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좌파도서관

유가(한자: 儒家, 영어: Confucianism)는 중국 춘추시대 말 노나라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노예제적 또는 봉건적 이데올로기이다. 유교(儒敎) 또는 유학(儒學)이라고도 불린다.

유가는 동북아시아의 오랫동안 봉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하였는데, 그 영향력은 군사·생활·의례·정치·학문을 포함한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봉건적 생산양식이 크게 소멸한 오늘날까지 유가는 동북아시아, 대표적으로 중국·한국·베트남에서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해당 국가의 근대적 민족 문화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개요

공자의 학설은 주나라의 전통적인 생산양식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주나라의 노예제적 질서를 수호하는, 하급 귀족 및 노예주의 이데올로기로서 등장하였다. 공자는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은 오직 인간의 윤리적 품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공상적 이념을 전개하였다.[1] 그의 학설에서는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 당대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복종 및 그러한 낙후성에서 강조되는 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적합한 관습 등이 강조되었다.[2]

유가에서 말하는 유(儒)란 본래 주나라의 귀족·노예주 밑에서 성내민(城內民)과 노예주에 대한 교육 공무를 맡던 학자 및 상례(喪禮)를 맡던 관인을 뜻한다. 공자 역시 유로서 성내민의 교육과 상례를 맡은 바 있다.[3]

기원전 3세기 중원 대륙에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고, 얼마 안 가 유방(劉邦)이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인 한나라를 건립하였을 때 유가는 봉건국가의 공적 영역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가는 법가적 요소를 일정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중서(董仲舒)는 이러한 작업의 주도자였으며, 명실공히 객관적 관념론으로서, 그 시대 중국에서 지배적인 봉건 이데올로기가 되었다.[2]

2세기 말 한나라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유가는 그 공식적인 영역에서 그 지배력을 일정 상실하고, 그 자리는 불교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는 당대 중국 사회에서 사회 규범 및 인간 관계에 관하여는 매우 강력한 규정력을 발휘하였다.

9세기 초 당나라의 이고(李翺)와 한유(韓愈)는 각각 복성론(復性論)과 배불론(排佛論)을 내세우면서 유가의 복귀를 주장하였다. 송나라에 이르러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에 의해 관념론적 일원주의로서 신유가(新儒家)가 흥성하게 되었다.[2] 신유가는 고대 유가의 부정의 부정으로, 고대 유가가 치밀한 사유 체계와 높은 수준의 형이상학적 교리를 갖추고 풍부하게 복귀한 것이었다. 송나라에서 발전한 신유가는 주희(朱熹)가 체계화[2]하였으며, 그의 학설은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흔히 성리학(性理學)·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 등으로 칭해졌다.

주자학은 송나라에서 형성되었지만, 그 사상의 발전은 봉건조선과 베트남의 여러 봉건왕조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주자학은 동북아시아 여러 봉건정부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일본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서 일본으로 넘어간 조선 유학자이자 의병장 강항(姜沆)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그의 제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가 에도시대 주자학파의 첫 번째 영수가 되었다.

한편 유가는 12세기 송나라 사상가인 육구연(陸九淵)에 의해 주자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명나라의 학자 왕수인(王守仁)은 육구연의 사상 체계를 계승하여 주관적 관념론을 형성하였다. 왕수인의 유가 사상은 그의 호를 따서 양명학(陽明學)이라 불리게 되었다.

유가가 봉건적 이데올로기인지, 아니면 노예제적 이데올로기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권 동방학부에서 공자 사상의 형태로 등장한 춘추전국시대에서의 유가는 노예제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예제 이데올로기로 간주되었다.[4] 그러나 한나라 이후 수많은 사상을 통해 관학이 된 1세기 이후의 유가는 봉건적 이데올로기로 간주된다.

체계

유가 사상의 계급적 기초는 중국 사회에서 하급 관리 및 귀족, 지주, 노예주였다. 계급 적대에 기초한 사회 관계 속에서 학문을 독점한 계급에 의해 형성된 사상으로서 유가는 관념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였다. 사회 발전에서 유가 사상은 아시아적인 생산 양식의 특수한 단계를 그 물적 기초로 지닌다.

