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을 옹호하며/제 12절 ~ 제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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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나은세상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4일 (수) 15:44 판 (새 문서: {{책자 | 번호 = 1 | 제목 =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 장 이름 = 제 12절 ~ 제 15절 | 이전 장 = 10월 혁명을 옹호하며/제 9절 ~ 제 11절 | 다음 장 =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 내용 = '''10월 혁명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 나의 반대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10월의 모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내용이 알차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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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을 옹호하며
제 12절 ~ 제 15절

10월 혁명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의 반대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10월의 모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내용이 알차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쩌면 ‘모험’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많은 희생에 비해 얻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완전히 정당하다. 혁명 전야에 볼세비키들이 약속한 휘황찬란한 것들은 성취되었는가?”

이 가상의 반대자에게 대답하기 전에 이 질문은 전혀 새롭지 않다는 점을 언급하고자한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10월 혁명이 승리하자마자 곧바로 제기되었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뻬쩨르부르그에 있었던 프랑스의 언론인 끌라 아네(Clad Anet)는 1917년 10월 27일에 이미 이렇게 기사를 썼다:

“최대강령주의자들(프랑스인들은 당시 볼세비키들을 이렇게 불렀다)은 권력을 잡았으며 위대한 날이 당도했다. 마침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에게 약속되었던 사회주의 낙원이 실현되는 것을 보겠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멋진 모험이다! 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글을 계속 써내려 갔다. 혁명에 대한 이 아이러니컬한 경례에는 혁명에 진정한 증오심이 깊이 배어있다! 동궁이 점령된 바로 그날 아침 이 반동 언론인은 낙원으로 가는 입장권을 서둘러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혁명 이후 지금까지 15년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도 소련은 모두가 복지를 누리는 낙원과는 전혀 닮은 점이 없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의 적들은 악의에 찬 기쁨을 은근히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왜 혁명을 구태여 일으켰으며 왜 그 허다한 희생을 치렀는가?

물론 소비에트 정권의 모순, 난관, 오류, 부족함 등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들을 말이나 글로 결코 숨기지 않았다. 보수정치와 달리 혁명정치는 은폐와 기만을 배격한다. 이것을 나는 그 동안 믿어왔고 지금도 믿고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최고의 원칙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창조적인 활동과 마찬가지로 비판에서도 안목과 전망이 필요하다. 특히 거대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관주의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 변덕에야 시간이 필요할 리가 없다. 그러나 과업이나 임무에는 그에 해당되는 시간이 주어져야한다. 15년! 한 인간의 일생에서 이 시간은 얼마나 긴가! 이 시간동안 우리 세대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무덤으로 갔으며 남아있는 자들은 수많은 새치를 머리에 이고 있다. 그러나 이 15년의 세월은 한 인민의 삶에서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시간인가! 그리고 역사의 시계에서는 단 일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중세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자신을 확립하고 과학과 기술의 수준을 높이고 철도를 건설하고 전기를 이용하는데 수백 년이 걸렸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인류는 이 자본주의 때문에 전쟁과 위기의 지옥으로 밀쳐졌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주의의 적들은 사회주의에게 모든 현대적인 개선을 갖춘 지구상의 낙원을 건설하는데 15년의 시간 여유 밖에 주지 않는다. 15년만에 기적을 이루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과정들은 이에 걸 맞는 규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사회가 성경에 나오는 낙원과 같을 지는 모르겠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소련이 아직도 사회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이행기를 경과하고 있으며 온갖 모순들을 가득 가지고 있다. 또한 과거의 후진성을 물려받아 짓눌려 있으며 더욱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적대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10월 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원칙들을 천명했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이 새로운 사회 실현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에디슨이 맨 처음 만든 전구는 성능이 형편없었다. 우리는 미래를 조망하는 방법을 배워야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비오듯 쏟아지는 불행은 얼마나 처참한가! 혁명의 결과는 그 희생을 정당화시킬까?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결실이 없는 허망한 질문에 불과하며 철저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마치 역사 과정이 대차대조표로 계산될 수 있는 모양이다! 인간 생존의 난관과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독일의 시인 하이네(Heine)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고 바보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한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이 우울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태어났으며 자식을 낳고 있다. 예를 찾을 수 없는 전세계적 위기가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살율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인간은 결코 자살에 의존하지 않는다. 짐이 너무 무거워 참을 수 없을 때는 혁명으로 살길을 모색한다.

