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의 교훈

좌파도서관
제목: 스페인 내전(1936-39년)의 교훈
부제: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저자: 진보노동당[1]
주제: 스페인 내전
발표시기: 1974년
출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스페인 내전(1936-39년)의 교훈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저자: 진보노동당[1] /번역: 편집부


편집자의 주
이 글은 "Lessons of People's War in Spain 1936-1939" (Progressive Labor. Vol. 9. No. 5 Oct.-Nov. 1974), pp.106-116)의 번역이다. 이 글은 스페인 내전기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동안 스페인 내전에 대해 한국에 번역·소개된 것들(책, 영화 등)이 대개 트로츠키주의자들 혹은 우익들의 악선동이었음에 반해, 이 글은 스페인 내전기 공산당의 활동상을 정확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글이다. 다만, '인민전선'을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역사적으로 다소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어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오류는 PLP의 다른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이 선전주의 혹은 최대강령주의에 일정하게 경도되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인민전선'에 관련한 보다 깊은 논의는 다름을 참조하라: 문영찬 "통일전선 전술의 현재적 의미", <<노동사회과학>> 제2호, 2009.6.). 이 점만 주의해서 읽는다면, 이 글은 스페인 내전에 관한 진실을 접근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들어가며

스페인 내전은 유럽에서의 제2차 대전의 서막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파시즘에 대한, 그리고 구(舊) 공산주의 운동이 극복하지 못했던 계급협조주의적 정책들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실험장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에 뒤이은 제2차 대전과 달랐다. 스페인에서는 주요한 자본가 세력들이―상호 간의 모순에도 불구하고―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위협, 1934년의 아스투리아 봉기로 현실화된 위협에 대항하여 단결했던 것이다.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민주국가들’로부터 적극적 혹은 ‘중립적’ 지원을 받으며 쏘련을 공격하고 있던 히틀러의 독일과, 제국주의자들이 원했던 것과 같이, 전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제국주의자들은 서로 싸웠고, 쏘련의 노동자들은 사실상 자력으로 히틀러를 분쇄하지않으면 안 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역사는, 스페인 공산당원들이나 코민테른, 스탈린을 헐뜯으려는 온갖 종류의 공산주의 탄압자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선점되어 왔다. 반공적 저술가들은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거의 10월 혁명에 대해서만큼이나 많은 거짓말을 양산해왔다. 이 글은, 이러한 거대한 쓰레기 더미 밑에 묻혀온, 노동자 계급을 위한 스페인 내전의 교훈의 일부를 발굴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내전의 연구는 많은 점에서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실천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서 스페인 공산당(PCE)과 코민테른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정치적 군사적 리더쉽을 발휘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스페인 공산당은, 오웰(Orwell)에서부터 촘스키(Chomsky)까지의 반공적 저술가들에 의해 사랑 받는 모든 ‘좌익’ 비겁자 집단들과 달리, 거대한 물질적 곤란들과 자신들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수십만의 근로인민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조직할 수 있었다.

스페인 공산당의 오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진보노동당(PLP) 노선의 다음과 같은 주요 요점들을 입증해주고 있다.

(1)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을 방기할 때 패배한다 (2) 파시즘과의 투쟁은노동자의 승리에 결정적이다 (3) 민족주의나 자본가들과의 동맹은 재앙이다 (4) 다양한 사이비 좌익 집단들―무정부주의자들(Anarchists) 및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단결’은 자본가들과의 ‘단결’ 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스페인 공화국

스페인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농업적이고 공업의 주요 부분이 외국의 자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2류의(minor) 자본주의 국가이다. 1930년대에는 공업이 아스투리아와 바스크(Basque) 주의 북부 해안을 따라서(주로 광업), 그리고 동부 해안의 카탈로니아(Catalonia)에(경공업) 집중되어 있었다. 영국인이나 프랑스인, 벨기에인, 캐나다인, 미국인 자본가들이 주요한 외국인 소유자들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대토지소유자였고, 제수이트회(Jesuits)는 주요 은행들과 철도, 광산, 공장들을 소유 혹은 통제하고 있었다.[2]

