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틴 학살

좌파도서관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흔히 1940년 4월부터 5월까지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의 NKVD가 폴란드의 군인들과 지식인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군의 학자들과 정당, 단체들은 나치 독일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배경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1939년 9월 16일 폴란드 정부와 최고사령부는 자국민들과 장병들을 버리고 해외로 망명했으며, 전쟁을 이끌어나갈 구심점이 와해됐다. 폴란드 국가의 붕괴로 독일군의 진격은 가속화됐으며, 1939년 10월 6일 코츠크(Kock) 전투를 끝으로 독일은 폴란드의 전 영토를 점령했다.

소련은 1939년 9월 17일 폴란드 정부가 붕괴된 이후 커즌 선 동쪽의 크레시(kresy)[1] 지역으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폴란드의 역사학자인 얀 그로스(Jan Gross)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인 소작농들은 폴란드 지주-자본가 정권의 군대에 대항하여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고, 폴란드의 국기인 백적기를 찢어 만든 붉은 깃발로 소련군을 환영했다.[2] 폴란드화를 추진하며,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유대인들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에 부역했던 폴란드의 관료들과 경찰들은 사형과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으며[3], 토지 개혁과 민족어 학교의 육성 등 광범위한 각종 민주적 개혁들이 시행됐다. 소련은 1939년 11월 2일 최고소비에트의 결정서를 통해 커즌 선 동쪽 지역의 수복을 선언했으며, 1921년에 리가 조약으로 폴란드에게 빼앗겼던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를 재통합했다.[4]

소련은 커즌 선 동쪽의 영토들을 수복할 동안 최대 12만 5천명의 폴란드군 장교, 하사관, 군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포로들 중 대부분은 1939년 10월과 11월 사이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나머지는 도로 건설 등에 투입됐다.[5] 1939년 9월 당시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폴란드군 포로들의 숫자는 64,125명으로, 그 중 독일령 폴란드에 거주했던 42,500명의 병사들은 독일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1939년 10월과 11월에 폴란드 서부로 인계됐다. 독일에서 소련으로 인계된 폴란드군 포로 24,700명은 소련 당국의 조치로 즉시 석방되어 고향으로 귀환했으며, 소련 영내에 수감됐던 폴란드군 포로들의 숫자는 1939년 12월에 약 1만 9천여 명으로 감소했다.[6]

1941년 6월 22일, 소련에 대한 나치 독일의 기습 공격으로 독일-소련 전쟁이 발발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전선에서 급격하게 후퇴했고, 독일군에게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대부분 지역들을 상실했다. 상시적으로 바뀌는 일련의 전황에서 상당수의 폴란드군 포로들을 후방으로 안전하게 이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당시 소련의 장교로 복무했던 베토시니코프(Vetoshnikov) 소령은 "스몰렌스크(Smolensk) 부문의 교통 책임자에게 폴란드군 포로들의 후송을 위한 철도 차량의 제공을 요청했음에도 실현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7] 폴란드군 포로들은 소련 영내로 깊숙이 진군하고 있었던 독일군의 손아귀에 넘어갔으며, 언제든지 파시스트 당국에 의해 학살당할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학살의 "발견"

1943년 4월 13일, 나치 독일은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서 폴란드군 장교들의 시신 1만 2천구가 묻힌 대량학살의 흔적들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폴란드의 지식인들과 제3국 출신 기자들에게 학살의 현장을 보여주며, 이른바 ‘카틴 학살’이 1940년 3월에 소련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8] 나치 독일은 또한 '레프 리바크'와 '아브람 브로드닌스키'와 같은 가공의 인물들을 거론하며, 소련의 NKVD에 소속되어 있었던 "유대인 인민위원들"이 폴란드군 장교들을 학살했다고 선동했다.[9][10]

나치 독일의 공작은 성공적이었다. 독일은 소련과 폴란드 망명정부 사이의 갈등을 부채질함으로써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취했고, 연합국 내부에 분열을 야기했다. 전후 국경선 문제[11]로 소련과 대립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독일 군 당국의 참관 하에서 객관적인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립성'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국제적십자단의 파견을 촉구했으며, 1943년 4월 17일에는 공동 조사단의 창설에 관한 나치 독일의 제의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12]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Władysław Sikorski) 폴란드 망명정부 수상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에게 괴벨스가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진술하며 카틴 학살의 책임을 소련에게 돌렸다. 수 차례에 걸친 소련의 해명과 반론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망명정부는 이를 단지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으며, 나치 독일의 선전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소련은 이와 같은 파행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소련은 1943년 4월 21일과 24일에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명의로 처칠에게 보낸 서한들에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행보에 대해 강력한 항의의 의사를 표출했고, 같은 달 25일에는 폴란드 망명정부와 모든 외교적 관계를 파기했다.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괴벨스는 다음과 같이 환호했다.[13]

“이 분열은 독일의 선전이 백 퍼센트 승리했음을 의미하며, 특별히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카틴 사건을 고도의 정치적 문제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음을 뜻한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3년 4월 28일자 일기 中.

