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을 옹호하며/제 9절 ~ 제 11절

좌파도서관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제 9절 ~ 제 11절

연속혁명 이렇게 후진국의 노동계급 혁명은 그 신비의 베일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10월 혁명이 발발하기 오래 전에 이미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혁명의 진전과 젊은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사적 역할을 예상하고 있었다. 1905년에 나온 나의 저서 [평가와 전망]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일부 인용하겠다:

“경제적 후진국의 노동계급은 선진국 노동계급보다 더 일찍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자유 부르주아 정책이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기회를 갖기도 전에 노동계급은 혁명의 성공과 함께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 혁명은 이 새로운 사태의 조건을 창출하고 있다.”

“농민의 가장 기초적인 혁명적 이해는 … 혁명 전체 즉 노동계급의 운명과 밀접히 결부되어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농민에게 해방의 계급으로 등장할 것이다.”

“나라 전체의 혁명 대표로서 그리고 절대주의와 농노제의 야만에 대항하는 인민 투쟁의 인정받은 지도자인 노동계급은 정권을 장악한다.”

“노동계급 정권은 애초부터 농업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이 문제에 러시아의 절대 다수 대중의 운명이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오늘 내가 강연하는 10월 혁명에 대한 이론이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사태가 다 지나간 후 압력을 받아 나온 것도 아니라는 증거를 위의 인용문들이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 예측을 담은 위의 내용들은 10월 혁명이 발발하기 오래 전에 이미 제출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론은 사태의 과정을 예측하고 여기에 목적 의식적 영향을 미칠 때만 가치가 있다. 사회적 역사적 지향의 무기로 맑스주의가 한없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연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위에서 인용한 문장들에 덧붙여 좀더 풍부한 내용들을 제시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따라서 1905년부터 진행된 나의 활동을 간단히 소개한 것에 만족하겠다.

당면한 임무의 측면에서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 그러나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반혁명적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을 통해서만 혁명은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승리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강령에 혁명을 제한시키지 않는다. 계속 전진하여 사회주의 강령을 실현한다.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첫 단계이다.

이것이 1905년 내가 정식화한 연속혁명론이며 그때 이래로 “트로츠키주의”라는 이름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위의 내용은 이 이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론의 나머지 부분을 이렇게 언급하는 것이 아주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생산력은 일국적 한계를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섰다. 일국의 국경 안에서는 사회주의체제의 현실성이 상실된다. 고립된 노동자국가의 경제적 성과가 아무리 대단해도 “일국 사회주의” 강령은 소부르주아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그리고 이후 세계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만이 진정 조화로운 사회주의체제의 장이 될 수 있다.”

혁명의 진행에 의해 이 이론의 올바름이 입증된 지금 이 이론을 폐기할 이유는 더욱 없다.


10월 혁명의 전제조건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파시스트 저술가 말라파르테의 주장은 기억할 가치가 전혀 없다. 그는 전략으로부터 독립적이며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봉기에 대한 기술적 처방(전술)을 내가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이 형편없는 쿠데타 이론가의 이름이 쿠데타의 귀재와 다른 것이 다행스럽다. 어느 누구도 말라파르테를 보나빠르뜨와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7년 11월 7일의 무장봉기가 아니었다면 소비에트체제는 지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봉기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다. 10월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일련의 역사적 전제조건들이 필요했다:

“귀족, 왕정, 관료집단 등 구 지배계층의 부패. 인민 대중에 토대를 두지 않은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허약성. 농업문제의 혁명적 성격. 피억압 민족문제의 혁명적 성격. 노동계급에게 가해진 상당한 사회적 책무. 이러한 유기적 전제조건에 매우 중요한 관련 조건들을 부가해야 한다. 1905년 혁명은 위대한 학교였으며 레닌의 말을 빌리면 1917년 혁명의 ‘총 예행연습’이었다. 혁명 시기에 노동계급의 대체할 수 없는 공동전선체인 소비에트가 1905년 처음으로 수립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모든 모순들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리고 후진적 대중을 마비상태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재앙이 준비되었다.”


볼세비키당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은 혁명 발발 당시 충분히 존재했는데 노동계급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아직도 부족했다. 이 승리를 위해서는 볼세비키당의 존재라는 한가지 조건이 더 필요했다.

혁명의 조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는데 이 순서는 논리적 연관에 따른 것이다. 볼세비키당이 가장 덜 중요해서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부르주아는 정권을 장악할 수 있으며 실제로 자신이 전혀 참여하지 않은 투쟁의 결과 두 번 이상 권력을 잡았다. 권력장악을 위해 대단히 좋은 기관을 이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 대중은 입장이 다르다. 이들은 오랫동안 주는 법은 알았어도 갖는 법은 알지 못했다. 이들은 노동에 종사한다. 그리고 한계에 이를 때까지 참고 견딘다. 희망한다. 그리고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들고일어나 투쟁한다. 그리고 죽는다. 다른 세력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고 배반당한다. 절망에 빠져 고개를 늘어뜨린 후 다시 노동에 종사한다. 이것이 모든 사회체제에서 이어져온 인민 대중의 역사이다. 자기 손에 권력을 확고히 잡으려면 노동계급은 정당이 있어야한다. 이 정당은 사상의 명확성과 혁명적 결의에서 다른 정당들을 훨씬 추월한다.

