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틴 학살

좌파도서관
Constructivist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월 23일 (화) 16:34 판 (각주 일부 추가)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흔히 1940년 4월부터 5월까지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의 NKVD가 폴란드의 군인들과 지식인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군의 학자들과 정당, 단체들은 나치 독일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배경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1939년 9월 16일 폴란드 정부와 최고사령부는 자국민들과 장병들을 버리고 해외로 망명했으며, 전쟁을 이끌어나갈 구심점이 와해됐다. 폴란드 국가의 붕괴로 독일군의 진격은 가속화됐으며, 1939년 10월 6일 코츠크(Kock) 전투를 끝으로 독일은 폴란드의 전 영토를 점령했다.

소련은 1939년 9월 17일 폴란드 정부가 붕괴된 이후 커즌 선 동쪽의 크레시(kresy)[1] 지역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폴란드의 역사학자인 얀 그로스(Jan Gross)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인 소작농들은 폴란드 지주-자본가 정권의 군대에 대항하여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고, 폴란드의 국기인 백적기를 찢어 만든 붉은 깃발로 소련군을 환영했다.<ref>"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의 모든 마을들과 도시들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은 항상 크고 작은 군중들로부터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다. (...) 현지의 주민들은 붉은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만들었으며,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폴란드 국기에서 흰색 부분을 찢어서 붉은 깃발을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은 곳곳에서 환영세례를 받았다. 주민들은 병사들을 포옹했고, 키스를 나눴다. 이들은 심지어 전차들에도 키스했다." - 얀 그로스, ≪외부로부터의 혁명: 소련의 폴란드령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 점령≫ 中. <ref> 폴란드화를 추진하며,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유대인들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에 부역했던 폴란드의 관료들과 경찰들은 사형과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으며, 토지 개혁과 민족어 학교의 육성 등 광범위한 각종 민주적 개혁들이 시행됐다. 소련은 1939년 11월 2일 최고소비에트의 결정서를 통해 커즌 선 동쪽 지역의 수복을 선언했으며, 1921년에 리가 조약으로 폴란드에게 빼앗겼던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를 재통합했다.

소련은 커즌 선 동쪽의 영토들을 수복할 동안 최대 12만 5천명의 폴란드군 장교, 하사관, 군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포로들 중 대부분은 1939년 10월과 11월 사이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나머지는 도로 건설 등에 투입됐다. 1939년 9월 당시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폴란드군 포로들의 숫자는 64,125명으로, 그 중 독일령 폴란드에 거주했던 42,500명의 병사들은 독일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1939년 10월과 11월에 폴란드 서부로 인계됐다. 독일에서 소련으로 인계된 폴란드군 포로 24,700명은 소련 당국의 조치로 즉시 석방되어 고향으로 귀환했으며, 소련 영내에 수감됐던 폴란드군 포로들의 숫자는 1939년 12월에 약 1만 9천여 명으로 감소했다.

나치 독일의 개입에 대한 증거들

서방의 역사 수정주의

각주

  1. 폴란드어로 '변경'을 의미하며,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 지역을 일컫는다. 인구의 대다수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소작농으로서 전간기 내내 폴란드계 지주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