 동맹은 재앙이다 (4) 다양한 사이비 좌익 집단들―무정부주의자들(Anarchists) 및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단결’은 자본가들과의 ‘단결’ 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스페인 공화국

스페인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농업적이고 공업의 주요 부분이 외국의 자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2류의(minor) 자본주의 국가이다. 1930년대에는 공업이 아스투리아와 바스크(Basque) 주의 북부 해안을 따라서(주로 광업), 그리고 동부 해안의 카탈로니아(Catalonia)에(경공업) 집중되어 있었다. 영국인이나 프랑스인, 벨기에인, 캐나다인, 미국인 자본가들이 주요한 외국인 소유자들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대토지소유자였고, 제수이트회(Jesuits)는 주요 은행들과 철도, 광산, 공장들을 소유 혹은 통제하고 있었다.[2]

스페인 공화국은 1931년에 국왕 알폰소 13세(Alfonso XIII)가 “(그의) 국왕대권의 사용을 보류”하기로 결정하고 나라를 떠남으로써 수립되었다.[3] 모로코 북부 산악지대주민들과의 (8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든) 여러 해에 걸친 식민지 전쟁으로 약화되고 평판이 나빠져서, 그리고 세계대공황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왕정은 더 이상 유효한 부르주아 지배형태일 수 없었고, 처음에는 부르주아 공화정에 의해서 그리고 다음에는 파시즘에 의해서 대체되었던 것이다.

공화국은 (양성의) 보통선거권을 확립했고, 충분치 못한 토지개혁을 선포했으며, 공공교육을 확대하고, 군과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축소했다. 카탈로니아주와 바스크 주에는 제한적인 독립성이 부여되었고, 바르셀로나의 지방자치 정부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으로 불리는 카탈로니아 정부로 재편되었다.[4]

1932년에 산후르호(Jose Sanjurjo, 1872. 3. 28.-1936. 7. 20.) 장군이 소집단의 왕정주의자들, 지주들, 성직자들 및 군 장교들을 이끌고 공화정에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지배계급 주요 세력들의 지지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하지만, 1933년 11월의 선거에서는 우익 세력들이 사실상 승리했다. 의회(Cortes)의 최대 다수당은 우익 가톨릭 정당인 CEDA였지만, 최초의 정부는 중도 정당들과의 연립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정부는 이전의 개혁의 다수를 중단하거나 역전시켰고 산후르호를 사면했다.[5]

1934년 10월 CEDA 출신의 각료[3인: 역자]가 포함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자 노총(UGT, Union General de Trabajadores)의 사회당원들과 공산당원들은 이를 파시즘의 개시로 간주, 마드리드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UGT의 지도부는지하로 잠입했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끌던 거대 노총인 CNT(Confederacion Nacional del Trabajo)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파업은 단명으로 끝났다.[6] 카탈로니아에서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 자치정부)이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다시 이에 참가하지 않았고, 반란은 단명했다.

그런데 아스투리아 지방에서는 사회주의적 광부들과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광부들이 협력,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켜 쏘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정부는 외인부대와 고데드(Goded) 장군 및 프랑코(Franco) 장군이 지휘하는 무어인(Moorish) 정규군을 불러들였다. 모로코 전쟁에서 군단을 지휘하여 명성을 얻은 프랑코는 백만장자인 후안 마르시(Juan March)에 의해 이 진압 작전을 지휘하도록 선발되었는데, 후안 마르시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7]치열한 전투 끝에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3,000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 항복 후에 살해되었다. 3만 명이 수감되었다.[8]

아스투리아 반란은 스페인 정치의 전환점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주기적인 반란과는 달리 그것은 스페인에서의 노동자계급 혁명의 가능성을 고려할 만큼 광범하고 잘 조직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교훈을 잘 배웠으나, 대부분의 좌익은 그렇지 못했고, 이 때문에 장래에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36년 2월에 있을 다음 선거에 대비하여 좌익 정당들은 이른바 ‘인민전선’ 명부를 작성했다. 파시즘 및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을 고려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 및 일부 부르주아적 분자들과 동맹을 형성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평화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상인 인민전선 전략은 제7차 코민테른 총회[1935년]에서 개발되었다. 이 강령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의 구성을 시도하고, 때로는 공산당원들의 부르주아 정부 참여를 시도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인민전선은 그리하여 기층민중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계급협조주의적 지도부도 포괄한 동맹이었고, “나쁜” 파쇼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좋은”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을 지원한 동맹이었다. 이 노선은 G. 디미트로프(Dimitroff)에 의해서,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의 그의 모든 면에서 신중한 연설에 의해서 명시되었다. 디미트로프는 루즈벨트의 ‘뉴딜’을 파시즘과 결부시키는 동무들은 연합전선에 대하여 ‘판에 박은 접근’을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를 공격하고 있는, 미국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이 무엇보다도 우선, 미국에서 파시즘 운동을 고무․조직하고 있는 바로 그 세력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진부한 책략의 고질적 옹호자임에 틀림없다.
- G. Dimitroff, United Front Against Fascism, New York, 1937, p. 100.

그러나 스페인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의 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주게 되는 것처럼,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의 차이는 단지 잠정적이고 전술적일 뿐이다. 동일한 자본가들이 어떤 곳 어느 때에는 ‘민주주의’에 의해서, 다른 곳 따른 때에는 파시즘에 의해서 자신들의 지배를 확보하려고 한다. 아래에서 우리는, 스페인 공화국이 원조를 호소했던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의 자본가들이 스페인 공화파를 원조하는 대신에 어떻게 자국의 파시스트들을 도왔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배계급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스페인 공산당원들의 완전히 무익한 노력이 어떻게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는가도 보게 될 것이다. 지원의 최소 조건은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사실상 노동자 지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노동자 지배가 즉각적인 목표임을 부인했다. 이는 대중적 선전을 고려한 노선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당원을 모집하고 당의 기초를 조직한 노선이었다. 그리하여 공화국 정부의 배신과 무능, 패배주의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되었을 때 스페인 공산당은 일부 최악의 배신자들을 정부에서 추방하고자 했고 추방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투쟁을 노동자 정부 수립으로 이끌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파시스트의 발흥

1936년 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은 대승했다. 우익이 단지 134개의 의석을 획득한 데에 반해서 인민전선 측은 278석을 획득한 것이다. 중도파 정당들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카탈로니아의 최대 자본가였던 프란시스코 캄보(Francisco Cambo)도 낙선했다.