스페인 공화국은 1931년에 국왕 알폰소 13세(Alfonso XIII)가 “(그의) 국왕대권의 사용을 보류”하기로 결정하고 나라를 떠남으로써 수립되었다.[3] 모로코 북부 산악지대주민들과의 (8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든) 여러 해에 걸친 식민지 전쟁으로 약화되고 평판이 나빠져서, 그리고 세계대공황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왕정은 더 이상 유효한 부르주아 지배형태일 수 없었고, 처음에는 부르주아 공화정에 의해서 그리고 다음에는 파시즘에 의해서 대체되었던 것이다.

공화국은 (양성의) 보통선거권을 확립했고, 충분치 못한 토지개혁을 선포했으며, 공공교육을 확대하고, 군과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축소했다. 카탈로니아주와 바스크 주에는 제한적인 독립성이 부여되었고, 바르셀로나의 지방자치 정부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으로 불리는 카탈로니아 정부로 재편되었다.[4]

1932년에 산후르호(Jose Sanjurjo, 1872. 3. 28.-1936. 7. 20.) 장군이 소집단의 왕정주의자들, 지주들, 성직자들 및 군 장교들을 이끌고 공화정에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지배계급 주요 세력들의 지지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하지만, 1933년 11월의 선거에서는 우익 세력들이 사실상 승리했다. 의회(Cortes)의 최대 다수당은 우익 가톨릭 정당인 CEDA였지만, 최초의 정부는 중도 정당들과의 연립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정부는 이전의 개혁의 다수를 중단하거나 역전시켰고 산후르호를 사면했다.[5]

1934년 10월 CEDA 출신의 각료[3인: 역자]가 포함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자 노총(UGT, Union General de Trabajadores)의 사회당원들과 공산당원들은 이를 파시즘의 개시로 간주, 마드리드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UGT의 지도부는지하로 잠입했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끌던 거대 노총인 CNT(Confederacion Nacional del Trabajo)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파업은 단명으로 끝났다.[6] 카탈로니아에서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 자치정부)이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다시 이에 참가하지 않았고, 반란은 단명했다.

그런데 아스투리아 지방에서는 사회주의적 광부들과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광부들이 협력,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켜 쏘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정부는 외인부대와 고데드(Goded) 장군 및 프랑코(Franco) 장군이 지휘하는 무어인(Moorish) 정규군을 불러들였다. 모로코 전쟁에서 군단을 지휘하여 명성을 얻은 프랑코는 백만장자인 후안 마르시(Juan March)에 의해 이 진압 작전을 지휘하도록 선발되었는데, 후안 마르시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7]치열한 전투 끝에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3,000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 항복 후에 살해되었다. 3만 명이 수감되었다.[8]

아스투리아 반란은 스페인 정치의 전환점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주기적인 반란과는 달리 그것은 스페인에서의 노동자계급 혁명의 가능성을 고려할 만큼 광범하고 잘 조직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교훈을 잘 배웠으나, 대부분의 좌익은 그렇지 못했고, 이 때문에 장래에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1936년 2월에 있을 다음 선거에 대비하여 좌익 정당들은 이른바 ‘인민전선’ 명부를 작성했다. 파시즘 및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을 고려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 및 일부 부르주아적 분자들과 동맹을 형성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평화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상인 인민전선 전략은 제7차 코민테른 총회[1935년]에서 개발되었다. 이 강령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의 구성을 시도하고, 때로는 공산당원들의 부르주아 정부 참여를 시도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인민전선은 그리하여 기층민중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계급협조주의적 지도부도 포괄한 동맹이었고, “나쁜” 파쇼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좋은”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을 지원한 동맹이었다. 이 노선은 G. 디미트로프(Dimitroff)에 의해서,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의 그의 모든 면에서 신중한 연설에 의해서 명시되었다. 디미트로프는 루즈벨트의 ‘뉴딜’을 파시즘과 결부시키는 동무들은 연합전선에 대하여 ‘판에 박은 접근’을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를 공격하고 있는, 미국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이 무엇보다도 우선, 미국에서 파시즘 운동을 고무․조직하고 있는 바로 그 세력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진부한 책략의 고질적 옹호자임에 틀림없다.
- G. Dimitroff, United Front Against Fascism, New York, 1937, p. 100.

