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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사회의 윤리도덕 기본 준칙으로서 인(仁)을 말하였다:
공자는 사회의 윤리도덕 기본 준칙으로서 인(仁)을 말하였다:


{{인용문|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몸을 이기고 예(禮)에 돌아가는 것이 인을 행하는 것이고, 하루 몸을 이겨서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아올 것이고,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남에게서 말미암을 것이냐?”|공자, ≪논어≫, 『안연』, 제1장.}}
{{인용문|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몸을 이기고 예(禮)에 돌아가는 것이 인을 행하는 것이고, 하루 몸을 이겨서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아올 것이고,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남에게서 말미암을 것이냐?”|≪논어≫, 『안연』, 제1장.}}


공자에 따르면, 인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에 따르면, 인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인용문|중궁(仲弓)이 인에 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문에 나가서는 큰 손님을 뵙는 것 같이 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잇는 것같이 하고, 자기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 것이니, 그러면 나라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며, 집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공자, ≪논어≫, 『안연』, 제2장.}}
{{인용문|중궁(仲弓)이 인에 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문에 나가서는 큰 손님을 뵙는 것 같이 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잇는 것같이 하고, 자기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 것이니, 그러면 나라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며, 집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논어≫, 『안연』, 제2장.}}


공자는 이를 잘하는 자가 타인의 믿음(信)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따라 무리의 수령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구별되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사회 전체적으로는 교화가 진행된다고 하였다. 공자의 학설은 당대 신분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논어》에는 ‘윗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우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생겨났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랫사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윗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공자는 이를 잘하는 자가 타인의 믿음(信)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따라 무리의 수령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구별되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사회 전체적으로는 교화가 진행된다고 하였다. 공자의 학설은 당대 신분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논어》에는 ‘윗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우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생겨났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랫사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윗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2022년 6월 20일 (월) 16:34 판

유가(한자: 儒家, 영어: Confucianism)는 중국 춘추시대 말 노나라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봉건적 이데올로기이다. 유교(儒敎) 또는 유학(儒學)이라고도 불린다.

개요

공자의 학설은 주나라의 전통적인 생산양식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하급 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생성되었다. 공자는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은 오직 인간의 윤리적 품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공상적 이념을 전개하였다. 그의 학설에서는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 당대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복종 및 그러한 낙후성에서 강조되는 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적합한 관습 등이 강조되었다.[1]

기원전 3세기 중원 대륙에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고, 얼마 안 가 유방(劉邦)이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인 한나라가 건립되었을 때 유가는 봉건국가의 공적 영역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가는 법가적 요소를 일정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중서(董仲舒)는 이러한 작업의 주도자였으며, 명실공히 객관적 관념론으로서, 그 시대 중국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1]

2세기 말 한나라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유가는 그 공식적인 영역에서 그 지배력을 일정 상실하고, 그 자리는 불교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는 당대 중국 사회에서 사회 규범 및 인간 관계에 관하여는 매우 강력한 규정력을 발휘하였다.

9세기 초 당나라의 한유(韓愈)는 배불론(排佛論)을 내세우면서 유가의 복귀를 주장하였다. 송나라에 이르러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에 의해 관념론적 일원주의로서 신유가(新儒家)가 흥성하게 되었다.[1] 신유가는 고대 유가의 부정의 부정으로, 고대 유가가 치밀한 사유 체계와 높은 수준의 형이상학적 교리를 갖추고 풍부하게 복귀한 것이었다. 송나라에서 발전한 신유가는 주희(朱熹)가 체계화[1]하였으며, 그의 학설은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흔히 성리학(性理學)·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 등으로 칭해졌다.

체계

유가 사상의 계급적 기초는 중국 사회에서 하급 관리 및 귀족, 지주였다. 사회 발전에서 유가 사상은 아시아적인 생산 양식의 특수한 단계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仁)

공자는 사회의 윤리도덕 기본 준칙으로서 인(仁)을 말하였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몸을 이기고 예(禮)에 돌아가는 것이 인을 행하는 것이고, 하루 몸을 이겨서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아올 것이고,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남에게서 말미암을 것이냐?”
≪논어≫, 『안연』, 제1장.

공자에 따르면, 인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중궁(仲弓)이 인에 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문에 나가서는 큰 손님을 뵙는 것 같이 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잇는 것같이 하고, 자기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 것이니, 그러면 나라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며, 집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
≪논어≫, 『안연』, 제2장.

공자는 이를 잘하는 자가 타인의 믿음(信)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따라 무리의 수령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구별되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사회 전체적으로는 교화가 진행된다고 하였다. 공자의 학설은 당대 신분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논어》에는 ‘윗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우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생겨났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랫사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윗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공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에 통용되는 사회적 의식의 형태를 예(禮)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예에 부합하는지 따지는 기준을 의(義)라고 하고, 그것을 따질 수 있는 능력을 지(智)라 한다. 공자 사상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핵심을 이룬다.

참고 문헌

  • 북경대학철학과연구실 저, 박원재 역 (1994),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편 (1989), 《철학대사전》, 동녘.

각주

  1. 1.0 1.1 1.2 1.3 《철학대사전》, 동녘, p. 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