선거도 끝나기 전에 또 하나의 우익 쿠데타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번에는 대규모였다. 프랑코는 관리정부의 수상에게 전쟁상태를 선포하고 인민전선의 집권을 저지하라고 촉구했다. 그의 요구는, 그렇게 할 경우 혁명을 촉발한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9]

이렇게 거부되자 프랑코는 산후르호와 몰라(Emilio Mola, 1887. 6. 9.-1937. 6.3.)를 포함한 여러 명의 장군과 함께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이들 두 사람은 1년 내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고, 자연히 프랑코가 파시스트 진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들 음모자들 중에는 불화 중이던 왕당파들인 CEDA가 포함되어 있었고, 따라서 여러 금융업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0] 보도에 의하면 그 쿠데타에 1천5백만 달러를 댔다는[11] 후안 마르시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갔는데, 하지만 그의 특사인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회의 주교를 통해서 음모자들과 계속 접촉을 유지했다.[12] 프란시스코 캄보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자신의 카탈로니아 금융제국에 주요 자산을 예치한 후 스페인을 떠났다.[13] 캄보는 분명 쿠데타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그것을 지원했다.[14] 음모자들은 사전에 독일과 이탈리아에 금속 광석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들의 금융지원을 확약받았다.[15]

스페인의 ‘공식적인’ 파시스트 정당이었던 소규모의 스페인 팔랑헤당(Falange Espanola)은 음모에 참가하여 나바라(Navarre [스페인 북부의 프랑스 접경 지역])의 왕당파들(Carlists)과 함께, 음모자들이 기대할 수 있던 모든 사소한 대중적 지원을 제공했다. 팔랑헤당은 초기에는 후안 마르시와 (부분적으로 제수이트회의 통제 하에 있던) 비스카야(Vizcaya) 은행, 바스크의 여러 산업자본가들, 그리고 부르봉 왕당파들의 지원을 받았다.[16] 반란 이후에는 프랑코의 정당으로 되었다.[17]

음모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다. 7월 13일에 스페인 공산당 소속 의원인 호세 디아즈(Jose Diaz, 1896-1942. 3. 19.)는 의회에서 우익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고,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18] 같은 날 공산당의 여성 대변인인 ‘정열의 여인’(La Pasionaria)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arurri, 1895-1889)는 아스투리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스투리아인들이여! 방심하지 맙시다. 반동세력은 지금도 무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반란을 꾀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입니다. 이제 숨겨논 무기를 찾아 오십시오―그리고 만일에 대비하십시오.
- Landis, p. 136에서 재인용.

여기에 드러난 공산당 활동의 훌륭한 측면은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노동자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리고 전체 전쟁에 있어서도 그들의 전망은 주로 방어적이었다. “가서 음모자들을 죽이고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가 아니라 “그들이 무언가를 한다면, 그들을 쳐부수자”였던 것이다.

7월 16일에 프랑코는 영국의 비행기를 타고 그의 준망명지인 카나라아 군도에서 지중해의 말로르카로 날아갔다. 그 비행기에는 영국의 비밀정보국의 첩보원인 폴라드 대위(Captain Pollard)라는 사람이 그와 함께 동승하고 있었다. 비행 허가서가 없어 비행기가 나포되자 폴라드는 영국 영사로 하여금 중재하도록 하여 방면되었다.[19]

다음날 오후에 모로코에서 파시스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고,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은 정부에게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라고 요구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부는 노동자들을 무장시키지 않았지만, 본토의 많은 반란군 요새들이 경찰과 군부대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노동자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란의 이 최초의 국면이 끝날 무렵에는 스페인 국토의 3분의 2와 인구의 4분의 3이 공화국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파시스트들의 주력군은 외인부대와 모로코에 있는 아프리카 군단(Army of the Africa)의 무어인 정규부대였지만, 그들은 해협을 건너 스페인으로 갈 수 없었는데, 이는 함대의 수병들이 그들의 장교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반란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곤궁에서 프랑코를 구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최초의 대대적인 군사지원을 했는데, 20대의 수송기를 파견하여 아프리카 군단을 스페인으로 실어 나른 것이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독일은 콘도르군단(Condor Legion)이라는 약 6천 명에 이르는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프랑코를 지원했는데, 이 부대는 거대한 양의 물자와 주로 기갑병, 비행기 조종사, 포병 및 고문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랑코를 지원한 이탈리아 군의 최대 규모는 약 10만 명의 병력과 막대한 양의 물자로 이루어져 있었다.[20]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공화국에 무기를 팔기를 거절하면서 시작된 ‘불간섭’ 정책으로 거들었고, 독일 및 이탈리아와 협력하여 해상봉쇄를 수행했다.

1937년 5월에는 미국의 ‘중립법’이 제정되어 스페인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막으려는 국무성의 비공식적 노력들을 보완했다.[21] 개전 초기에 베큠오일(Vacuum Oil)사(社)는 탄저[Tangiers, 지브롤타르 해협의 모로코 항구]에 있는 공화파 선박에 대한 주유 계약을 거부했고, 텍사코(Texaco)사는 공화국으로 갈 휘발유 운반선 5척을 파시스트들에게 넘겼다.[22] 국무성은 멕시코가 스페인 공화국에 비행기를 판매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23] 전쟁 중에 텍사코는 적어도 186만6천 톤의 석유제품을 프랑코에게 제공했다.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스투드베이커(Studebaker)는 총 1만2천 대의 트럭을 프랑코에게 팔았는데, 이는 이탈리아가 1,700대, 독일이 1,800대를 판 것과 비교된다. 공화국에는 기름도 트럭도 판매되지 않았다.[24]

우선 나치 독일로 실어보내고 거기에서 그것을 다시 스페인으로 환적(換積)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회사들은 역시 파시스트들에게 무기도 판매하였다. 듀퐁(Dupont) 소유의 아틀라스화약사(Atlas Powder Company)는 1938년에 6만 개의 공중투하 폭탄을 이런 식으로 독일로 실어 보냈는데, 거기에는 모두 “미지의 목적지로 환적을 위한 것”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25] 공화파 도시들에 투하되고 있는 폭탄들이 모두 미국제라는 것을 1938년 4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그리고는 “그것은 모두 전적으로 합법적이다”라고 말했다.[26]

해군의 ‘불간섭’ 순찰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국은 지브롤타르 해협을 통한 탄약의 공급이나 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에 관한 정보보고들, 기타 다양한 상업상의 거래에 프랑코에 대한 자신의 지원을 한정했다.[27]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는 그 나름으로 ‘불간섭’ 이외의 수많은 방법을 통해서 파시즘에 기여했다. 스페인 공화국에 수량의 낡은 비행기를 판 후에 그들은 무기와 의용군들이 스페인 공화국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국경을 봉쇄했다. 프랑스에서 체포된 의용군들은 투옥되었는데, 그러나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지하조직들의 도움으로 많은 의용군들이 국경을 넘었다. 대량의 쏘련 무기와 코민테른 구매 무기가 프랑스 영토 내에 억류되었다. 카탈로니아가 함락된 후에 공화파 망명자들은 프랑스 지배계급의 최대의 환대를 받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공화국에 대한 쏘련의 원조가 스페인에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마드리드 방어를 위한 탱크 분견대가 겨우 도착한 1936년 10월이었다. 스페인 내의 쏘련 병력수는 한번도 총 700명이 넘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28] 프랑스가 국경을 봉쇄한 후 쏘련의 무기 수송이 제한되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잠수함과 비행기, 그리고 ‘불간섭’ 순찰이라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세계대전을 피하고자 하는 바람―결국은 실현되지 못한 바람― 때문이었다. 프랑코 측의 자료에 의하면, 무기를 운반하고 있다는 이유로 53척의 상선이 침몰되었고, 324척이 나포되었으며, 1,000척이 해상에 억류되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쏘련의 전쟁물자를 운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아무튼 침몰된 것으로 알려진 쏘련 선박 중에는 콤소몰호, 티미리아체프호, 블라고에프호가 포함되어 있었다.[29]