그러나 스페인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의 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주게 되는 것처럼,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의 차이는 단지 잠정적이고 전술적일 뿐이다. 동일한 자본가들이 어떤 곳 어느 때에는 ‘민주주의’에 의해서, 다른 곳 따른 때에는 파시즘에 의해서 자신들의 지배를 확보하려고 한다. 아래에서 우리는, 스페인 공화국이 원조를 호소했던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의 자본가들이 스페인 공화파를 원조하는 대신에 어떻게 자국의 파시스트들을 도왔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배계급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스페인 공산당원들의 완전히 무익한 노력이 어떻게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는가도 보게 될 것이다. 지원의 최소 조건은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사실상 노동자 지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노동자 지배가 즉각적인 목표임을 부인했다. 이는 대중적 선전을 고려한 노선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당원을 모집하고 당의 기초를 조직한 노선이었다. 그리하여 공화국 정부의 배신과 무능, 패배주의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되었을 때 스페인 공산당은 일부 최악의 배신자들을 정부에서 추방하고자 했고 추방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투쟁을 노동자 정부 수립으로 이끌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파시스트의 발흥

1936년 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은 대승했다. 우익이 단지 134개의 의석을 획득한 데에 반해서 인민전선 측은 278석을 획득한 것이다. 중도파 정당들은 실질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카탈로니아의 최대 자본가였던 프란시스코 캄보(Francisco Cambo)도 낙선했다.

선거도 끝나기 전에 또 하나의 우익 쿠데타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번에는 대규모였다. 프랑코는 관리정부의 수상에게 전쟁상태를 선포하고 인민전선의 집권을 저지하라고 촉구했다. 그의 요구는, 그렇게 할 경우 혁명을 촉발한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9]

이렇게 거부되자 프랑코는 산후르호와 몰라(Emilio Mola, 1887. 6. 9.-1937. 6.3.)를 포함한 여러 명의 장군과 함께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이들 두 사람은 1년 내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고, 자연히 프랑코가 파시스트 진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들 음모자들 중에는 불화 중이던 왕당파들인 CEDA가 포함되어 있었고, 따라서 여러 금융업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0] 보도에 의하면 그 쿠데타에 1천5백만 달러를 댔다는[11] 후안 마르시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갔는데, 하지만 그의 특사인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회의 주교를 통해서 음모자들과 계속 접촉을 유지했다.[12] 프란시스코 캄보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자신의 카탈로니아 금융제국에 주요 자산을 예치한 후 스페인을 떠났다.[13] 캄보는 분명 쿠데타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그것을 지원했다.[14] 음모자들은 사전에 독일과 이탈리아에 금속 광석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들의 금융지원을 확약받았다.[15]

스페인의 ‘공식적인’ 파시스트 정당이었던 소규모의 스페인 팔랑헤당(Falange Espanola)은 음모에 참가하여 나바라(Navarre [스페인 북부의 프랑스 접경 지역])의 왕당파들(Carlists)과 함께, 음모자들이 기대할 수 있던 모든 사소한 대중적 지원을 제공했다. 팔랑헤당은 초기에는 후안 마르시와 (부분적으로 제수이트회의 통제 하에 있던) 비스카야(Vizcaya) 은행, 바스크의 여러 산업자본가들, 그리고 부르봉 왕당파들의 지원을 받았다.[16] 반란 이후에는 프랑코의 정당으로 되었다.[17]

음모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다. 7월 13일에 스페인 공산당 소속 의원인 호세 디아즈(Jose Diaz, 1896-1942. 3. 19.)는 의회에서 우익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고,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18] 같은 날 공산당의 여성 대변인인 ‘정열의 여인’(La Pasionaria)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arurri, 1895-1889)는 아스투리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스투리아인들이여! 방심하지 맙시다. 반동세력은 지금도 무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반란을 꾀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입니다. 이제 숨겨논 무기를 찾아 오십시오―그리고 만일에 대비하십시오.
- Landis, p. 136에서 재인용.