나치 독일이 학살의 책임을 소련에게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독일군의 소행으로 보이는 모든 흔적들을 은폐했기 때문이었다. 괴벨스는 1943년 5월 8일 일기에서 "불행하게도, 독일제 총탄이 카틴 숲 학살 매장지에서 발견됐다"고 시인하면서, "(...) 어찌됐건 적들의 귀에 들어가는 경우가 단 하나라도 생긴다면 '카틴 사건'에 대한 모든 선전은 무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고 토로했다.[14] 비록 그는 일기에서 1939년~1941년에 독일이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을 때 독일제 총탄이 소련 영내로 유입되었을 수 있다고 서술했지만,[15] 소련군이 그 당시에 사용했던 권총이 7.62mm 구경의 권총이었고,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가 사용했던 권총이 7.92mm 구경의 권총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16]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다.

소련은 1943년 9월 스몰렌스크와 인근 지역을 해방한 이후 카틴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창설했다.[17] 위원회는 니콜라이 부르덴코(Николай Бурденко) 소련 의학아카데미 의장의 주도 하에 저명한 법의학자들과 성직자, 지식인, 작가들까지 망라했고, 수장인 부르덴코의 이름을 따서 '부르덴코 위원회'로 명명됐다. 부르덴코 위원회는 (1) 폴란드군 장교들에 대한 처형 방식이 소련군 포로들과 폴란드군 민간인들에 대한 처형 방식과 유사하고, (2) 학살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1941년 6월 이후에 발굴되었다는 점과 (3) 독일 군 당국이 1943년 5월에 '볼셰비키'에 의해 폴란드군 포로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표출하는 모든 이들을 학살할 것을 지시한 점을 거론하며, 폴란드군 장교들이 1941년 9월과 10월 사이 나치 독일에 의해 전쟁 도중 살해당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18] 부르덴코 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1944년 1월에 공개됐으며,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사법재판소에 나치 독일의 범죄에 대한 증거로 제시됐다.

카틴 숲 사건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은 폴란드가 1945년에 나치 독일의 압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이후 수그러들었다.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PKWN)가 1944년 7월 21일 루블린에서 수립된 이후 폴란드와 소련의 관계는 우호적인 관계로 선회했다. 그러나 카틴 학살 소련 책임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살아남았으며, 냉전 당시 소련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방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카틴 숲 사건에 대한 괴벨스의 선전을 반공주의적 선전의 소재로 활용했다.

"카틴 학살"의 책임을 소련에게 묻는 경향은 1980년대 말 동구권 붕괴 이후 노골적으로 심화됐다. 폴란드 정부는 1989년에 전면적인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진 이후 학살에 대한 '재조사'를 본격적으로 요구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역시 1990년에 소련이 카틴 숲에서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정부는 카틴 숲 사건에 대한 문서위조작업을 추진하며[19], 위조된 문서들을 바탕으로 스탈린이 폴란드의 독립을 막기 위해 폴란드군 포로들을 처형했다고 주장했다.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2010년에 러시아 방문 도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러시아는 NKVD의 지시로 카틴 숲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며 폴란드와 관계개선을 추진하기 위해 관련 문헌들을 공개했다. [20] 러시아 내외의 양심적인 정당들과 사회단체,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문서의 쪽수와 타이핑 방식의 비일관성을 거론하고, 카틴 학살 소련 책임론이 허위와 날조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서방의 역사수정주의 비판

나치 독일이 카틴 숲에서 학살 현장을 '발견'한 이후 카틴 숲 사건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방과 동유럽의 우익 학자들은 카틴 학살 소련 책임론을 옹호하며, '카틴 학살'이 소련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들은 스탈린에 반대했던 흐루쇼프조차 카틴 학살을 지시한 NKVD 문건을 파기할 정도로 소련이 증거인멸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고 말하거나, 소련 해체 전후에 공개된 비밀문건들이 소련에 의한 폴란드군 포로들의 학살을 증명한다는 궤변을 설파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소련이 학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독일이 조직한 국제위원회의 위원들에게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는 날조를 서슴치 않고 있다.