이러한 온갖 종류의 외국의 간섭 때문에 공화파는 한번도 동등한 무기로 싸워본 적이 없으며, 전형적으로 물자와 인력에서 3 대 1, 혹은 4 대1의 열세에 부딪쳤다.[30]

승리를 위한 공산당원들의 조직

히틀러가 제공한 항공기들로 모로코로부터 이송된 아프리카 군단은 경험도 없고 변변치 않게 무장한 인민전선의 민병대들을 밀어 제치면서 중부 스페인의 광야를 지나 빠르게 북부로 진격했다. 하지만 민병대들이 마드리드로 퇴각함에 따라서 저항이 강해졌다. 스페인 공산당은 ‘좌익’ 사회주의 허풍장이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발레로(Francisco Largo Caballero)가 수반으로 있던 공화파 정부에게 도시의 요새화를 조직하도록 촉구했다. 수상 라르고는, “스페인 사람들은 나무 뒤에서 싸울지는 몰라도 결코 참호 속에서는 싸우지 않는다”[31]고 대답했다. 라르고 수상뿐 아니라 전쟁장관 역시 그의 눈부신 무능력을 특정 시간에만 과시했다. 오전 8시 30분에서 9시까지만 서류에 결재를 하겠다는 것이며, 오후 10시 이후에는 연락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32] 11월 6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수도 방위 책임을 방기하고 발렌시아(Balencia)로 옮겨갔다. 공산당원들을 제외한 모든 각료들이, 심지어 전쟁장관의 음반들까지 챙겨서, 라르고 카발레로와 함께 떠나버렸다.[33] 시가전이 한창이던 9일 라르고는 놓고 온 은식기들을 챙겨 오도록 마드리드로 심부름꾼을 보냈지만, “마드리드에 남은 사람들이 아직 식사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34]

라르고는 무능하고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공화파 장군 미아하(Miaja)와 노동조합 및 인민전선 대표들로 구성된 방위협의회(Defense Junta)에 수도 방위를 일임했다. 다행히도, 명목상으로는 미아하의 고문인, 쏘련 장군 고리에프(Goriev)가 옆에 있어서 방위군사계획을 다룰 수 있었다.[35]

수도의 주민을 동원한다는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측면은 스페인 공산당이 주도했다. 반란이 개시되자 정열의 여인(돌로레스 이바루리)의 방송과 연설이 결연한 마드리드 방어를 호소했다. ― “그들을 통과시키지 않겠다!” “마드리드는 파시즘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후 공산당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조직했다. 그들의 저 유명한 제5연대는 6만 명 이상의 의용군(그 절반은 공산당원)을 모집했고, 곧 그것이 인민군의 중추가 되었다. 러시아 내전기의 쏘비에트 적군(赤軍)을 본받아 제5연대에는 부대와 지휘관들의 정치의식을 책임지고 필요한 경우 스스로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정치위원제가 있었다. 곧 유명한 지휘관이 되는 리스터(Lister, 석수)나 모데스토(Modesto, 벌목공), 엘 캄페지노(El Campesino, “촌놈”)를 포함해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제5연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막사와 병참부, 훈련소뿐 아니라 병사의 가족을 돌볼 위원회들이 조직되었다. 규율은 엄했고 모범으로 하나의 특수중대가 조직되었다. 연대의 통제위원은 한 기자에게 이 중대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그것을 ‘강철중대’라고 불렀고 엄중한 자격이 요구되었다. 이 중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기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고, 아주 건강해야 했으며, 단호한 반파쇼주의자라는 보증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중대를 위해서 우리는 철의 단결을 위한 특수한 슬로건들을 만들었다. ‘그가 부상을 입었든 죽었든, 한 사람의 동무도 적의 손에 넘기지 않는다’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만일 나의 동무가 명령 없이 진격하거나 명령 없이 후퇴하면, 나에게는 그를 사살할 권리가 있다’는 슬로건도 있었다. 마드리드는 얼마나 그것을 비웃었던가! 스페인인들은 개인주의자들이라서 아무도 그러한 규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주로 공산당원들과 금속노동자들로 구성된 우리의 첫 번째 강철중대가 시가행진을 벌여, 쎈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후 우리는 제5연대의 정규부대들 외에, 선발된 사람들로 그러한 중대를 28개나 더 조직했다.
- Anna Louise Strong, Spain in Arms, 1937, New York, 1937, pp. 42-3.

스페인 공산당(PCE)과 JSU(사회주의청년연합), PSUC(역시 코민테른에 가입해 있던 ‘카탈로니아 연합사회당’)의 당원과 회원이 전쟁 개시시의 3만 명에서 1936년 말에는 20만 명으로, 1937년 6월에는 1백만 명으로 급증했는데,[36] 이는 부분적으로 공산당원들이 진지하고 효율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했기 때문이었다.

주로 공산당들이 모집한 외국인 의용병들은 공산당원들이 이끄는 국제여단으로 조직되었다. 이 국제여단은 평소 1만7천 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약 4만 명이 거기에 복무했다.[37] 이들 국제여단 역시 제5연대와 마찬가지로 그 규율과 용기로 유명했다. 탤만여단(Thaelmann Brigade)의 독일인 망명자들이 방어했던 테루엘의 고지를 헤밍웨이는, “어느 전쟁의 어떤 진지 못지않게 적에게 많은 타격을 주고야 함락된 진지”[38]라고 묘사했다. 훈련된 병사가 드물었던 전쟁 초기에 국제여단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그들 외국인 의용병들의 국제주의적 행동에 크게 감사했다. 전쟁 후반기에는 많은 스페인인들이 국제여단에 참가했다. 1938년에 외국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개입에 대한 국제연맹의 반대를 이끌어내기 위해 철수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끝났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인민의 군대에도 많은 정예부대가 있었다.