여기에 드러난 공산당 활동의 훌륭한 측면은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노동자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리고 전체 전쟁에 있어서도 그들의 전망은 주로 방어적이었다. “가서 음모자들을 죽이고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가 아니라 “그들이 무언가를 한다면, 그들을 쳐부수자”였던 것이다.

7월 16일에 프랑코는 영국의 비행기를 타고 그의 준망명지인 카나라아 군도에서 지중해의 말로르카로 날아갔다. 그 비행기에는 영국의 비밀정보국의 첩보원인 폴라드 대위(Captain Pollard)라는 사람이 그와 함께 동승하고 있었다. 비행 허가서가 없어 비행기가 나포되자 폴라드는 영국 영사로 하여금 중재하도록 하여 방면되었다.[19]

다음날 오후에 모로코에서 파시스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고,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은 정부에게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라고 요구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부는 노동자들을 무장시키지 않았지만, 본토의 많은 반란군 요새들이 경찰과 군부대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노동자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란의 이 최초의 국면이 끝날 무렵에는 스페인 국토의 3분의 2와 인구의 4분의 3이 공화국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파시스트들의 주력군은 외인부대와 모로코에 있는 아프리카 군단(Army of the Africa)의 무어인 정규부대였지만, 그들은 해협을 건너 스페인으로 갈 수 없었는데, 이는 함대의 수병들이 그들의 장교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반란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곤궁에서 프랑코를 구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최초의 대대적인 군사지원을 했는데, 20대의 수송기를 파견하여 아프리카 군단을 스페인으로 실어 나른 것이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독일은 콘도르군단(Condor Legion)이라는 약 6천 명에 이르는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프랑코를 지원했는데, 이 부대는 거대한 양의 물자와 주로 기갑병, 비행기 조종사, 포병 및 고문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랑코를 지원한 이탈리아 군의 최대 규모는 약 10만 명의 병력과 막대한 양의 물자로 이루어져 있었다.[20]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공화국에 무기를 팔기를 거절하면서 시작된 ‘불간섭’ 정책으로 거들었고, 독일 및 이탈리아와 협력하여 해상봉쇄를 수행했다.

1937년 5월에는 미국의 ‘중립법’이 제정되어 스페인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막으려는 국무성의 비공식적 노력들을 보완했다.[21] 개전 초기에 베큠오일(Vacuum Oil)사(社)는 탄저[Tangiers, 지브롤타르 해협의 모로코 항구]에 있는 공화파 선박에 대한 주유 계약을 거부했고, 텍사코(Texaco)사는 공화국으로 갈 휘발유 운반선 5척을 파시스트들에게 넘겼다.[22] 국무성은 멕시코가 스페인 공화국에 비행기를 판매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23] 전쟁 중에 텍사코는 적어도 186만6천 톤의 석유제품을 프랑코에게 제공했다.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스투드베이커(Studebaker)는 총 1만2천 대의 트럭을 프랑코에게 팔았는데, 이는 이탈리아가 1,700대, 독일이 1,800대를 판 것과 비교된다. 공화국에는 기름도 트럭도 판매되지 않았다.[24]

우선 나치 독일로 실어보내고 거기에서 그것을 다시 스페인으로 환적(換積)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회사들은 역시 파시스트들에게 무기도 판매하였다. 듀퐁(Dupont) 소유의 아틀라스화약사(Atlas Powder Company)는 1938년에 6만 개의 공중투하 폭탄을 이런 식으로 독일로 실어 보냈는데, 거기에는 모두 “미지의 목적지로 환적을 위한 것”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25] 공화파 도시들에 투하되고 있는 폭탄들이 모두 미국제라는 것을 1938년 4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그리고는 “그것은 모두 전적으로 합법적이다”라고 말했다.[26]