볼세비키당은 두 번 이상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정당이라고 묘사된 바 있다. 이 평가는 완전히 정당하다. 이 정당은 러시아 현대역사의 역동성을 있는 그대로 몸에 지니고 있는 살아있는 정당이다. 짜르체제의 타도는 오랫동안 경제와 문화 발전의 필요조건이라고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 임무를 완수할 충분한 역량이 없었다. 자본가 계급은 혁명을 두려워했다. 지식인들은 농민이 봉기하도록 선동하였다. 자신의 고통과 목적을 일반화할 능력이 없었던 농민은 지식인들의 호소를 듣는 중 마는 둥 했다. 그러자 지식인들은 폭탄으로 스스로 무장했다. 이 투쟁에 한 세대 전체가 허비되었다.

1887년 3월 1일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는 거대한 테러 음모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한 암살 기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와 다른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폭탄 제조가 혁명 계급을 대신했는데 결국 처절히 실패했다. 가장 영웅적인 지식인도 대중이 없으면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후에 레닌이 된 울리아노프의 동생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인민주의자들의 투쟁과 정치적 결론을 직접 느끼면서 성장했다. 아주 어린 청년기부터 그는 맑스주의의 반석 위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노동계급에게 얼굴을 향했다. 잠시도 농촌 마을에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는 노동자들을 통해 농민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았다. 혁명 선배들로부터 자기희생의 능력과 끝을 보려는 적극성을 물려받은 그는 어린 나이부터 새로운 지식인과 선진노동자 세대의 혁명 스승이 되었다. 파업, 시가전, 감옥, 유형지 등에서 노동자들은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절대주의의 암흑기에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밝혀줄 맑스주의의 등불이 필요했다. 한편 1883년 해외 망명자들 가운데에서 최초의 맑스주의 그룹이 등장했다. 1889년 비밀회합에서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이 선포되었다. 당시 우리는 모두 서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 1903년 볼세비키와 멘세비키가 분열했고 1912년 볼세비키 분파는 마침내 독자적인 정당이 되었다.

1905년부터 1917년까지 12년간 일어난 사건들과 투쟁들을 통해 볼세비키들은 사회의 계급 관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들은 주도성과 복종을 동시에 실천할 능력이 있는 그룹들을 교육시켰다. 이들의 혁명적 행동의 규율은 사상의 통일, 공동투쟁의 전통, 단련된 지도부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것이 1917년 볼세비키당의 성격이었다. 공식 “여론”과 지식인 언론은 종이호랑이의 포효로 이 정당을 경멸했다. 이에 아랑곳 할 이유가 없었던 볼세비키들은 대중운동에 자신을 적응시켰다. 노동자들이 밀집한 공장과 병사들이 밀집한 연대를 확실히 장악했다. 더욱 많은 농민 대중이 이들에게 다가왔다. “국민”이 특권층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인민 대다수를 의미한다면 볼세비키당은 1917년에 러시아의 진정한 국민정당이 되었다.

1917년 9월 레닌은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그는 “위기는 무르익었다, 봉기의 시간이 다가왔다”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옳았다. 전쟁, 토지, 자유의 문제에 직면한 지배계급은 빠져 나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확실히 이성을 상실했다. 소위 민주정당들이라는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부르주아 계급과 봉건소유 계급들에게 양보와 화해를 제시했다. 이 결과 이들은 그나마 대중이 자신들에게 가졌던 신뢰를 몽땅 잃어버렸다. 각성한 군대는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전투를 계속 하기를 거부했다. 민주정당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농민은 지주들을 영지에서 몰아내 버렸다. 변방의 피억압 민족들은 뻬쩨르부르그 관료들에 저항해 들고 일어섰다. 가장 중요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는 다수파가 되었다. 궤양은 확실히 도졌다. 수술 칼로 이것을 잘라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만 봉기는 가능했다. 그리고 불가피했다. 그러나 봉기를 장난 삼아 할 수는 없다. 수술 칼을 가지고 정신없이 설쳐대는 외과의사에게 불행이 있을 지어다! 봉기는 기예이다. 나름의 법칙과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

볼세비키당은 냉철한 계산과 열정적인 결의로 10월 혁명의 현실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희생자가 거의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 승리한 소비에트를 통해 볼세비키당은 지구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의 지도세력이 되었다.

지금 청중 여러분 대다수는 아마 1917년의 정세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좋은 일이다. 젊은 세대 앞에는 언제나 쉽지는 않겠지만 흥미로운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청중 가운데 구세대는 볼세비키당의 권력 장악이 어떤 반응을 촉발시켰는지 잘 기억할 것이다. 신기한 사건, 오해로 일어난 사건, 스캔들 그리고 대부분 여명의 햇살과 함께 사라질 악몽으로 받아들였다. 이 정권은 24시간, 일주일, 한달, 아니면 일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기한은 끊임없이 연장되었다. 전세계 지배자들 모두는 최초의 노동자국가에 대해 무장했다. 내전이 부추겨지고 군사적 개입이 다시 또다시 반복되었다. 국경이 봉쇄되었다. 이렇게 일년 일년이 지나갔다. 이제 역사는 소비에트 권력을 15년째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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