파쇼 부대가 마드리드로 접근함에 따라서 떠나버린 공무원들의 역할을 공산당원들이 담당했다. 라디오와 전단, 깃발을 동원하여 마드리드의 노동자들에게 참호를 파고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도록 독려했다. 노동자 거주지역은 구역별로 조직되었고, 제5연대는 전단을 통해서 대(對)탱크전과 시가전의 요령을 교육했다.[39]

11월 7일 프랑코의 군대가, 쉽게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서쪽과 남서쪽, 그리고 북서쪽에서 마드리드를 공격했으나 결연한 민병대, 특히 제5연대의 치밀한 전투에 의해서 격퇴되었다. 방어군은 8일에 대학도시(University City)를 통해 다시 공격해올 것에 대비했다. 파쇼 군대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노동자 거주지역을 통해서 공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40]

대학에서의 저항은 격렬해서, 노동자들과 파쇼 군대가 서로 다른 층들을 점거한 채 대치하기도 했다. 어떤 곳들에서는 소총이 부족해서 무기를 가진 사람이 총을 맞을 때까지 잠복해 있다가 달려 나가 총을 집어 계속 싸웠다.[41] 오후에는 최근에 편성된 제11 국제여단의 전위대들이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며 그랑비아(Gran Via)를 행군했다. 군중이 의용군인 에드가 앙드레(Edgar Andre) 대대(벨기에)나 돔부로우스키(Dombrowski) 대대(폴란드), 빠리 코뮌(Commune de Paris) 대대(프랑스)에 환호하며, 1934년 아스투리아 봉기 때의 슬로건인 “프롤레타리아 형제들의 단결”을 외쳤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여단이 러시아인들이라고 믿고, “러시아 만세”를 외쳤다.

해질녘이 되자 그토록 필요했던 에드가 앙드레 대대의 기관총들이 대학의 철학관에 거치되고, 다른 여단들도 결정적인 위치들에 배치되었다. 다음날 모로코 부대가 두 번에 걸쳐 톨레도 여단과 프린세스 여단의 민병대 방어선을 뚫고 공격해 왔으나,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42] 저녁에는 국제여단들이 카사드캄포(Casa de Campo)에 있는 모로코 부대를 선제공격하여 거대한 손실을 입히며 밀어냈다.[43]

11월 8일에서 15일 사이에 9개의 민병 부대들이 다른 지역에서 마드리드로 왔다. 그 중에서 아라곤 전선(Aragon Front)에서 온 3천 명으로 이루어진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부대는, 무정부주의적 군대 조직의 실례로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그 부대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가 통솔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른 부대가 자신들의 전과를 가로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한 구역을 독자적으로 담당하겠다고 요구했고, 이 요구는 무정부주의자인 법무장관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44]

이들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포병 및 항공 지원과 함께, 대학 도시의 한 구획이 맡겨졌으나, 공격하기를 거부했다. 다음날 파시스트들이 공격해오자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학 내의 주요 교량과 진지들을 버리고 도주했다. 녹초가 된 민병들과 국제여단의 반격으로 잃었던 땅의 일부를 되찾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어진 전선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두루티는 부하들의 그러한 행동들을 부끄러워하며 그들이 마드리드를 떠나지 않도록 만류하려 했지만, 그들 중 한 사람에 의해 사살되었다.[45]

아라곤과 카탈로니아 -무정부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혁명놀이-

트로츠키주의 POUM(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스페인 공산당(PCE) 탈당자들이 이끄는 두 개의 파벌이 연합하여 1935년 10월에 결성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주로 카탈로니아에 한정되어 있었다. 1937년 5월에 진압될 때까지 POUM은 이베리아무정부주의자연합(FAI) 및 FAI가 이끄는 노총(CNT)의 부속물로서 활동했다. 오로지 “스탈린주의자들”을 공격하겠다는 일념에서[46] POUM은, “혁명에 관한 소망과 전망과 관련하여 유사한 사상을 가진”[47] 무정부주의자들과 연합을 한 것이다.

파시스트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FAI-CNT는 카탈로니아 최강의 정치세력으로서 반파쇼민병대위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쟁 첫 해에, 농촌 지역에서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이 여전히 부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는 이 위원회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48]

무정부주의자의 지도 하에 노동자위원회가 바르셀로나의 공장들을 접수했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때로는 강제적으로, 농업협동조합을 건설했다.[49] 많은 외국인 소유 공장들은 몰수되지 않았는데, 87개의 영국인 기업은 영국 영사관과의 합의 하에 보호되었다.[50]

무정부주의자들에 동조하는 저술가들은, 그들의 산업 실험은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무기산업에서 성공적이었고,[51] 중앙정부로부터의 신용이 없었기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와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카탈로니아에서의 산업상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는 민병대위원회의 무정부주의자 위원이었던 아바드 드 싼티얀이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계획했던 경제기구를 조직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장에서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우리가 통제위원회로서 들어서는 데에 만족했다. 서로 연락해서 적절한 형태로 경제를 조정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일하고 있었다.
- Abad de Santillan, After the Revolution, New York, 1937, p. 122.

아바드 드 싼티얀은 1936년 말에는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1만5천 명 내지 2만 명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임금을 받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52] 사실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산업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게 할 만한 지도력이 개인주의적이고 얼빠진 이베리아무정부주의자 연합원들(FAIists)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의 파시스트들의 반란이 실패한 후 무정부주의자들과 POUM 당원들은 아라곤(Aragon) 전선에서 ‘싸운’ 민병대들을 조직했다. 그들의 군사적 업적은 정말로 놀라웠다. 그들은 아라곤의 수도인 사라고사(Zaragoza)를 향해서 진격해 갔고, 거기에 주둔하면서 이따금 파시스트들과 교전했다. 뉴욕타임즈의 통신원인 허버트 매튜스(Herbert Matthews)는 후에스카(Huesca)에 있는 ‘레닌’ 사단의 POUM 민병대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는 저 아래 벌판에서 파시스트들과 축구를 하곤 했다. 그들은 좋은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사라고사나 하카(Jaca)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도록 초대했고, 우리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 H. L. Matthews, Two Wars and More to Come, New York, 1938, p. 294.

새로 조직된 인민의 군대들이 후에스카를 본격적으로 장악하려고 했을 때에는 카탈로니아 민병대들이 사실상 11개월 동안이나 그곳을 포위한 채 아무 일도 안 한 후였다.[53] 파시스트들은 그러한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축구경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튼튼한 요새를 구축했다.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54] 개전 1년 후 에브로(Ebro) 강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부대를 구조하던 국제 여단들은 파시스트들과의 2킬로미터에 이르는 전선의 어디에서도 요새나 진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55] 그 전 3개월 동안 정확히 2명의 사상자만이 인근 군병원에 수용되었다.[56] 무정부주의적 민병대들은 혼돈을 정치적 원칙으로까지 승격시켰던 것이다. 아라곤에 배포된 한 전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군사적 편제는 무정부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쟁의 승리가 혁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전쟁에서는 인간성의 부정을 전제하는 규율이 아니라 기술과 전략이 중요하다.
- Ibarurri, p. 285에서 재인용.