흐루쇼프 시기 NKVD 문서 파괴 논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은 1992년에 소련이 '카틴 학살'을 지시했다는 비밀문헌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헌들 중에는, 셸레핀이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1959년 3월 3일, 알렉산드르 셸레핀 KGB 의장은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에게 카틴 숲 사건에 관한 NKVD의 문서들을 파기한다는 취지의 서한을 전달했고, 흐루쇼프는 이후 '카틴 학살'과 관련된 비밀문건들을 모두 파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셸레핀이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한 자체에는 당국자들의 서명도, 페이지 숫자도, 정형화된 형식도 기입되어 있지 않다. 카틴 학살 소련 책임론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셸레핀은 NKVD의 문서들을 파기하기에 앞서 "폴란드군 포로들의 처형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결정서"를 언급했다. 문제는 1952년 이전까지 '소련 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쓰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1940년 당시 소련 공산당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로 불렸다. 비록 '소련 공산당'이라는 용어를 시기적인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해도, 중요한 정책적 결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공식적인 서한의 형태를 띠는 이상 대상에 대한 언급은 명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셸레핀 서한'은 그에 대한 고려를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익 역사학자들의 문제제기와 다르게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셸레핀 서한'이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역사적 사실관계가 모순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러시아의 우익 "역사학자"들은 1940년 9월 당시 베리아가 스타로벨스크 지역 NKVD 사령관에게 내린 명령으로 카틴 학살에 관한 NVKD의 비밀문서들이 인멸됐다고 말하면서도, 바로 동일한 문헌이 "셸레핀 서한"에서 파기 대상으로 삼은 NKVD의 문헌들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1940년에 이미 없어져야 했을 "1급 기밀문서"들이 1959년까지도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논리적 일관성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들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기적의 논리가 아니고서야 설명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궤변들로 가득 차 있다.

셸레핀 서한을 둘러싼 논란은 '전문가'를 자임하는 소위 "역사학자"들이 소련에 대한 반공주의적, 반사회주의적 공세를 위해 역사적 진실을 도외시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실상부하게 보여주었다. 이들이 출처로 들고 나오는 모든 문헌들에서 역사적 사실관계의 파탄과 원사료 검증의 부재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동일한 양상은 1990년대뿐만 아니라 2010년대에도 반복되고 있다.

'베리아 서신'의 허위성

소련 해체 이후 서방과 러시아의 학자들이 카틴 학살의 '근거'로서 거론하는 또 다른 문헌으로는 소위 '베리아 서신'이 있다. '베리아 서신'은 (1)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게 폴란드군 포로들의 처형을 요청하는 베리아의 서한과, (2) 베리아의 요구가 기록된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의정서 제13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1급 기밀"로 지정됐다.

그러나 베리아 서신의 문제점은 1990년대부터 일찍이 지적되어 왔다. 소련에서 "1급 기밀" 문서 작성의 정석적인 절차는 타자수의 이름과, 해당 문서를 열람한 모든 사람의 이름, 사본의 숫자, 전송 대상자들의 이름 등을 표기하고, 최종적으로 타자수 전용 테이프로 문서를 봉인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세간에 공개된 이른바 "베리아 서신"에는 "1급 기밀" 문서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제반 요건들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른바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카틴 학살을 '증명' 하는 "1급 기밀" 문서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베리아 서신은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허위와 날조로 점철되어 있다. '베리아 서신'의 이러한 허위성은 2010년 빅토르 일류킨 당시 러시아 공산당 두마 의원에 의해 전면적으로 폭로됐다.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의 사망으로 폴란드와 러시아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고, 카틴 숲 사건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고 있었을 때인 2010년에 익명의 내부고발자가 빅토르 일류킨에게 자신이 소련 기밀문서들에 대한 위조에 관여했다고 제보했다.[21] 해당 내부고발자는 1990년대 옐친 시기에 "베리아 서신 제794-B호"와 1959년에 작성됐다고 알려진 "셸레핀 서한"에 대한 위조작업이 과거 소련 공산당 간부들의 별장으로 이용됐던 나고르노예(Нагорное) 마을에서[22] 클리모프(Klimov) 대령과 옐친의 최측근인 폴토라닌(Poltoranin), 루돌프 피초야(Rodolf Pichoya) 러시아 국립문서고관장, 라고진(G. Ragozin) 러시아 대통령실 부경호실장의 지휘 하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됐다고 진술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막대한 금전을 받는 대가로 문서위조작업에 관여했고, 그 과정에서 소련의 옛 도장들과 인장들을 지급받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소위 카틴 학살 '진상은폐' 설에 대한 비판

