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변증법적 방법 (3)

좌파도서관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1. 변증법적 방법 (3)
헤겔의 체계에 중요한 강조점을 둔 사람은 두 분야(종교와 정치)에서 다 같이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반대로 변증법적 방법을 주되는 것으로 인정한 사람들은 정치에서나 종교에서나 아주 극단적인 반대파에 속하였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차이를 보지 못하고 경솔하게 “변증법은 곧 형이상학”이라고 지껄인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무정부주의자들은 말하기를 변증법적 방법은 “교묘한 말 짜 맞추기”, “궤변의 방법”, “논리상의 재주넘기”(≪호소≫ 제8호, Sh. G.의 논문을 보라)이며, “그 방법에 의하면 진리도 허위도 다 같이 쉽게 증명된다”(≪호소≫ 제4호, 체르께지쉬빌리의 논문을 보라)고 한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변증법적 방법은 진리와 허위를 다 같이 증명하는 것으로 된다.


얼핏 보면 무정부주의자들의 이 비난에는 근거가 있는 듯하다. 실례로 형이상학적 방법의 계승자에 대하여 엥겔스가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를 들어 보자:


… 그의 말은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만 하라, 무엇이든지 이를 넘어서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이다. 형이상학자로서 보면 사물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이다. 마찬가지로 또 사물은 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것일 수는 없다. 긍정과 부정은 절대적으로 서로를 배제한다. …
≪반듀링론≫, 서론


왜 이것이 잘못이란 말인가!라고 무정부주의자들은 열을 낸다. 그래 같은 것이 동시에 좋은 것으로도 되고 나쁜 것으로도 된단 말인가?! 이것은 “궤변”이며 “말장난”이다. 이것은 “당신들이 진리와 허위를 다 같이 쉽게 증명하려 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좀 더 깊이 생각하여 보자.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 공화국은 모든 점에서 다 좋거나 혹은 모든 점에서 다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천만에,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어째서인가? 그 이유는, 민주주의 공화국이 봉건 제도를 파괴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부르주아 제도를 공고히 한다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에는 그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공화국이 봉건 제도를 파괴하는 한 그것은 좋은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투쟁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 공화국이 부르주아 제도를 공고히 하는 한 그것은 나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반대하여 투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같은 민주주의 공화국이 동시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며 따라서 “옳은 것”이기도 하고 “아닌 것”이기도 하다.


8시간 노동제에 대해서도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8시간 노동제는 프롤레타리아를 강화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지만 동시 에 임금제도를 공고히 하는 것만큼 “나쁜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는 위에서 든 인용문에서 변증법적 방법을 규정할 때에 바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었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극히 명확한 사상이 그들에게는 애매모호한 “궤변”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론 무정부주의자들이 이 사실을 보고 안 보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심지어 그들은 모래 해안에서 모래를 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것 역시 그들의 권리이다. 그러나 여기에 변증법적 방법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변증법적 방법은 무정부주의와는 달리 눈을 감은 채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맥박을 느낀다. 세상은 변화하며 운동하는 것만큼 온갖 세상의 현상은 두 가지 경향 즉 긍정적 경향과 부정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 전자를 옹호하고 후자를 배격해야 한다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 다음으로 넘어가자. 우리의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변증법적 발전은 파멸적인 발전이며, 이 파멸적인 발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과거의 것이 완전히 파괴되고 그 다음에 미래의 것이 전혀 새롭게 확립된다. … 퀴비에의 천재지변설[1]은 미지의 원인에서 생기는데 맑스와 엥겔스의 격변은 변증법에 의하여 생겨난다.” (≪호소≫ 제8호, Sh. G.의 논문을 보라.)


이 필자는 다른 곳에서 쓰기를 “맑스주의는 다윈주의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를 비판적으로 대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호소≫ 제6호를 보라).


이 글에 주의하라!


퀴비에는 다윈의 진화를 부인하고 오직 천재지변만을 시인하는데 그 천변지변이란 “미지의 원인에서 생기는” 불의의 격변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들이 퀴비에를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다윈주의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다윈은 퀴비에의 천재지변설을 부인하고 점차적 진화를 시인한다. 그런데 이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말에 의하면 “맑스주의는 다윈주의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에 비판적으로 대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즉 맑스주의자들은 퀴비에의 천재지변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들이 퀴비에를 따르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동시에 맑스주의자들이 퀴비에가 아니라 다윈을 따르고 있다고 꾸짖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무정부 상태다! 속담에 있듯이 하사관의 과부가 제 손으로 자기를 때리는 격이다! Sh. G.는 ≪호소≫ 제6호에서 말한 것을 ≪호소≫ 제8호에 와서는 잊어버렸다는 것이 명백하다.


제8호와 제6호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을 보기로 하자. 맑스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 현존 생산관계 또는 이것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와 모순되게 된다. … 그때에 사회혁명의 시대가 닥쳐온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구성체도, 그것이 충분한 여지를 주고 있는 생산력이 다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칼 맑스, ≪정치 경제학 비판≫ 서문


만일에 맑스의 이 명제를 현대 사회생활에 적용한다면 사회적 성격을 가진 현대의 생산력과 사적 성격을 가진 생산물 소유형식 간에는 사회주의 혁명에 의하여 해결되어야 할 근본적인 갈등이 있다는 것으로 된다.
엥겔스, ≪반듀링론≫, 제3편 제2장


보다시피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에 의하면 혁명은 퀴비에의 “미지의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아주 명확한 실제적인 사회적 원인에 의하여 일어난다.


보다시피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에 의하면 혁명은 퀴비에가 생각한 것처럼 불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이 충분히 성숙된 그때에야 일어난다.


퀴비에의 천재지변설과 맑스의 변증법적 방법 간에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다른 한편 다윈주의는 퀴비에의 천재지변설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포함한, 변증법적으로 이해된 발전까지도 부인한다. 그런데 변증법적 방법의 견지에 의하면 진화와 혁명,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 ― 이것은 동일한 운동의 필수적인 두 개의 형태이다.


“맑스주의는 … 다윈주의를 비판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결국 ≪호소≫는 제6호에서나 제8호에서나 다 오류를 범하였다.


마지막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은 우리를 비난하면서 “변증법은 … 자기 자체에서 벗어나든가 뛰쳐나오든가 혹은 자기 자체를 뛰어넘든가 할 가능성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호소≫ 제8호, Sh. G.의 논문을 보라.)


무정부주의자 여러분, 과연 그것은 진리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존경하는 당신들이 완전히 옳다. 사실 변증법적 방법은 그러한 가능성을 주지 않는다. 왜 그러한 가능성을 주지 않는가? 그것은 “자기 자체에서 뛰쳐나오든가 자기 자체를 뛰어넘든가” 하는 것은 산양이나 하는 일이고 변증법적 방법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까닭이다.


비밀은 여기에 있다! …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는 대개 이러하다.


무정부주의자들이 맑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 그들은 자기류의 변증법을 날조하여 그것과 그렇듯 무자비하게 싸우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꼴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환상과 싸우며 자기 자신이 꾸며 낸 허구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원수를 무찌르고 있다고 열이 나서 단언하는 것을 보고는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역자의 주 -- 천재지변으로 생물이 절멸하고 일부가 살아남아 다시 번성한다는 다윈 이전의 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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