정명(正名)

공구는 노예주귀족 계급의 당파성을 견지하였다. 주나라의 노예제[5]가 붕괴하고 신흥 지주들에 의해 봉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공자는 노예제의 온존 및 복구를 주장하였다.[6] 그는 당대 중국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타락상의 근원을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주나라의 노예제 질서의 해체에서 에서 찾았다.(《좌전》 「양공 14년」)

그는 법도(法度)와 예악(禮樂)을 복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명(正名)을 내세웠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군주가 군주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것”(君君, 臣臣, 父父, 子子)[7]이다. 이것은 주례가 준거를 부여하던 군주와 신하 간, 부자 간의 예법이 회복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정명이란 주례의 예법대로 인간의 사고와 행위가 맞춰져야 한다는 관념론적 사상이었던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

공자는 사회의 윤리도덕 기본 준칙으로서 인(仁)을 말하였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몸을 이기고 예(禮)에 돌아가는 것이 인을 행하는 것이고, 하루 몸을 이겨서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아올 것이고,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남에게서 말미암을 것이냐?”
≪논어≫, 『안연』, 제1장.

공자에 따르면, 인은 타인이 처한 제반 상황을 고려하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중궁(仲弓)이 인에 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문에 나가서는 큰 손님을 뵙는 것 같이 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잇는 것같이 하고, 자기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 것이니, 그러면 나라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며, 집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
≪논어≫, 『안연』, 제2장.

공자는 이를 잘하는 자가 타인의 믿음(信)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따라 무리의 수령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구별되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사회 전체적으로는 교화가 진행된다고 하였다. 공자의 학설은 당대 신분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논어》에는 ‘윗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우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생겨났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랫사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윗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공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에 통용되는 사회적 의식의 형태를 예(禮)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예에 부합하는지 따지는 기준을 의(義)라고 하고, 그것을 따질 수 있는 능력을 지(智)라 한다. 공자 사상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핵심을 이룬다.

수기치인(修己治人)

《논어》의 태백편(泰伯篇)과 헌문편(憲問篇)에 따르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요(堯)·순(舜)·우(禹)의 인격과 정치를 그 내용과 형식으로 지닌다. 공자 사상에서 수기치인은 정덕(正德)[8]과 이용후생(利用厚生)[9]을 목적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것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의 가장 간결한 형식이 《대학》에서 일컬어지는 팔조목(八條目)인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서경(書經)》에 등장하는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에게 전해주었다는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수기치인에 대한 간명한 내용이라고 평가받는다.

사단칠정(四端七情)

《맹자》를 통해 전해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유가의 대표적인 인식론으로, 인간의 마음과 실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맹자는 자사학파에 속했던 인물로 그의 인식론은 자사의 천인합일(天人合一)적 사상에 기초해 있다. 그의 성선설(性善說)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맹자는 모든 인간은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사단은 공자가 언급하였던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실천적 마음으로 표출될 때 생성되는 관념 형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는 것),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사양지심(辭讓之心, 분수에 넘치는 것을 멀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게 대하는 것),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그는 인간을 짐승과 구분하였으며, 인간을 천도(天道)와 연관된 고귀한 존재라고 간주했다. 그는 인간을 짐승과 엄격히 구분하였고, 사단에서 멀어진 인간을 금수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맹자는 인간에 관해, 살고자 하는 욕구(生慾, 생욕), 먹고자 하는 욕구(食慾, 식욕), 이성(異性)을 탐하고자 하는 욕구(色欲, 색욕)만을 가진 ‘사리분별이 여러 짐승들보다 훨씬 명확한 수준 높은 짐승’이라고 한 고자(告子)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즉 색욕·식욕·물욕 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또 다른 본성으로 인정하였으며, 이것들은 환경적 요소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는 것으로, 발전도 없고 쇠퇴도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인정(人情)은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로 나누어진다.