결론

각주

  1. 폴란드어로 '변경'을 의미하며,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 지역을 일컫는다. 인구의 대다수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소작농으로서 전간기 내내 폴란드계 지주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2.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의 모든 마을들과 도시들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은 항상 크고 작은 군중들로부터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다. (...) 주민들은 붉은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만들었으며,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폴란드 국기에서 흰색 부분을 찢어서 붉은 깃발을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붉은 군대 병사들은 곳곳에서 환영세례를 받았다. 주민들은 병사들을 포옹했고 키스했다. 이들은 심지어 붉은 군대의 전차들과도 키스를 나눴다." - 얀 그로스, ≪외부로부터의 혁명: 소련의 폴란드령 서우크라이나 · 서벨라루스 점령≫ 中.
  3. Yuri Yemelianov, "The Katyn Mystery", Revolutionary Democracy, Vol. 16., September 2010. 웹사이트에 게재된 글은 다음의 링크를 참고하라. https://www.revolutionarydemocracy.org/rdv16n2/katyn.htm
  4. https://www.great-country.ru/articles/sssr/vov/00099.html
  5. 일례로, 리보프(리비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폴란드군 전쟁포로 14,135명은 리보프-리브네 도로 건설에 동원됐다. 이들은 전쟁 발발 3일차에 우크라이나 동부의 스타로벨스키 수용소로 이송됐고, 이후 소련 영내에서 창설된 안데르스 휘하의 폴란드군에 편입됐다.
  6. А.Ю. Плотников, "Катынь: ложь и правда прошедшей войны", Политическое просветение, № 2(67), 2012. 인터넷 링크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https://www.politpros.com/journal/read/?ID=996&journal=107
  7. 베토시니코프의 진술은 엘라 룰(Ella Rule) 영국 맑스-레닌주의 공산당(CPGB-ML) 부의장이 2002년에 작성한 글인 「카틴 숲 학살」에 인용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노동사회과학연구소(약칭 노사과연)의 번역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lodong.org/board/board.html?mtype=view&page=8&bid=3&num=183&seq=1006&replynum=183&shownum=181&key=&searchword=
  8. Joseph Goebbels, The Goebbels Diaries: 1942~1943, Doubleday & Company Inc., 1948, p. 328.
  9. 엘라 룰, 위의 글.
  10.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 ≪프라우다(Правда)≫는 나치 독일의 주장에 대해 1943년 4월 19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저들의 학살을 향한 모든 진보적 인간성의 분개를 느끼면서도 독일인들은 지금 속기 쉬운 사람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를 자극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그들이 말하길 일만 명의 폴란드 장교들을 살해하는 데 참여했다는 ‘유대인 인민위원들’이라는 완전한 컬렉션을 창조했다. 저런 노련한 사기꾼들에게 레프 리바크(Lev Rybak), 아브람 브로드닌스키(Avraam Brodninsky), 차임 피네베르크(Chaim Fineberg) 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 몇 개쯤 만들어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OGPU의 스몰렌스크 부문’이나 NKVD의 어떤 부문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11.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망명정부 수상은 1943년 2월 25일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소련의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에 대한 '병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1939년 이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이에 대해 같은 해 3월 3일 ≪프라우다(Правда)≫지 사설에서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의 자결권을 존중하지 않고, 1939년 이전에 자행했던 민족억압정책을 반복하려 든다고 지적하며 폴란드 망명정부를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12. Yemelianov, Ibld.
  13. Goebbels, Ibld., p. 346.
  14. Goebbels, Ibld., pp. 353~354.
  15. Goebbels, Ibld., p. 354.
  16. https://www.historynet.com/red-army-riflemen-1941-45/?f
  17. Yemelianov, Ibld.
  18. 부르덴코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다음의 인터넷 링크를 참고하라. https://soviethistory.msu.edu/1943-2/katyn-forest-massacre/katyn-forest-massacre-texts/report-of-soviet-special-commission/
  19. https://katynmassakern.blogspot.com/2010/07/katyn-dionis-kaptars-interview-with.html
  20. http://news.bbc.co.uk/2/hi/europe/8649435.stm
  21. https://katynmassakern.blogspot.com/2010/07/katyn-closed-package-no1-was-forged.html
  22. 1996년 이후에는 자라치예 마을에서 문서위조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