이 점에서만은, “전쟁은 무정부주의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하는 것이다”[57]라는 두루티의 한탄이 정말로 옳았다. 국제여단들은 농민들이 무정부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공화국 군대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링컨 여단의 한 인민위원은 그가 한 농민에게 밥값을 지불하자 그 농민이 쓸모없는 휴지쪼가리가 아니라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않으려 하는 것도 보았다.[58] 아라곤 농민들의 부루퉁한 태도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지배하지 않는 지역들에서 인민의 군대가 받는 열광적인 지지와 확연히 대비되었다.[59]

파시스트 측에서는 아라곤 전선은 극히 가볍게 장악하고 있었다. 프랑코 측의 한 역사가는 파시스트들이 그 전선에서 군대를 빼내어 마드리드를 공격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60] POUM 당원들이나 그들을 변호하는 자들은, 공산당원들이 아라곤에는 쏘련의 물자를 건네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범죄적으로 행동을 지체시켰던 것은 POUM이나 FAI-CNT 군에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61] 예컨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기층 민병대원들이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격하지 않은 이유를, 대포와 지도가 없었고, 지형이 험했으며, 50명 당 단지 1문의 기관총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62]

50명 당 1문의 기관총이라는 사정까지를 포함해서 똑같이 물질적 조건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이끄는 제35사단은 1938년 7월에 에브로 강을 따라 25킬로미터를 진격하여 4개의 도시를 장악하고 2,500명의 포로를 잡았다.[63] POUM 지도자들의 태도는, 오웰이 인용하고 있는 그의 POUM 사령관 조지 코프(Georges Kopp)의 말, 즉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어쩌다 사람이 죽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오페라일 뿐이다”[64]라는 말에 충분히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역자] 이미 본 것처럼 마드리드 전선에서의 사태는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곤 전선의 물자 부족이란 악의적인 설명―그러나 공산주의자 탄압자들에 의한 것이 아닌 그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이베리아무정부주의자연합원(FAIist)인 아바드 드 싼티얀은 솔직히 털어놨다.

만일 자유론자 (무정부주의자) 조직들의 모든 지도자들이 그들의 모든 무기와 전쟁물자, 최상의 인적자원을 전선으로 보내기로 진지하게 결의했다면, ― 전쟁은 수개월 내에 쉽게 끝났을 것이다. ... 전선 자체에는 3만 정의 소총(그리고 24문의 대포와 200문의 중기관포)을 가지고 있었음에 비해서 후방에는 조직들의 수중에 6만 정의 소총과 대적 지역보다 더 많은 탄약을 가지고 있었음을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다.
- Abad de Santillan, Porque Perdimos la Guerra, Buenos Aires, 1940, pp. 67-8; Landis, p. 321에서 재인용.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들 무기를 전선에 보내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목적은 프랑코를 이긴 후 다른 당파들과 벌일 전투를 위해서였다.[65] 그럴 기회는 전혀오지 않았지만.

사실, 최대의 반역행위를 저지를 기회는 POUM이나 카탈로니아 무정부주의자들에게가 아니라 스페인의 최고위 무정부주의자 장교인 씨프리아노 메라(Cipriano Mera) 사령관에게 왔다. 1939년 카사도(Casado) 장군이, 파시스트에 대한 공화국 정부의 더 이상의 저항을 저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메라가 파시즘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공산당 소속 사령관들이 부대를 이끌고 카사도의 쿠데타 진압에 나선 반면, 메라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카사도를 지원했고, 공산당 군대는 패배했다.[66]

트로츠키주의자들, 무대를 잃다

1936년 말 1937년 초 카탈로니아에서는 생산이 해체되고 인플레이션이 앙등했으며, 전쟁은 진지하게 수행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사정과 공산당(PCE와 PSUC)의 성장이 맞물려 POUM과 FAI은 약화되고 불신을 받았다. 그들의 공상적 이론이 명백히 실패함으로써 무정부주의 운동이 해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36년 9월에 FAI-CNT는 그들의 기괴한 반정치적 원칙들을 굽히고, PSUC 및 카탈로니아 민족주의 정당들과 더불어 카탈로니아 제네랄리탵(wkclwjdqn)에 가입했고, POUM도 한 명의 대표자를 파견했다.[67] 인민전선을 옹호한다고 ‘스탈린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도, POUM은 기꺼이 거기에 참가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그들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궤변적인 변명은, 그들 자신이 소부르주아지에게 협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소부르주아지”가 그들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68]

1937년 3월에 중앙 정부는 각 정당들의 무기를 몰수하도록 명령했다.[69] 바르셀로나에서는 ‘통제불능자들’―FAI에 가입한 흉악범들[70]―에 의한 수많은 길거리 살인을 통제하고 민병대 ‘경찰’을 해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CNT와 POUM은 무기를 넘겨주거나 강제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71] 수적으로 보잘 것 없고, 노동자들 사이에 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으며, “모든 면에서의 완전한 비효율과 무능력”[72]으로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POUM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파산했다. 이제 파시스트들과 싸우는 채 하던 것을 그만두고, POUM은 대신 공산당원들과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1937년 5월 3일, 카탈로니아 경찰국장 로드리게스 쌀라(Rodriguez Sala)와 제네랄리탵의 전화교환국 대표가 정부의 전화통화에 대한 무정부주의자의 간섭에 항의하기 위하여 교환국의 검열국에 갔는데, 전쟁이 시작된 이후 교환국을 장악하고 있던 무정부주의 민병대원들이 위층에서 사격을 가했다. 잠깐 동안 전투가 뒤따랐는데, FAI 지도자가 그것을 중지시켰다. ‘도발’이라는 소문이 CNT 조합원들 사이에 퍼졌고, 시내 전역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CNT 조합원과 PSUC 당원들 사이에 간헐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POUM의 지도자들은 FAI-CNT 지도자들에게 공산당원들을 정부에서 추방하고 카탈로니아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영원히 일소해야 한다고 제안했다.[73] POUM은 단호하게 거절당했다.[74] 단지 ‘두리티의 벗들’로 불리는 소규모 무정부주의자 그룹과 한 무리의 ‘자유의지 청년단’(무정부주의 청년단)의 지지를 업고, POUM은 제네랄리탵을 전복시키고 혁명평의회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무정부주의자 지도자들은 바리케리트 전투의 휴전을 꾀했고, 몇 차례의 실패 끝에 결국 휴전이 이루어졌다. 발렌시아(Valencia)로부터 4천 명의 공격경비대가 도착하여 휴전의 지속을 보장했다. 400명이 죽고, 1천 명이 부상한 것으로 보고되었다.[75]

중앙 정부에서 스페인 공산당은 이들 범죄의 책임을 물어 POUM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라르고 카발레로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당원들조차 더 이상은 라르고의 이러한 결정을 참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라르고는 추방되었고, 사회당원인 후안 네그린(Juan Negrin)이 수상이 되었다. POUM은 진압되어 약 40명의 POUM 당원들이 체포되었다. POUM의 반란 지도자 안드레스 닌(Andres Nin)은 바르셀로나의 주검들에 대한 응보로 쏘련 당국에 의해서 공개 처형되었다.[76]

다른 POUM 당원들은 스파이 행위, 반역, 바르셀로나 전투 선동, 및 바르셀로나 전선에서의 부대철수 명령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POUM 당원들은, 편리하게도 자신들의 신문 『라 바탈라』(La Batalla) 의 기사들조차 ‘망각한 채’, 전투를 도발했다는 혐의를 부인했다.[77] 그들은 후에스카 전선에서 부대들을 떠나도록 명령한 사실조차 부인했는데, 그들의 일부는그들이 탄 버스를 폭격하겠다는 위협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전선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78] POUM의 ‘정치비서’ 훌리안 고르킨(Julian Gorkin)은 『라 바탈라』가, 전선의 여기저기에 뿌려진, 정부를 공격하는 파시스트들의 전단을 실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검사인 돈 호세 고미스 쏠레르(Don Jose Gomis Soler)가 고르킨에게 왜 그 성명서 밑에 그 출처가 파시스트의 전단이라는 사실은 가장 작은 활자로 표시했느냐고 묻자 고르킨은 비웃듯이 말했다.