더욱이 사회의 격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대개의 경우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자와 인민을 총알 밥이 되게 만든 작자들이다. 아니면 최소한 이 전쟁을 미화하거나 인정한 작자들이다. 이제 우리가 질문할 차례이다: “전쟁은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이며 가르쳐준 것이 무엇인가?”

프랑스 대혁명에 반대하는 11번째 팜플렛에서 반동 역사가 이뽈리트 떼느(Hippolyte Taine)는 악의에 찬 기쁨으로 자꼬벵 독재시기 이후에 겪은 프랑스 인민의 고통들을 묘사하고 있다. 혁명으로 가장 고통받은 계층은 도시의 최하층 계급들로서 이들은 “평민(쌍뀔로뜨)”으로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이제 이들과 이들의 부인들은 추운 밤 내내 생필품 줄에 서서 기다리다 배급도 받지 못한 채 빈손으로 난로 불이 다 꺼진 집으로 돌아왔다. 혁명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는 해에 빠리는 혁명 전보다 더 빈곤했다. 떼느는 꼼꼼히 선택하여 자기 멋대로 편집한 사실들을 가지고 혁명에 파괴적인 판결을 내린다. 평민들은 독재자가 되기를 원했고 스스로 고통을 자초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보다 더 무미건조한 도덕적 설교는 없을 것이다. 첫째, 혁명이 나라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면 인민을 혁명으로 몰아간 지배계급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둘째, 프랑스 대혁명은 빵집 앞에 배고픈 자들의 줄만 만들지 않았다. 현대 프랑스 전체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현대 문명 전체는 프랑스 혁명의 목욕 세례를 받고 탄생했다!

지난 세기 60년대 미국 남북전쟁의 과정에서 5만 명이 살해되었다. 이 희생들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미국의 노예소유자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행진했던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다!” 흑인들과 영국 노동계급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지.” 그리고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는 조금의 의심도 가질 수 없다. 남북전쟁을 통해 무한한 실용적 진취성, 합리화된 기술, 경제적 활력 등으로 무장한 현대 미국이 탄생했다. 미국의 이러한 업적들로부터 인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10월 혁명은 이전의 어떤 혁명보다 사회의 소유관계에 깊이 침투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결과를 드러내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일반적 방향은 벌써 명확하게 이해된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본가들의 비난에 대해 머리를 숙이거나 변명을 늘어놓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인류 발전의 관점에서 이 새로운 체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렇게 질문해야한다: “사회 진보는 어떻게 표현되고 측정될 수 있는가?”


10월 혁명에 대한 결산 가장 깊고 가장 객관적이며 가장 논란의 여지가 없는 기준은 이렇게 말한다: 진보는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성장으로 측정된다. 이 각도에서 보면 10월 혁명에 대한 평가는 이미 경험적으로 내려졌다. 사회주의 생산조직 원리는 역사상 최초로 짧은 시간에 전대미문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입증시켰다.

정교하지 않은 지수로 표현된 러시아 산업발전의 곡선은 다음과 같다. 전쟁 전의 1913년을 기준 지수인 100으로 잡으면 내전이 최고조에 달한 1920년은 산업의 최저점으로 지수가 25 밖에 되지 않는다. 즉 전쟁 전 생산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1925년에 이 지수는 75 즉 전쟁 전 생산의 4분의 3이었다. 1929년에는 약 200, 1932년에는 300이다. 즉 전쟁 전보다 산업생산이 3배나 되었다.

국제 지수와 비교하면 이 상황은 더욱 놀랍다. 1925년에서 1932년까지 독일의 산업생산은 1.5배 하락했으며 미국의 경우 2배가 하락했다. 반면 소련에서는 4배가 증가했다. 이 수치들 자체가 사회주의 생산의 우월성을 입증한다.