천도를 준거로 삼는 인의예지는 인간의 선한 노력으로 충분히 체득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무한히 자라 그 인간 스스로를 군자(君子)의 반열에 오르게 할 수 있다. 군자가 되면 발전도 쇠퇴도 없는 인욕(人慾)은 당연히 인간의 선한 의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맹자는 동시 도덕 실천에서 인간의 직관성인 양능(良能)을 중시했다. 따라서 그는 악한 자일지라도 특정한 상황하에서는 본성에 내재된 사단이 발동되어, 악인도 도덕 실천의 선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도덕의 천명(天命, 맹자는 이를 의지적 도덕 행위와 결정론적 도덕 행위 각각에 관여하는 도덕명령이라고 하였다)이라 하였다.

유가의 성선설은 외부 조건을 무시하지 않는다. 되려 맹자는 양지(良知)의 부족으로 인해 외부 조건에 의해 악영향을 받을 경우 악행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떻든 선한 실천을 하려는 생득적 의지를 잃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악한 자들을 포함해서 인간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선한 본성인 사단이 자리 잡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는 사단이 있지만, 이것을 실천하려면 교화(敎化,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교화를 통해 양지를 얻을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양능의 토대가 된다.

맹자는 엄벌주의를 반대하였다. 만약에 악행을 막기 위해 형벌을 우선시하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악행을 막을 수 있어도, 사단과 멀어진 마음까지는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엄벌주의는 끊임없는 악행의 원인이 된다. 맹자는 그러한 엄벌주의는 결국 형벌의 강화로 치달아 폭정에 이른다고 하였다. 폭정은 만인이 산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므로, 엄벌주의는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통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그가 한비자(韓非子)를 비판하여 교화주의를 과격하게 내세우고 사단의 발현에 초점을 맞춘 이유이기도 하다.

유가의 사단칠정은 선험주의적 관념론에 속한다. 그의 선험주의는 귀족노예주 계급이 선험적으로 윤리적 선을 실천할 수 있는 불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지녔다는 것을 설파한다.[10]

근대적 민족 문화로서 유가

유가는 봉건적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봉건지주의 이해를 대변한 관변학문으로 되었다. 유가는 오랫동안 중국·한국·베트남 사회에 자리 잡은 결과로, 해당 나라의 근대적 민족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영향을 끼쳤는데, 대표적으로 유가 인식론인 사단칠정은 세 나라의 문화적 기반으로서의 윤리·도덕 세계관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참고 문헌

  • 김용옥 역 (2008), 《논어한글역주》, 제1권, 통나무.
  • 김용옥 역 (2008), 《논어한글역주》, 제2권, 통나무.
  • 맹가 저, 우재호 역 (2007), 《맹자》, 을유문화사.
  • 임동석 역 (2017), 《서경》, 제1권, 동서문화사.
  • 북경대학철학과연구실 저, 박원재 역 (1994),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편 (1989), 《철학대사전》, 동녘.
  • 금장태 (1999), 《한국현대의 유교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각주

  1. 《논어》 술이편(述而篇)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자신의 사상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 기존의 《주례》(周禮)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다. 학문을 대함에서 옛것을 계승한다는 자세를, 그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였다. 《주례》는 고대 주나라의 예법을 기록한 문헌으로, 유가에 기초한 모든 전근대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되었다.
  2. 2.0 2.1 2.2 2.3 《철학대사전》, 동녘, p. 951.
  3.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p. 60.
  4. 중화인민공화국 북경대학 철학과 연구실 공동 작업의 산물인 《중국철학사》는 이러한 입장에 근거하여 공자 사상을 노예제 이데올로기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5. 주나라의 종법봉건제를 근거로 이미 봉건사회였다고 간주하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사학계에서 주나라는 노예제 국가로 간주된다.
  6.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p. 61.
  7. ≪논어≫, 『안연』.
  8. 인의예지를 추구하여 올바른 덕성을 기르는 것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한다.
  9.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한다.
  10.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p.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