해군의 ‘불간섭’ 순찰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국은 지브롤타르 해협을 통한 탄약의 공급이나 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에 관한 정보보고들, 기타 다양한 상업상의 거래에 프랑코에 대한 자신의 지원을 한정했다.[27]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는 그 나름으로 ‘불간섭’ 이외의 수많은 방법을 통해서 파시즘에 기여했다. 스페인 공화국에 수량의 낡은 비행기를 판 후에 그들은 무기와 의용군들이 스페인 공화국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국경을 봉쇄했다. 프랑스에서 체포된 의용군들은 투옥되었는데, 그러나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지하조직들의 도움으로 많은 의용군들이 국경을 넘었다. 대량의 쏘련 무기와 코민테른 구매 무기가 프랑스 영토 내에 억류되었다. 카탈로니아가 함락된 후에 공화파 망명자들은 프랑스 지배계급의 최대의 환대를 받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공화국에 대한 쏘련의 원조가 스페인에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마드리드 방어를 위한 탱크 분견대가 겨우 도착한 1936년 10월이었다. 스페인 내의 쏘련 병력수는 한번도 총 700명이 넘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28] 프랑스가 국경을 봉쇄한 후 쏘련의 무기 수송이 제한되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잠수함과 비행기, 그리고 ‘불간섭’ 순찰이라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세계대전을 피하고자 하는 바람―결국은 실현되지 못한 바람― 때문이었다. 프랑코 측의 자료에 의하면, 무기를 운반하고 있다는 이유로 53척의 상선이 침몰되었고, 324척이 나포되었으며, 1,000척이 해상에 억류되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쏘련의 전쟁물자를 운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아무튼 침몰된 것으로 알려진 쏘련 선박 중에는 콤소몰호, 티미리아체프호, 블라고에프호가 포함되어 있었다.[29]

이러한 온갖 종류의 외국의 간섭 때문에 공화파는 한번도 동등한 무기로 싸워본 적이 없으며, 전형적으로 물자와 인력에서 3 대 1, 혹은 4 대1의 열세에 부딪쳤다.[30]

승리를 위한 공산당원들의 조직

히틀러가 제공한 항공기들로 모로코로부터 이송된 아프리카 군단은 경험도 없고 변변치 않게 무장한 인민전선의 민병대들을 밀어 제치면서 중부 스페인의 광야를 지나 빠르게 북부로 진격했다. 하지만 민병대들이 마드리드로 퇴각함에 따라서 저항이 강해졌다. 스페인 공산당은 ‘좌익’ 사회주의 허풍장이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발레로(Francisco Largo Caballero)가 수반으로 있던 공화파 정부에게 도시의 요새화를 조직하도록 촉구했다. 수상 라르고는, “스페인 사람들은 나무 뒤에서 싸울지는 몰라도 결코 참호 속에서는 싸우지 않는다”[31]고 대답했다. 라르고 수상뿐 아니라 전쟁장관 역시 그의 눈부신 무능력을 특정 시간에만 과시했다. 오전 8시 30분에서 9시까지만 서류에 결재를 하겠다는 것이며, 오후 10시 이후에는 연락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32] 11월 6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수도 방위 책임을 방기하고 발렌시아(Balencia)로 옮겨갔다. 공산당원들을 제외한 모든 각료들이, 심지어 전쟁장관의 음반들까지 챙겨서, 라르고 카발레로와 함께 떠나버렸다.[33] 시가전이 한창이던 9일 라르고는 놓고 온 은식기들을 챙겨 오도록 마드리드로 심부름꾼을 보냈지만, “마드리드에 남은 사람들이 아직 식사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34]

라르고는 무능하고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공화파 장군 미아하(Miaja)와 노동조합 및 인민전선 대표들로 구성된 방위협의회(Defense Junta)에 수도 방위를 일임했다. 다행히도, 명목상으로는 미아하의 고문인, 쏘련 장군 고리에프(Goriev)가 옆에 있어서 방위군사계획을 다룰 수 있었다.[35]