나는 소련 경제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부인하거나 은폐할 의도가 없다. 산업지수의 결과들은 농업의 불리한 발전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분야는 아직까지 사회주의 생산 방식으로 상승하지 못했으며 동시에 제대로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강제로 집단화가 되었다. 기술적이고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관료적으로 농업집단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시간 관계상 이 강연에서 다룰 수는 없다.

위에서 제시한 지수들은 중요한 제한 조건이 또 하나 필요하다. 소련의 공업화의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나름대로 놀라운 결과들은 경제 분야들의 상호 적응, 역동적인 균형 그리고 이 결과 생산능력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한다. 이 점에서는 커다란 난관과 후퇴가 불가피하다. 제우스신의 머리에서 미네르바 여신이 또는 바다의 거품에서 비너스 여신이 탄생하는 것처럼 5개년 계획으로부터 완성된 사회주의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가 제대로 건설되려면 수십 년간의 지속적 작업, 오류, 교정, 재조직 과정이 필요하다. 더욱이 사회주의 건설은 그 본성상 국제적 차원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지금까지 성취된 결과들에 대한 가장 유리한 결산조차도 예비 계산의 부정확함, 계획의 결함, 방향의 오류 등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회주의 방식의 도움으로 과거에 이룩되지 못한 수준으로 집단적 노동 생산성이 향상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경험적으로도 확고히 증명되었다. 세계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이 성과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보아서 10월 혁명이 러시아를 문명의 몰락으로 인도했다는 불평들에 대해서는 시간을 할애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이것들은 심기가 불편한 지배계급의 저택과 살롱에서 나오는 소리에 불과하다. 노동계급의 혁명으로 타도된 중세적 부르주아 “문명”은 딸미(Talmi)식으로 장식된 야만상태에 불과하다. 이것은 러시아 인민이 누릴 수 없었지만 그 동안 존재했던 인류의 보물창고에 새로운 것을 거의 부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동 망명가들에 의해 그렇게도 한탄되고 있는 이 찬란했던 러시아 문명에 대해서조차 질문을 정확히 해야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문명이 파괴되었는가? 단 한가지 의미 밖에 없다: 문명의 보물창고에 대한 극소수의 독점이 폐기되었다. 구 러시아 문명의 모든 가치 있는 문화유산들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볼세비키 “흉노족”은 정신적 업적이나 예술 창조물 어느 것도 파괴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이들은 면밀하게 인간 창조력의 기념물들을 수집하여 모범적으로 진열했다. 왕정, 귀족,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는 지금 역사 박물관의 문화가 되었다.

인민은 이 박물관들을 열심히 방문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지는 않는다. 이들은 배우고 건설한다. 10월 혁명은 러시아 민족과 짜르체제 러시아에서 살고 있던 수십 개 민족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가르쳤다.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혁명 후의 문명은 과거 러시아 매음굴 문명 전체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10월 혁명은 선택된 극소수가 아니라 인민 모두를 위한 새로운 문명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것을 전세계 대중은 느끼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짜르 체제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만큼이나 열렬하게 소련에 공감을 보내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의 언어는 사건들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것 뿐 아니라 사건들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도구이다. 이것은 우연적이고 일화적이며 인공적인 것을 걸러내고 핵심적이고 특징적이며 아주 중요한 것들을 흡수한다. 문명국 언어들이 러시아 역사의 두 시대를 구별하는 현상을 세밀히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귀족 문화는 짜르, 코작, 유태인 학살, 나가이카(nagaika) 등과 같은 야만적인 어휘들을 유행시켰다. 여러분들은 이 단어들과 그 의미들을 알고 있다. 10월 혁명은 세계의 언어들에 볼세비키, 소비에트, 콜호즈(kolkhoz), 고스플란(Gosplan), 피아틸레카(Piatileka) 등을 도입시켰다. 여기서 실용 언어가 역사를 판결하는 대법원의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가!

