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을 옹호하며/제 5절 ~ 제 8절

좌파도서관
10월 혁명을 옹호하며
제 5절 ~ 제 8절

불균등 발전 법칙

짜르의 러시아처럼 후진국에서 역사상 최초로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실은 언뜻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역사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측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예측되었다. 더욱이 이 사건에 대한 예측을 토대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전략을 수립했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이렇다: 러시아는 후진국이지만 세계경제의 일부일 뿐이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이 의미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비밀을 간략히 이렇게 표현했다: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사슬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졌다.”

거칠게 설명하면 이렇다: 제국주의 세계체제의 모순 때문에 폭발한 제 1차 세계대전은 발전 단계가 각기 다른 나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으나 참전국들 모두에게 똑같이 커다란 희생을 강요했다. 가장 후진적인 국가들에게 전쟁의 부담은 가장 무거웠다. 이 것은 당연하다. 러시아는 맨 먼저 전쟁터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을 그만두기 위해 러시아 인민은 지배계급을 타도해야했다. 이렇게 전쟁의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졌다.

더욱이 전쟁은 지진과 같이 외부에서 발생하는 재앙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가 말했듯이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장일 뿐이다. 지난 대전을 통해 “평화”시 제국주의 체제의 주요 경향들은 좀더 거칠게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일반적 생산력 수준이 높을수록, 세계시장의 경쟁이 더 치열할수록, 갈등이 더 격화되고 군비경쟁이 더 미친 듯이 전개될수록 허약한 참전국들은 그만큼 견디기가 더 어려웠다. 전후 일련의 붕괴과정이 후진국에서 시작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사슬은 언제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예외적으로 불리한 상황의 결과 제국주의의 군사 개입이 성공하거나 소련 정부가 회복할 수 없는 오류를 범해 자본주의가 다시 비교할 수 없이 넓어진 소련의 영토에 등장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자본주의의 역사적 부적합성은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1917년의 폭발과 같은 모순을 또 다시 연출할 것이다. 러시아 사회가 뱃속에서 10월 혁명을 잉태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전술도 그것을 탄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혁명정당은 제왕절개에 의존하는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다.

나의 설명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는 후진적 자본주의와 궁핍한 농민들 위에 기생적 귀족계급과 썩어 가는 왕정이 군림했다. 이 나라에서 왜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 가를 당신은 대체로 적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사슬과 그 가장 약한 고리에 대한 직유에서 진짜 비밀의 열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후진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나라와 문명이 썩어 들어가서 구 지배계급이 붕괴했으나 진보적인 계승 세력이 없었던 예를 역사는 몇 번 이상 보여주었다. 구 러시아의 붕괴는 언뜻 보기에 이 나라를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것처럼 보인다.”

이 반박은 대단히 흥미롭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박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차라리 내적 균형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선 이 주장은 역사적 후진성을 과장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물론 나이에 따라 비슷하게 발달한다. 정상적으로 성장한 5세의 아동들은 대체로 체중, 신장, 내부 장기 등이 비슷하게 발달한다. 그러나 신체적 구조나 현상과는 달리 집단적 개인적 심리 현상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대단한 적응력, 신축성, 유연성을 보인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원숭이에 비해 월등하다. 적응력과 신축성을 갖춘 심리는 생물적 유기체에 비해 소위 사회적 “유기체”에 대단한 내부 구조적 다양성을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민족과 국가 특히 자본주의 민족과 국가의 발전에는 일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유사성과 규칙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각기 다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정반대인 문화적 발전 단계들이 서로 접근하고 뒤섞인다.

결합발전의 법칙

역사적 후진성은 상대적 개념에 불과하다. 후진국과 선진국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선진국은 후진국을 압박한다. 후진국은 선진국을 따라잡고 기술과 과학 등을 빌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결과 결합발전이 이루어진다: 후진성이 세계적 차원의 최고의 기술 및 사상과 결합된다. 마침내 후진국은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추월하도록 강제된다.

개인의 심리에서 “열등의식이 극복”되듯이 사회에서도 집단의식의 신축성은 특정 조건 속에서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0월 혁명은 러시아 인민이 자신의 경제적 문화적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웅적인 수단이었다.

이제 너무 추상적인 역사적 철학적 일반화를 피하고 구체적인 형태 즉 살아 움직이는 경제 현실의 단면도로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자.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러시아의 공업은 농업에 비해서 아주 하잘 것 없었다. 여기서 러시아의 후진성은 가장 명백히 드러났다. 대체로 이것은 나라의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그나마 짜르체제의 러시아가 가장 건강했을 때 이 나라의 전체 소득은 미국에 비해 8배에서 10배나 낮았다. “충분히”라는 표현이 후진성과 관련해서 사용될 수 있다면 이 수치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결합발전 법칙은 경제의 단순하고 복잡한 현상 모두에서 매순간 표현되었다. 자동차 도로가 거의 없는 러시아는 곧바로 철도를 건설하도록 강요되었다. 유럽의 수공업 및 공장제 수공업(매뉴펙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는 곧바로 기계화 생산체제로 들어섰다. 중간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 후진국의 발전 방식이다.

