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좌파도서관
백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일 (금) 11:02 판

유가(한자: 儒家, 영어: Confucianism)는 중국 춘추시대 말 노나라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노예제적 또는 봉건적 이데올로기이다. 유교(儒敎) 또는 유학(儒學)이라고도 불린다.

유가는 동북아시아의 오랫동안 봉건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하였는데, 그 영향력은 군사·생활·의례·정치·학문을 포함한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봉건적 생산양식이 크게 소멸한 오늘날까지 유가는 동북아시아, 대표적으로 중국·한국·베트남에서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상술한 나라의 근대적 민족 문화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개요

공자의 학설은 주나라의 전통적인 생산양식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주나라의 노예제적 질서를 수호하는, 하급 귀족 및 노예주의 이데올로기로서 등장하였다. 공자는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은 오직 인간의 윤리적 품성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공상적 이념을 전개하였다.[1] 그의 학설에서는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 당대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복종 및 그러한 낙후성에서 강조되는 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적합한 관습 등이 강조되었다.[2]

유가에서 말하는 유(儒)란 본래 주나라의 귀족·노예주 밑에서 성내민(城內民)과 노예주에 대한 교육 공무를 맡던 학자 및 상례(喪禮)를 맡던 관인을 뜻한다. 공자 역시 유에 해당하였다.[3]

기원전 3세기 중원 대륙에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고, 얼마 안 가 유방(劉邦)이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인 한나라를 건립하였을 때 유가는 봉건국가의 공적 영역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가는 법가적 요소를 일정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중서(董仲舒)는 이러한 작업의 주도자였으며, 명실공히 객관적 관념론으로서, 그 시대 중국에서 지배적인 봉건 이데올로기가 되었다.[2]

2세기 말 한나라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유가는 그 공식적인 영역에서 그 지배력을 일정 상실하고, 그 자리는 불교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는 당대 중국 사회에서 사회 규범 및 인간 관계에 관하여는 매우 강력한 규정력을 발휘하였다.

9세기 초 당나라의 이고(李翺)와 한유(韓愈)는 각각 복성론(復性論)과 배불론(排佛論)을 내세우면서 유가의 복귀를 주장하였다. 송나라에 이르러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에 의해 관념론적 일원주의로서 신유가(新儒家)가 흥성하게 되었다.[2] 신유가는 고대 유가의 부정의 부정으로, 고대 유가가 치밀한 사유 체계와 높은 수준의 형이상학적 교리를 갖추고 풍부하게 복귀한 것이었다. 송나라에서 발전한 신유가는 주희(朱熹)가 체계화[2]하였으며, 그의 학설은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흔히 성리학(性理學)·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 등으로 칭해졌다.

주자학은 송나라에서 형성되었지만, 봉건조선과 베트남의 여러 봉건왕조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서 일본으로 넘어간 조선 유학자이자 의병장 강항(姜沆)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그의 제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가 에도시대 주자학파의 첫 번째 영수가 되었다.

한편 유가는 12세기 송나라 사상가인 육구연(陸九淵)에 의해 주자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명나라의 학자 왕수인(王守仁)은 육구연의 사상 체계를 계승하여 주관적 관념론을 형성하였다. 왕수인의 유가 사상은 그의 호를 따서 양명학(陽明學)이라 불리게 되었다.

유가가 봉건적 이데올로기인지, 아니면 노예제적 이데올로기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권 동방학부에서 공자 사상의 형태로 등장한 춘추전국시대에서의 유가는 노예제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예제 이데올로기로 간주되었다.[4] 그러나 한나라 이후 수많은 사상을 통해 관학이 된 1세기 이후의 유가는 봉건적 이데올로기로 간주된다.

체계

유가 사상의 계급적 기초는 중국 사회에서 하급 관리 및 귀족, 지주, 노예주였다. 계급 적대에 기초한 사회 관계 속에서 학문을 독점한 계급에 의해 형성된 사상으로서 유가는 관념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였다. 사회 발전에서 유가 사상은 아시아적인 생산 양식의 특수한 단계를 그 물적 기초로 지닌다.

정명(正名)

공구는 노예주귀족 계급의 당파성을 견지하였다. 주나라의 노예제[5]가 붕괴하고 신흥 지주들에 의해 봉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공자는 노예제의 온존 및 복구를 주장하였다.[6] 그는 당대 중국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타락상의 근원을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주나라의 노예제 질서의 해체에서 에서 찾았다.(《좌전》 「양공 14년」)

그는 법도(法度)와 예악(禮樂)을 복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명(正名)을 내세웠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군주가 군주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것”(君君, 臣臣, 父父, 子子)[7]이다. 이것은 주례가 준거를 부여하던 군주와 신하 간, 부자 간의 예법이 회복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정명이란 주례의 예법대로 인간의 사고와 행위가 맞춰져야 한다는 관념론적 사상이었던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

공자는 사회의 윤리도덕 기본 준칙으로서 인(仁)을 말하였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몸을 이기고 예(禮)에 돌아가는 것이 인을 행하는 것이고, 하루 몸을 이겨서 예에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아올 것이고, 인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남에게서 말미암을 것이냐?”
≪논어≫, 『안연』, 제1장.

공자에 따르면, 인은 타인이 처한 제반 상황을 고려하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중궁(仲弓)이 인에 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문에 나가서는 큰 손님을 뵙는 것 같이 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큰 제사를 잇는 것같이 하고, 자기가 하고자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 것이니, 그러면 나라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며, 집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
≪논어≫, 『안연』, 제2장.

공자는 이를 잘하는 자가 타인의 믿음(信)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따라 무리의 수령이 되고, 이렇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구별되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사회 전체적으로는 교화가 진행된다고 하였다. 공자의 학설은 당대 신분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논어》에는 ‘윗사람’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우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생겨났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랫사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윗사람에게 배워야 한다.

공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에 통용되는 사회적 의식의 형태를 예(禮)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예에 부합하는지 따지는 기준을 의(義)라고 하고, 그것을 따질 수 있는 능력을 지(智)라 한다. 공자 사상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핵심을 이룬다.

수기치인(修己治人)

《논어》의 태백편(泰伯篇)과 헌문편(憲問篇)에 따르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요(堯)·순(舜)·우(禹)의 인격과 정치를 그 내용과 형식으로 지닌다. 공자 사상에서 수기치인은 정덕(正德)[8]과 이용후생(利用厚生)[9]을 목적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것의 완성을 의미한다.

참고 문헌

  • 북경대학철학과연구실 저, 박원재 역 (1994),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편 (1989), 《철학대사전》, 동녘.

각주

  1. 《논어》 술이편(述而篇)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자신의 사상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 기존의 《주례》(周禮)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다. 학문을 대함에서 옛것을 계승한다는 자세를, 그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였다. 《주례》는 고대 주나라의 예법을 기록한 문헌으로, 유가에 기초한 모든 전근대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되었다.
  2. 2.0 2.1 2.2 2.3 《철학대사전》, 동녘, p. 951.
  3.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p. 60.
  4. 중화인민공화국 북경대학 철학과 연구실 공동 작업의 산물인 《중국철학사》는 이러한 입장에 근거하여 공자 사상을 노예제 이데올로기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5. 주나라의 종법봉건제를 근거로 이미 봉건사회였다고 간주하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사학계에서 주나라는 노예제 국가로 간주된다.
  6. 《중국철학사》, 제1권, 자작아카데미, p. 61.
  7. ≪논어≫, 『안연』.
  8. 인의예지를 추구하여 올바른 덕성을 기르는 것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한다.
  9.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