즉시 측정하기는 가장 어렵지만 가장 의미심장한 혁명의 의미는 혁명이 인민의 성격을 형성하고 단련시킨다는 데에 있다. 러시아 인민이 느리고 수동적이며 우울하고 신비스럽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있으며 우연히 생긴 생각도 아니다. 과거 역사에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방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에 의해 새로 형성된 러시아 인민의 성격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삶을 경험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청년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청년은 예민하고 서정적이고 너무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는데 이후에 더 강인하고 더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강력한 도덕적 자극을 받아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혁명에 의해 한 나라의 발전에도 이러한 도덕적 변화가 일어난다.

전제에 대한 2월 봉기, 귀족에 대한 투쟁,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투쟁, 평화와 토지와 민족적 평등을 위한 투쟁, 10월 봉기, 부르주아 계급과 그 지지 정당들의 타도, 5천 마일 전선에서 벌어진 3년간의 내전, 국경 봉쇄와 기아와 고통과 유행병의 수년, 긴장된 경제재건과 새로운 난관들과 과거의 청산들로 이루어진 수년 —- 이것들은 힘들지만 훌륭한 학교가 된다. 무거운 망치는 유리를 박살내지만 강철을 벼린다. 혁명의 망치는 인민의 성격에 강철과 같은 강인함을 부여한다.

혁명 직후 분노에 찬 짜르의 장군 잘외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짐꾼이나 경비원이 갑자기 대법원 판사가 된다. 병원의 조수가 병원장이 된다. 이발사가 관리가 된다. 상병이 총사령관이 된다. 일용노동자가 시장이 된다. 자물통 만드는 자가 공장주가 된다.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상병이 장군을 패배시켰다. 전에 일용노동자였던 시장이 구 관료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마차에 윤활유를 치는 일꾼이 수송체계를 정상화시켰다. 자물통 만드는 사람이 공업장비를 작동시켰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이들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믿지 않으려고 애를 써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혁명의 시기 내내 소련의 인민 대중은 대단한 인내심과 끈기를 발휘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외국인들은 과거의 습관에 따라 러시아 인민의 “수동적 성격”을 들먹인다.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인가! 혁명 대중은 궁핍을 참을성 있게 견디지만 결코 수동적으로 견디지는 않는다. 자신의 손으로 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고 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결심했다. 이 참을성 있는 대중에게 적대 계급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해 보아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큰 코 다칠 것이니까.


10월 혁명과 이 혁명의 역사적 위치 강연을 마치기에 앞서 러시아 역사 뿐 아니라 세계역사에서 10월 혁명의 위치를 확인해보겠다. 1917년 8개월 동안 두 역사의 곡선이 교차한다. 지난 세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수행된 거대한 투쟁들이 뒤늦게 러시아에 2월 혁명으로 메아리쳤다. 2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10월 혁명은 노동계급의 권력을 선포하고 개막했다. 러시아에서 세계 자본주의는 처음으로 거대한 패배를 맛보았다.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졌다. 그러나 끊어진 것은 고리 뿐이 아니라 사슬이었다.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이미 시효가 지났다. 그런데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능력과 부의 수준을 상승시켜야할 기본적 기능을 자본주의는 이미 상실했다. 인류는 자신이 도달한 수준에서 정체할 수 없다. 생산력의 강력한 증가와 건실하고 계획에 입각한 사회주의 생산 및 분배 조직만이 모든 인류에게 품위 있는 삶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운영하는 경제에 대해 귀중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이 자유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인간은 인생 대부분을 육체 노동에 바치도록 더 이상 강요되지 않는다. 둘째, 그는 자신의 등뒤에서 작동하는 맹목적이고 알 수 없는 시장의 법칙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계획에 따라 콤파스를 손에 들고 자신의 경제를 자유롭게 운영한다. 사회 구조를 엑스선으로 철저히 찍고 그것의 모든 비밀을 파헤치고 그것의 모든 기능을 인간의 이성과 집단적 의지에 복종시키는 것이 이제 경제운영의 목표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인류 역사 발전의 새로운 단계임에 틀림없다. 맨 먼저 돌도끼로 무장한 인류의 조상에게 자연은 비밀스럽고 적대적인 세력의 음모를 의미했다. 이때 이후 실용 기술과 함께 자연과학은 자연의 가장 깊숙한 비밀도 전부 파헤쳤다. 전기 에너지를 통해 물리학자는 원자의 핵을 판단한다. 과학이 연금술사들의 과업을 쉽게 해결하여 거름을 금으로 금을 거름으로 변화시킬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 자연이라는 악마들과 복수의 여신들이 판치던 곳에서 이제 인간의 근면한 의지가 좀더 용기 있게 판을 친다.