러시아는 농업 부문이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공업 부문은 규모 면은 아니더라도 유형 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으며 일부 측면에서는 이 수준마저 추월했다. 1천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기업은 미국의 경우 공업노동자 전체 수의 18% 미만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수치는 41%가 넘었다. 이 사실은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과 좀처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후진성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보완하고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모순은 계급구조에도 드러났다. 유럽의 금융자본은 러시아 경제를 가속도로 공업화시켰다. 공업자본은 즉시 자본주의적 대규모성과 반(反)인민성을 드러냈다. 더욱이 외국인 주주들은 러시아 밖에서 살고 있었다. 반면 노동자들은 당연히 러시아인이었다. 국내에 뿌리가 없는 몇 안되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인민의 폐부에 깊이 뿌리 내린 상대적으로 강력한 노동계급이 등장했다.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바쁜 후진국 러시아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보수주의 장치를 구축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혁명성을 촉진시켰다. 유럽 아니 전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국가는 자본주의가 가장 오래된 영국이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보수주의가 가장 빈약한 나라는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젊고, 건강하고 결의에 찬 러시아 노동계급은 전체 인민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혁명 역량의 저수지는 노동계급 외부의 농민층이었다. 이들은 반(半)농노였으며 억압받는 민족들이었다.

농민

혁명의 깊은 토양은 바로 농업문제였다. 구 봉건 왕정은 새로운 자본주의 착취질서 하에서 농민에게 이중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농민의 공유지는 약 1억4천만 데시아틴이었다.(역주: 1 데시아틴은 10,900 평방미터) 그러나 3만 명의 대지주들은 1인당 평균 2천 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여 총 7백만 데시아틴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1천만 농민의 토지에 해당했다. 이 토지소유 통계는 즉시 농민반란의 강령을 제공했다.

1917년 귀족 보코린은 최후의 의회 의장이었던 로지안코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주이다. 따라서 특히 사회주의 사상을 실험한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나의 토지를 잃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혁명의 임무이다!

1917년 8월 러시아 거의 전역에 농민반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642개 군 가운데 482개 군 즉 77%가 이 운동의 영향을 입었다! 불타는 농촌 마을이 도시의 봉기를 환하게 비추어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지주계급에 대한 농민전쟁은 노동계급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적 요소가 아닌가!

완전히 맞는 말이다. 과거에는 늘 그랬기 때문이다. 러시아라는 후진국에서 자본주의가 생존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이렇게 표현되었다: 농민 반란은 부르주아 계급을 진보의 선두주자로 등장시키기는커녕 영원히 반동 진영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따라서 농민이 완전한 파멸을 원치 않는다면 공업노동자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레닌의 천재성은 이 두 억압받는 계급이 혁명의 길에 하나로 단결할 것이라고 이미 예측했고 준비했다.

농업문제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용감하게 해결되었다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당연히 1917년에 권력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게 역사에 등장하여 시기심과 겁 밖에 남은 것이 없는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애늙은이였다. 그리고 봉건소유체제에 대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국가권력을 노동계급에게 넘겨주었으며 이와 함께 부르주아 사회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마저 노동계급에게 넘겨주었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체제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성격이 다른 두 요인 즉 부르주아 여명기의 특색인 농민전쟁과 부르주아 사회의 쇠퇴를 알리는 노동계급의 봉기가 동시에 필요했다. 여기서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이중적 결합성을 파악할 수 있다.

농민이라는 곰을 일단 잠에서 깨우면 이 짐승의 분노는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이 짐승은 자신의 분노가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의식할 수 없다. 그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농민은 역사상 최초로 노동계급에게서 진정한 지도자를 찾아냈다.

공업과 수송업에 종사한 4백만 노동자가 1억 농민을 지도했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에서 노동계급과 농민의 필연적인 상호관계였다.

민족문제

노동계급을 위한 혁명의 두 번째 저수지는 억압받는 민족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다. 나라의 후진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마치 물위에 뜬 기름 덩어리처럼 국가기구는 모스크바에서 변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동방에서 가장 후진 민족들을 복종시킨 후 이들에 기초해서 서방의 선진 민족들을 제압했다. 인구의 다수인 7천만 대러시아 민족에 9천만의 다른 민족들이 서서히 종속되었다.

이렇게 제국이 수립되어 대러시아 지배 민족은 인구의 43%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57%는 문명적 법적 차별을 다양한 편차로 받았다. 서쪽 국경 뿐 아니라 동쪽 국경에 인접한 이웃나라들보다 러시아 제국의 민족 억압은 비교할 수 없이 더 야만적이었다. 이 결과 민족문제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졌다.

민족문제나 농업문제에 대해 러시아의 자유 부르주아 계급은 억압과 폭력 체제를 어느 정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의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2월 혁명 후 8개월을 지속한 밀류코프와 케렌스키의 “민주” 정부는 대러시아 출신 부르주아와 관료집단의 이익을 반영했을 뿐이었다. 이 결과 불만에 가득한 피억압 민족들의 분노에 불을 질러 “무력으로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들의 인식을 부추겼다.

일찌기 레닌은 민족주의운동의 원심력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년에 걸쳐 볼세비키당은 민족자결권 즉 완전한 분리 독립의 권리를 위해 끈질기게 투쟁해왔다. 민족문제에 대한 이 용기 있는 노선을 통해서만 러시아 노동계급은 피억압 민족들의 지지를 서서히 얻을 수 있었다. 민주정부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은 이렇게 노동계급을 강화시켜 10월 혁명의 물줄기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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