그것은 단지 인쇄기술상의 문제일 뿐이오.
- The Daily Worker(1938. 10. 12.) 안의 E. Rolfe의 글.

기소된 사람들은 스파이 혐의나 반역 혐의는 무죄였지만,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다른 혐의는 모두 유죄임이 판명되어 각각 여러 기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POUM 지도자들은 프랑코의 첩자들?

스페인 공산당은 POUM의 지도자들이 프랑코한테서 보수를 받고 있다고 비난했고, 위에서 보고된 몇몇 사건들은 왜 그러한 비난이 스페인 공화국에서 그럴듯하게 들렸고 널리 믿어졌는가를 보여준다.[79] 간단히 말해서 POUM은, 그들이 요구하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돈을 받아썼다. 그 전투가 시작된 지 닷새 후인 5월 11일에, 프랑코 측에 파견한 히틀러의대사 파우펠(Faupel)은 이렇게 쓰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혼란과 관련하여 프랑코는 자신의 첩자들이 시가전을 도발한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니콜라스 프랑코는 바르셀로나에 총 13명의 첩자가 있다며, 이 보고서를 확인해주었다. 얼마 전에 그들 첩자 중의 한 사람은, 바르셀로나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당원들 사이에 긴장이 심해서 결국은 시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총통은, 처음에는 이 첩자의 보고를 의심했으나 나중에 다른 첩자들에 의해 그것이 확인되었다고 내게 말했다. 대개는 카탈로니아에서의 군사작전이 수립될 때까지 그는 그 가능성을 이용

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빨갱이들이 에우스카디(Euzcadi) 정부(바스크 주)를 지원하기 위해 테루엘(Teruel)을 공격한 이후 바르셀로나에 혼란을 일으킬 적기(適期)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첩자는 명령을 받은 지 수일 만에, 다른 첩자 서너 명과 함께 시가전을 도발하는 데에 성공했고, 결국 바라던 결과를 얻어냈다.

- Ibarurri, p. 282에서 재인용.

5월의 그 전투 후에 곧 많은 프랑코 첩자들이 바르셀로나에서 체포되었고, 닌(Nin)도 연루되었다―아마 그들 나름의 이유 때문에[80]

카탈로니아의 일부 무정부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바드 드 싼티얀은 파쇼 스페인 팔랑헤당의 창건자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드 리베라(Jose Antonio Primo de Rivera)를 이렇게 찬양했다.

우리를 가르고 있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호세 안토니오와의 이러한 ‘정신적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는 결국 자기 나라의 문제의 해결을 추구한 전사(戰士)요 애국자였다. ... 그처럼 고매란 스페인인, 애국자들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적이 아니다. 스페인의 운명을 바꾸는 데에는, 1936년 7월 이전에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그의 부친인 프리모 드 리베라(Primo de Rivera, 왕정 하에서의 스페인의 독재자)가 바라는 대로 했더라면, 어떤 합의가 전술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Abad de Santillan, Porque Perdimos la Guerra. Landis, p. 312에서 재인용.

바로 이들이, 공산당원들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사이비 좌익들이 명사(名士)로 치켜세우는 정치적 타락자들이다.

공산당원들의 오류, 인종주의

전쟁 내내 프랑코는 스페인령 (그리고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모집하고 징집한 부대에 의존했다. 아마 10만 명 정도의 무어인들이 파시스트들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다.[81] 파시스트들은 무어인들에게 온갖 종류의 잔학행위를 고무하여 공화파의 인종주의를 유발하는 데에 크게 성공했다. 파시스트 장군 퀴에포 드라노(Quiepo de Llano)는 무어인 군대가 마드리드를 장악할 경우 저지를 약탈을 방송을 통해 구역질나게 묘사했다.[82] 공화파의 선전들은 이러한 인종주의적 쓰레기를 반복하고 윤색해댔다. 마드리드의 포스터들은 무어인들을 “두터운 입술에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무거운 터번을 쓰고, 무방비한 백인 여성들을 공격하거나 백인 어린애들을 총검으로 찌르는 사람들”[83]로 묘사했다.

공화국의 외무장관 알바레스 델 바요(Alvarez del Vayo)는 무어인의 특징은 “어떤 민주주의적 성격의 정치적 선전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84]이라고 말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1910년대와 20년대를 통해서 장기간의 독립전쟁을 벌여온 모로코 북부 산악지대 주민대표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대가로 프랑코에 맞서 싸움을 조직하겠다고 제안했다. 공화국 정부는, 아프리카의 인접 한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프랑스의 반발을 염려하고, 다른 자본주의 열강과의 협상에서 모로코를 이용할 속셈에서 그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카탈로니아의 한 공산당 대표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로코인들의 요구를 지지했지만, 성과가 없었다.[85] 스페인 공산당은, 원칙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프랑코와의 전쟁에서 강력하고 믿음직스러운 동맹군을 획득할 수 있었을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공개적 투쟁도 전개하지 않았다. 스페인 공산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인종주의와 투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것을 조장했다! ‘정열의 여인’은 파시스트들이 애국심이 없이 무어인들로 하여금 스페인 여성들을 강간하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추잡한 라디오 세빌랴(Radio Seville) 방송을 반복했다.

‘좋은 시간’을 약속한다는 꾀임을 받고 아프리카의 촌에서 온 외인부대원들이나 용병들, 무어인들에게 강간당하고 있는 시골 처녀들이야말로 파시스트 살인자들의 이러한 ‘애국심’을 입증하고 있다.
- D. Ibarurri, Speeches and Articles, 1936-1938, New York, 1938, p. 130.

스페인 공산당의 인종주의 조장은 모로코(와 스페인 본토)에서 전투적인 동맹군들을 얻을 기회를 잃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전선의 모든 종류의 취약성과 전략적 실패를 조장했다. 스페인령 모로코의 독립이 인접한 프랑스 식민지들의 독립투쟁을 점화시킬 것이라는 프랑스 자본가들의 염려는 맞는 것이었다. 사태가 그렇게 전개되었다면 스페인 공화국에게는 대성공이어서 프랑코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인종주의에 대한 단호한 투쟁은 공화국 내의 많은 민족주의적 분파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들 분파들 때문에 크게 약화됐고, 카탈로니아에서는 무정부주의가 지배했으며, 결국은 전쟁에 패했다.