수도의 주민을 동원한다는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측면은 스페인 공산당이 주도했다. 반란이 개시되자 정열의 여인(돌로레스 이바루리)의 방송과 연설이 결연한 마드리드 방어를 호소했다. ― “그들을 통과시키지 않겠다!” “마드리드는 파시즘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후 공산당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조직했다. 그들의 저 유명한 제5연대는 6만 명 이상의 의용군(그 절반은 공산당원)을 모집했고, 곧 그것이 인민군의 중추가 되었다. 러시아 내전기의 쏘비에트 적군(赤軍)을 본받아 제5연대에는 부대와 지휘관들의 정치의식을 책임지고 필요한 경우 스스로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정치위원제가 있었다. 곧 유명한 지휘관이 되는 리스터(Lister, 석수)나 모데스토(Modesto, 벌목공), 엘 캄페지노(El Campesino, “촌놈”)를 포함해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제5연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막사와 병참부, 훈련소뿐 아니라 병사의 가족을 돌볼 위원회들이 조직되었다. 규율은 엄했고 모범으로 하나의 특수중대가 조직되었다. 연대의 통제위원은 한 기자에게 이 중대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그것을 ‘강철중대’라고 불렀고 엄중한 자격이 요구되었다. 이 중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기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고, 아주 건강해야 했으며, 단호한 반파쇼주의자라는 보증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중대를 위해서 우리는 철의 단결을 위한 특수한 슬로건들을 만들었다. ‘그가 부상을 입었든 죽었든, 한 사람의 동무도 적의 손에 넘기지 않는다’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만일 나의 동무가 명령 없이 진격하거나 명령 없이 후퇴하면, 나에게는 그를 사살할 권리가 있다’는 슬로건도 있었다. 마드리드는 얼마나 그것을 비웃었던가! 스페인인들은 개인주의자들이라서 아무도 그러한 규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주로 공산당원들과 금속노동자들로 구성된 우리의 첫 번째 강철중대가 시가행진을 벌여, 쎈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후 우리는 제5연대의 정규부대들 외에, 선발된 사람들로 그러한 중대를 28개나 더 조직했다.
- Anna Louise Strong, Spain in Arms, 1937, New York, 1937, pp. 42-3.

스페인 공산당(PCE)과 JSU(사회주의청년연합), PSUC(역시 코민테른에 가입해 있던 ‘카탈로니아 연합사회당’)의 당원과 회원이 전쟁 개시시의 3만 명에서 1936년 말에는 20만 명으로, 1937년 6월에는 1백만 명으로 급증했는데,[36] 이는 부분적으로 공산당원들이 진지하고 효율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했기 때문이었다.

주로 공산당들이 모집한 외국인 의용병들은 공산당원들이 이끄는 국제여단으로 조직되었다. 이 국제여단은 평소 1만7천 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약 4만 명이 거기에 복무했다.[37] 이들 국제여단 역시 제5연대와 마찬가지로 그 규율과 용기로 유명했다. 탤만여단(Thaelmann Brigade)의 독일인 망명자들이 방어했던 테루엘의 고지를 헤밍웨이는, “어느 전쟁의 어떤 진지 못지않게 적에게 많은 타격을 주고야 함락된 진지”[38]라고 묘사했다. 훈련된 병사가 드물었던 전쟁 초기에 국제여단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그들 외국인 의용병들의 국제주의적 행동에 크게 감사했다. 전쟁 후반기에는 많은 스페인인들이 국제여단에 참가했다. 1938년에 외국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개입에 대한 국제연맹의 반대를 이끌어내기 위해 철수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끝났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인민의 군대에도 많은 정예부대가 있었다.