그러나 자연과 열심히 싸워나가면서 인간은 마치 벌이나 개미처럼 맹목적으로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천천히 그리고 전진과 지체를 반복하면서 그는 인간사회의 문제들에 접근했다.

종교개혁은 죽은 자들의 전통이 지배한 종교의 영역에서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첫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를 통해 교회에도 비판적 사고가 발전하고 이것이 국가로 이전되었다. 절대주의와 중세 계급들과의 투쟁에서 탄생한 인민주권과 인간적 시민적 권리 사상은 더욱 강해졌다. 이렇게 해서 의회체제가 등장했다. 비판적 사고는 정부 행정 영역에 침투했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합리주의는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의 최상의 업적이었다.

그러나 자연과 국가 사이에는 경제생활이 존재한다. 과학 기술은 흙, 물, 불, 공기 등 4원소의 압제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곧 자신이 압제를 행하면서 인간을 가두었다. 인간은 자연의 노예 상태를 면했으나 기계의 노예 그리고 더 나쁘게 수요와 공급 법칙의 노예가 되었다. 대양의 바닥까지 잠수하고 성층권까지 올라가고 지구의 정반대에서 보이지 않는 전파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이 자랑스럽고 용감한 자연의 지배자는 자기 경제의 맹목적 힘의 노예가 되었다. 현재 세계 경제의 위기는 이 사실을 특히 비극적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 법칙을 합리적 계획으로 대체하고 생산력을 인류의 필요에 조화롭고 순종적으로 기여하도록 강제하는 것 — 이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과업이다. 오직 이 새로운 사회적 기초를 통해서만 선택받은 극소수가 아닌 모든 남녀 시민이 자신의 피곤한 팔다리를 뻗고 사상의 영역에서 완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류의 미래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종착역은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이 호모사피엔스의 최후의 최고의 대표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는 결코 완성되지 못했다. 생물적으로는 너무 일찍 태어나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하고 생각도 유약하며 새로운 유기적 균형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류는 두 번 이상 마치 산맥의 정상처럼 동시대인 위에 우뚝 솟은 생각과 행동의 거인들을 배출해냈다.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다윈, 베토벤, 괴테, 맑스, 에디슨, 레닌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거인들은 왜 이리도 드물게 배출되었는가? 무엇보다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 출신이기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민의 억압받은 심연 깊숙이 천재성의 불똥은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지도 못하고 질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창조, 개발, 교육 과정들은 이론과 실천에 의해 인식되고 의식과 의지에 종속되지 않은 채 우연에 의해 지배되어왔기 때문이다.

인류학, 생물학, 생리학, 심리학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최상의 수준으로 완성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게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축적해 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마술 같은 손으로 창조된 정신분석학은 시적으로 “영혼”이라고 부르는 우물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무엇을 밝혔는가? 우리의 의식은 암흑 같은 심령의 힘이 작용해서 이루어진 아주 하잘 것 없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식한 잠수부들이 대양의 바닥까지 내려가 신비로운 물고기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는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의 심령의 근원의 바닥까지 내려가 영혼의 가장 신비로운 원동력을 규명하여 이것을 이성과 의지에 종속시켜야한다.

일단 자기가 창조한 사회의 무질서한 힘을 정복한 후,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화학자의 절굿공이와 증류기의 실험 대상으로 올려놓을 것이다. 최초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험 재료 또는 기껏해야 신체적 심리적 반(半)완성품으로 간주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필요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의 비약이 될 것이다. 조화의 부족과 온갖 모순에 시달리는 지금의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그리고 더 행복한 족속이 될 길을 열어 재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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