인종주의와 자본주의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대한 계급적 이해(理解)가 발전하면 공산주의 운동으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파시즘과 자본주의적 지배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노선을 포기하게 할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주의 하에서의 인종주의의 역할을 이해하게 되면, 노동자 권력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권력을 위한 투쟁도 가능하게 된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조직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전략은 가장 억압당하고 있는―그리고 가장 전투적인―근로인민과 단결하고 그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장기간의 식민지 전쟁을 통해서 무어인들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임을 입증해왔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인종주의와 투쟁했더라면, 외국의 의용병들이 귀국했을 때 그 나라들에서도 보다 훌륭한 노선이 발전하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국제여단들은 지배적인 인종주의적 분위기를 흡수하고 그것과 더불어 귀국했다. 영국의 의용병들은 실제로 무어인들을 ‘검둥이들’이라고 불렀다.

게릴라전

스페인 공화국은, 한편에서는 인종주의 때문에 무어인들이 프랑코의 후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돕는 데에 실패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장악한 스페인에서 유격전을 발전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1936년 12월에 (누구보다도) 스탈린은 라르고 카발레로에게 유격병들 조직하라고 촉구했으나,[86] 그 정책은 훈련된 간부와 무기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87] 외국 자본가들의 원조를 기다리기보다는 스페인과 모로코의 노동자와 농민들에 의존해서 그 전쟁을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페인 공산당이 이해 했더라면, 파시스트 지배 지역에서 게릴라들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명백했을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페인에서는 게릴라들이 성공적으로 활동해 왔고, 프랑코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에는 수 많은 좌익 동조자들이 있었다. 전선 너머 프랑코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은 심각했다. 1938년 5월에 프랑코는 자신이 통제하고 있던 지역 주민의 40%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8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에서 게릴라 작전은 주로 쏘련이 조직한 특공대와 첩보작전에 한정됐고, 스페인의 인민전쟁을 확대하고 승리할 커다란 기회를 상실했다.

사회주의 - 승리로의 유일한 길-

앞에서 지적한 점들도 중요하지만, 내전에서 승리의 관건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 먼 장래의 막연한 목표로서가 아니라 당장 실행해야 할 강령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이었다.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스페인 공산당(PCE)과 카탈로니아 연합사회당(PSUC)야말로 파시즘에 대항한 전쟁의 실질적 조직자였고, 부르주아 지배의 은폐물인 “새로운 형태의 의회민주주의적 공화국”[89] 대신에 노동자의 독재를 중심으로 보다 완전하게 노동계급을 단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자본가들의 대리인들의 수중에 내맡겨두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들이 바로 프랑코와의 싸움을 훼방했다. ‘사회주의자’ 라르고 카발레로는 단지 무능력하고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물만이 아니었다. 그는 공산당원들과 쏘련의 항공기를 배제하기 위하여 영국인들이나 프랑스인들과 협상하기도 했다.[90] 그의 후임 전쟁장관인 ‘사회주의자’ 인 달레시오 프리에토(Indalecio Prieto)는 누구에게나 공화국은 패할 수밖에 없다고 떠들고 다녔고, 1938년 3월 파시스트들이 공화국을 마구 반토막내는 것을 막기 위한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91] 스페인 공산당은 권력을 장악하는 대신에 단지 바르셀로나에서 거대한 시위를 조직하여 프리에토의 추방을 요구했을 뿐이다(그는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힌 후에 그러한 범죄자들을 정부에서 숙정하는 것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패배를 잠깐 동안 피하기 위한 수세적 전략일 뿐이다.

그에 비해서 1917년의 볼쉐비키들은 오직 노동자들의 지배만이 노동자계급에게 필요한 것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부에서 사회민주당원임을 스스로 드러냈으며―스스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러한 혁명적 정책 대신에, 스페인 공산당이 지지한 스페인 공화국이 군사적 공세를 취한 것은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적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강제하기 위해서였다. 민족해방전선의 테트 공세[92]와 마찬가지로 1938년 7월의 에브로 공세는 적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킬 현실적인 기회는 없었다. 테트 공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적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공화국은, 공화국이 아직도 고려할 만한 반파쇼 세력임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파시스트 국가들 사이에 발전하고 있던 모순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93] 그리하여 인민전선 전략의 주요 요소는 프랑코를 지지하고 있던 바로 그 자본가들에게 의지하는 것이었고, 그 전략은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인종주의, 살인, 착취라면 모를까 다른 데는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일한 대안은 노동자들을 신뢰하는 것이었고, 이는 노동자 권력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들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스페인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데, 왜냐하면, ―전쟁 중에 죽은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공화국이 무너진 후에 40만 명이 도륙되었기 때문이다.[94]

이른바 ‘민주국가들’이 러시아의 노동자 권력을 쓸어버리도록 열심히 히틀러를 부추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전쟁에서 쏘련 역시 제국주의자들 간의 모순을 이용하려는 정책을 폈다. 1930년대에 쏘련 정부는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하여 거의 모든 유럽 열강을 망라하여, 마침내는 히틀러 자신과 협약을 맺으면서까지 동맹을 만들어내려 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이 결국 그들 간의 적대를 극복하고 반쏘 동맹을 맺을 수는 없었지만, 쏘련의 노동자들은 사실상 단독으로 나치를 쳐부수지 않으면 안 되었다.[95]

그리하여, 스페인의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더 커다란 전쟁의 명백한 교훈은 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의 동맹에서 얻을 것은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으면 안 되고, 인종주의와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며, 노동자의 권력이나 사회주의가 아닌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러한 교훈을 배워서 실천에 옮긴다면, 스페인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은, 비록 지금은 패배했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최후의 승리에 기여할 것이며, 저 아스투리아의 슬로건, “프롤레타리아 형제들이여 단결하라!”를 실천하게 될 것이다.