파쇼 부대가 마드리드로 접근함에 따라서 떠나버린 공무원들의 역할을 공산당원들이 담당했다. 라디오와 전단, 깃발을 동원하여 마드리드의 노동자들에게 참호를 파고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도록 독려했다. 노동자 거주지역은 구역별로 조직되었고, 제5연대는 전단을 통해서 대(對)탱크전과 시가전의 요령을 교육했다.[39]

11월 7일 프랑코의 군대가, 쉽게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서쪽과 남서쪽, 그리고 북서쪽에서 마드리드를 공격했으나 결연한 민병대, 특히 제5연대의 치밀한 전투에 의해서 격퇴되었다. 방어군은 8일에 대학도시(University City)를 통해 다시 공격해올 것에 대비했다. 파쇼 군대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노동자 거주지역을 통해서 공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40]

대학에서의 저항은 격렬해서, 노동자들과 파쇼 군대가 서로 다른 층들을 점거한 채 대치하기도 했다. 어떤 곳들에서는 소총이 부족해서 무기를 가진 사람이 총을 맞을 때까지 잠복해 있다가 달려 나가 총을 집어 계속 싸웠다.[41] 오후에는 최근에 편성된 제11 국제여단의 전위대들이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며 그랑비아(Gran Via)를 행군했다. 군중이 의용군인 에드가 앙드레(Edgar Andre) 대대(벨기에)나 돔부로우스키(Dombrowski) 대대(폴란드), 빠리 코뮌(Commune de Paris) 대대(프랑스)에 환호하며, 1934년 아스투리아 봉기 때의 슬로건인 “프롤레타리아 형제들의 단결”을 외쳤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여단이 러시아인들이라고 믿고, “러시아 만세”를 외쳤다.

해질녘이 되자 그토록 필요했던 에드가 앙드레 대대의 기관총들이 대학의 철학관에 거치되고, 다른 여단들도 결정적인 위치들에 배치되었다. 다음날 모로코 부대가 두 번에 걸쳐 톨레도 여단과 프린세스 여단의 민병대 방어선을 뚫고 공격해 왔으나,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42] 저녁에는 국제여단들이 카사드캄포(Casa de Campo)에 있는 모로코 부대를 선제공격하여 거대한 손실을 입히며 밀어냈다.[43]

11월 8일에서 15일 사이에 9개의 민병 부대들이 다른 지역에서 마드리드로 왔다. 그 중에서 아라곤 전선(Aragon Front)에서 온 3천 명으로 이루어진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부대는, 무정부주의적 군대 조직의 실례로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그 부대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가 통솔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른 부대가 자신들의 전과를 가로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한 구역을 독자적으로 담당하겠다고 요구했고, 이 요구는 무정부주의자인 법무장관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44]

이들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포병 및 항공 지원과 함께, 대학 도시의 한 구획이 맡겨졌으나, 공격하기를 거부했다. 다음날 파시스트들이 공격해오자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학 내의 주요 교량과 진지들을 버리고 도주했다. 녹초가 된 민병들과 국제여단의 반격으로 잃었던 땅의 일부를 되찾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어진 전선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두루티는 부하들의 그러한 행동들을 부끄러워하며 그들이 마드리드를 떠나지 않도록 만류하려 했지만, 그들 중 한 사람에 의해 사살되었다.[45]

아라곤과 카탈로니아 -무정부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혁명놀이-

트로츠키주의 POUM(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스페인 공산당(PCE) 탈당자들이 이끄는 두 개의 파벌이 연합하여 1935년 10월에 결성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주로 카탈로니아에 한정되어 있었다. 1937년 5월에 진압될 때까지 POUM은 이베리아무정부주의자연합(FAI) 및 FAI가 이끄는 노총(CNT)의 부속물로서 활동했다. 오로지 “스탈린주의자들”을 공격하겠다는 일념에서[46] POUM은, “혁명에 관한 소망과 전망과 관련하여 유사한 사상을 가진”[47] 무정부주의자들과 연합을 한 것이다.

파시스트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FAI-CNT는 카탈로니아 최강의 정치세력으로서 반파쇼민병대위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쟁 첫 해에, 농촌 지역에서는 제네랄리탵(Generalitat)이 여전히 부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는 이 위원회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48]

무정부주의자의 지도 하에 노동자위원회가 바르셀로나의 공장들을 접수했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때로는 강제적으로, 농업협동조합을 건설했다.[49] 많은 외국인 소유 공장들은 몰수되지 않았는데, 87개의 영국인 기업은 영국 영사관과의 합의 하에 보호되었다.[50]

무정부주의자들에 동조하는 저술가들은, 그들의 산업 실험은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무기산업에서 성공적이었고,[51] 중앙정부로부터의 신용이 없었기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와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카탈로니아에서의 산업상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는 민병대위원회의 무정부주의자 위원이었던 아바드 드 싼티얀이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계획했던 경제기구를 조직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장에서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우리가 통제위원회로서 들어서는 데에 만족했다. 서로 연락해서 적절한 형태로 경제를 조정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일하고 있었다.
- Abad de Santillan, After the Revolution, New York, 1937, p. 122.