각주

  1. Progressive Labor Party로 미국의 노동자정치 조직중 하나다.
  2. Frank Jellinek, The Civil War in Spain, London, 1938, 제1, 2, 4장.
  3. Hugh Thomas, The Spanish Civil War, New York, 1961, p. 19.; (1931년 4월 1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공화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국왕 올폰소 13세가 프랑스로 망명했다.―역자)
  4. 같은 책, 제3, 4, 5, 6, 7장.
  5. 같은 책, 제 7, 8장.
  6. [역주] 스페인 노동운동에는 맑스주의가 소개되기에 앞서 바쿠닌 파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먼저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적-쌩디칼리스트적 경향이 강했다.
  7. Arthur Landis, Spain! The Unfinished Revolution, Baldwin Park, Cal., 1972, p.58.
  8. Thomas, pp. 80-5.
  9. Thomas, p. 96.
  10. 같은 책, p. 96.
  11. G. Jackson, The Spanish Republic and Civil War, 1931-1939, Princeton, 1965, p. 417.
  12. Jellinek, p. 285.
  13. 같은 책, p. 75.
  14. Richard Robinson, The Origins of Franco's Spain, Pittsburg, 1970, p. 291.
  15. Jellinek, p. 279.
  16. Stanley Payne, Falange, Stanford, 1961, p. 45.
  17. Jackson, pp. 356-58.
  18. D. Ibarurri, They Shall Not Pass, New York, 1966, p. 185.
  19. 같은 책, p. 105.
  20. Jacson, p. 333.
  21. Landis, p. 205.
  22. 같은 곳.
  23. 같은 책, p. 207.
  24. 같은 책, p. 208.
  25. 같은 곳.
  26. 같은 곳.
  27. German Charge d'Affairs in Fascist Spain, 같은 책, p. 239에서 재인용.
  28. Stanley Payne, The Spanish Revolution, New York, 1970, p. 324.
  29. Landis, p. 243.
  30. Arthur Landis, The Abraham Lincoln Brigade, New York, 1967. 이하에서는 ‘Landis, ALB'로 표기한다.
  31. Landis, p. 246.
  32. 같은 책, p. 247.
  33. Thomas, p. 319.
  34. Landis, p. 269에서 재인용.
  35. Burnett Bolloten, The Grand Camouflage, New York, 1961, p. 239.
  36. P. Broue & Temime, The Revolution and the Civil War in Spain, Cambridge, Mass., 1970, p. 229.
  37. Landis, p. 252.
  38. Landis ALB, p. 376에서 재인용.
  39. Landis, p. 262.
  40. 같은 책, p. 259에서 재인용.
  41. 같은 책, p. 267.
  42. 같은 책, pp. 268-69.
  43. 같은 책, p. 370.
  44. 같은 책, p. 273.
  45. 같은 책, pp. 275-76.
  46. The Spanish Revolution (POUM의 영문판 신문), 1937. 2. 3.
  47. 같은 신문, 1937. 3. 31.
  48. Broue and Temime, pp. 130-33; Thomas, pp. 187-92.
  49. Landis, p. 324에서 재인용. 본래의 출처는 공화국 정부의 무정부주의자 장관인 J. Perto이다.
  50. Payne, p. 246.
  51. G. Brennan, The Spanish Labyrinth, Cambridge, U.K., 1943, p. 321.
  52. 같은 책, p. 134.
  53. 같은 곳; Thomas, p. 443.
  54. Matthews, p. 295.
  55. Landis ALB, pp. 252-56.
  56. 같은 곳.
  57. Landis, p. 323에서 재인용.
  58. Steve Nelson, The Volunteers, New York, 1953, p. 175.
  59. 같은 곳.
  60. M. Anzar, Historia Militar de la Guenrra de Espania (1930-1939), Madrid, 1958; Landis, p. 320에서 재인용.
  61. The Spanish Revolution, 1937. 2. 17.
  62. G. Orwell, Homage to Catalonia, New York, 1952, pp. 32-5.
  63. Landis, p. 331; 이 전투에 관해서는 Landos ALB, p. 517 이하에 기술되어 있다.
  64. Orwell, p. 32.
  65. 같은 곳.
  66. Thomas, pp. 586-603.
  67. Landis, p. 337.
  68. The Spanish Revolution, 1936, 11. 4.
  69. Payne, p. 294.
  70. 같은 곳.
  71. 같은 곳.
  72. F. Borkenau. Landis, p. 320에서 재인용.
  73. Julian Gorkin (POUM 지도자), Nota sobre las Jornadas de Mayo de 1937, 후버연구소의 미출판 석사논문; Payne, p. 297에서 재인용.
  74. 같은 곳.
  75. 같은 곳.
  76. 같은 책, pp, 452-55.
  77. “The Treason Trial of the POUM”(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반역 재판), World News and Views, vol. 18 (1938), #50, pp. 1143-44.
  78. Ibarurri, p. 286.
  79. Claude Bowers (스페인 공화국 주재 미국 대사), My Mission to Spain, New York, 1954, p. 356.
  80. Thomas, pp. 454 이하. The Communist International, Vol. 16 (1939), p. 165 이하에 관련 문서가 재수록 되어 있다.
  81. Barton Whaley, Guerrillas in the Spanish Civil War, Detroit, 1969, p. 40.
  82. Thomas, p. 181.
  83. Whaley, p. 42.
  84. 같은 책, p. 39에서 재인용.
  85. Whaley, 이곳저곳; Payne, pp. 270-72.
  86. 같은 책, p. 15.
  87. 같은 책, p. 13.
  88. Jackson, p. 429.
  89. D. Ibarurri, “The Time Has Come to Create a Single Party of the Proletariat in Spain”, Communist International, Vol. 14 (1937), #9, p. 651.
  90. Payne, pp. 270-72.
  91. Landis, p. 372; Landis ALB, p. 401 이하
  92. [역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1968년 1월 30일에 벌인 구정(舊正) 대공세(테트는 월남어로 구정). 이 테트 공세를 수행하면서 민족해방전선 쪽도 커다란 전력 손실을 입었지만, 이를 계기로 미국은 월남전 수행의 한계를 느끼고 협상으로 정책을 변경하기에 이른다.
  93. Jackson, p. 454.
  94. Landis, p. 405. 처형은 1944년 현재에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같은 곳).
  95. 제2차 세계대전의 군사적 정치적 전환점이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적군 (赤軍)은 노르망디 전투의 2배 반(半)인 113개의 파쇼 사단을 괴멸시켰다(예컨대, G. Deborin, Secrets of the Second World War, Moscow, 1971, pp. 100, 163을 보라). 쏘련의 노동자들이 독일군을 괴멸시키기 위해서 거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는 동안 자본주의 ‘연합군들’은,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에서 선전을 위한 소규모 작전이나 하며 빈들거리면서 제2전선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승리가 있은 지 1년 반 후에 마침내 노르망디에서 제2의 전선이 시작되었을 때, 그 주요 동기의 하나는 단지 유럽에서 (쏘련군의 지원 하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 그러한 혁명이 일어날 경우 제국주의자들은 유럽에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미군 사령관이었던 오마르 브랜들리(Omar Brandley)는 전후(戰後)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부분적으로 솔직하게 표현했다.
    대륙에서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병력을 동원하여 해협을건너고, 독일로 진격해 그 군대를 무장해제 시키고, 그 국가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 Deborin, p. 161에서 재인용

    최종적으로 계산해보면, 적군이 507개의 독일군 사단과 100개의 그 동맹군 사단들을 괴멸시켰음에 비해서 다른 모든 전선에서는 [즉 자본주의 연합군은: 역자] 176개의 사단을 괴멸시켰다. 쏘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은, 적군이 사용한 소총의 단지 1.9%와 항공기의 8.3%, 탱크의 10.5%에 약간의 식품과 트럭이었는데, 게다가 무기의 상당 부분은 대단히 열악한 품질의 것이었다(Deborin, pp. 130-33, A. Werth, Russia at War, 1941-1945, New York, 1964, pp. 575-7).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위해서는 어떤 의미 있는 원조도 적기에 쏘련에 도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