트로츠키주의자들, 무대를 잃다

POUM 지도자들은 프랑코의 첩자들?

공산당원들의 오류, 인종주의

게릴라전

사회주의 -승리로의 유일한 길-

각주

  1. Progressive Labor Party로 미국의 노동자정치 조직중 하나다.
  2. Frank Jellinek, The Civil War in Spain, London, 1938, 제1, 2, 4장.
  3. Hugh Thomas, The Spanish Civil War, New York, 1961, p. 19.; (1931년 4월 12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공화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국왕 올폰소 13세가 프랑스로 망명했다.―역자)
  4. 같은 책, 제3, 4, 5, 6, 7장.
  5. 같은 책, 제 7, 8장.
  6. [역주] 스페인 노동운동에는 맑스주의가 소개되기에 앞서 바쿠닌 파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먼저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적-쌩디칼리스트적 경향이 강했다.
  7. Arthur Landis, Spain! The Unfinished Revolution, Baldwin Park, Cal., 1972, p.58.
  8. Thomas, pp. 80-5.
  9. Thomas, p. 96.
  10. 같은 책, p. 96.
  11. G. Jackson, The Spanish Republic and Civil War, 1931-1939, Princeton, 1965, p. 417.
  12. Jellinek, p. 285.
  13. 같은 책, p. 75.
  14. Richard Robinson, The Origins of Franco's Spain, Pittsburg, 1970, p. 291.
  15. Jellinek, p. 279.
  16. Stanley Payne, Falange, Stanford, 1961, p. 45.
  17. Jackson, pp. 356-58.
  18. D. Ibarurri, They Shall Not Pass, New York, 1966, p. 185.
  19. 같은 책, p. 105.
  20. Jacson, p. 333.
  21. Landis, p. 205.
  22. 같은 곳.
  23. 같은 책, p. 207.
  24. 같은 책, p. 208.
  25. 같은 곳.
  26. 같은 곳.
  27. German Charge d'Affairs in Fascist Spain, 같은 책, p. 239에서 재인용.
  28. Stanley Payne, The Spanish Revolution, New York, 1970, p. 324.
  29. Landis, p. 243.
  30. Arthur Landis, The Abraham Lincoln Brigade, New York, 1967. 이하에서는 ‘Landis, ALB'로 표기한다.
  31. Landis, p. 246.
  32. 같은 책, p. 247.
  33. Thomas, p. 319.
  34. Landis, p. 269에서 재인용.
  35. Burnett Bolloten, The Grand Camouflage, New York, 1961, p. 239.
  36. P. Broue & Temime, The Revolution and the Civil War in Spain, Cambridge, Mass., 1970, p. 229.
  37. Landis, p. 252.
  38. Landis ALB, p. 376에서 재인용.
  39. Landis, p. 262.
  40. 같은 책, p. 259에서 재인용.
  41. 같은 책, p. 267.
  42. 같은 책, pp. 268-69.
  43. 같은 책, p. 370.
  44. 같은 책, p. 273.
  45. 같은 책, pp. 275-76.
  46. The Spanish Revolution (POUM의 영문판 신문), 1937. 2. 3.
  47. 같은 신문, 1937. 3. 31.
  48. Broue and Temime, pp. 130-33; Thomas, pp. 187-92.
  49. Landis, p. 324에서 재인용. 본래의 출처는 공화국 정부의 무정부주의자 장관인 J. Perto이다.
  50. Payne, p. 246.
  51. G. Brennan, The Spanish Labyrinth, Cambridge, U.K., 1943, p.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