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좌파도서관/월스 13호

좌파도서관

여든다섯 살 청년, 백기완 (上)

[권두시] 북을 때려라 (백기완, 1983)

우리는 모였다/날마다 찢어지던 땀방울/그 속에 어리는 쪼매난 승리/노동해방의 깃발을 들고/우리는 이렇게 모였구나/북을 때려라 가슴을 펴라/우리는 이겼다/도랑물이 냇물이 되고/냇물이 큰 흘떼, 강물이 되듯/우리도 한번쯤 살아야 될 게 아니냐/그 눈물겨운 아우성으로/우리는 이겨야 한다/북을 때려라 보라!/저 싸나운 독수리는 높이 떴지만/하늘을 여는 건 그들이 아니다/북을 때려라 보라!/저 뻔뻔스러운 뺏어대기/독점자본의 칼날은 번득이지만/세상을 여는 건 그들이 아니다/북을 때려라 오!/숨결 하나하나가/그대로의 창조인 벗이여/지쳤는가 아니다/흔들렸는가 아니다/무서운가 아니라니까/그렇다 손에 손을 잡고/우리 다함께 일어서자 노동자가 타락을 하면/사람이 타락을 하는 것이요/노동자가 패하면/역사가 패하나니 저 앙뚱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자근자근 앙짱 낼 때까지/북을 때려라 북이 없으면/가슴이라도 때리고/가슴마저 거덜날 것이면/하늘땅을 때려서라도/돈이 주인이 아니라/사람이 주인인 세상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그리하여 너도 잘살고/나도 잘살되/올바로 잘사는 세상/노나메기 세상 아,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일굴 그날까지/아,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일굴 그날까지/북을 때려라 떵떵떵 떠덩떵/우리는 마침내 이긴다고/천년 만년을 다지는/북을 때려라/북을 때려라

백기완 선생의 소천에 부쳐

백기완 선생님께서 소천하셨다.

오래도록 앓아오셨고, 그러면서도 일어나 또 투쟁의 현장에 두 발로 서셨기에, 언젠가부터는 항상 그 곳에 계시겠거니 했다.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선생께서 기억하시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또한 투쟁의 현장에서 선생을 만나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던 후배였다. 가부장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예의범절을 지키려던 것이 아니라, 평생을 노동대중의 투쟁 속에서 살아오신 투사에게 최대의 예의가 절로 갖추어졌다. 선생은 그런 우리의 인사를 몇 번이고 받아주셨다. 이제는 인사를 받아주시지 못하신다.


선생께서 임종 직전 글로 남기셨다는 말을 보았다.

“김진숙 힘내라!”

백기완 선생은 참으로 선생답게 가셨다. 마지막 말도,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힘내라고 외치고 가셨다.

“노나메기!”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래서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착하고 어질고 깨끗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

선생께서는 마지막까지 선생이 꿈꾸는 세상을 외치고 가셨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노나메기 세상의 꿈을 꾸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우리 노동대중이. 그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 누구도 그런 세상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살아가라고 주지 않는다. 장산곶매가 아무리 날래게 부리질을 한들, 자기 둥지라는 마지막 안식처마저 부수어내며 정신적으로 다듬는다 한들, 동네 사람들이 징도 치고 꽹과리도 치면서 막 응원을 하지 않으면, 저 거대한 독수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 깨어나서 뜨거운 함성을 외치며 앞서서 나간다 해도, 산 자들이 따르지 않으면 이번 투쟁에서는 동지를 지키겠는가.

그러니 이제 우리가 딱 한발띠기에 인생을 걸자. 우리의 자리에서 노동하고, 우리의 자리에서 투쟁하자. 너나없이 함께 일하고, 너나없이 함께 잘살며, 올바르게 살아갈 공동체를 조직하자. 누군가 앞장서 이끄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딱 한발만 함께 나아가자.

선생의 영면을 빈다.

“마을 사람들이 기뻐 함성을 올리는 순간 장산곶매는 하늘로 힘차게 날아 올랐다. 그때 동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며 마을에는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독후감

안타까움은 무의미하다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이 책은 1999년 쓰였다. 개정판이 나온 지는 10년이 조금 넘었다. 책이 나온 지 20년도 더 지난 2020년에도, 서울대학교 입시 서류에 가장 많이 등장한 책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우리나라에서만 30만 부나 팔렸다. 단순히 나열해도 대단한 기록이다.

이 책이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는 동안, 세계인이 최소한 기아와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금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심각해졌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라는 재난은 이 비정한 굶주림의 고리에 기름을 부었다. 빈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모든 중진국도 백신은커녕 소독제 하나 마련할 수 없는 판국이다. 국경 봉쇄와 경제 위기로 인해 푼돈 하나 벌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거리가 아닌 저승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 국가는 시체를 처리할 여력도 없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왜 인류의 절반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이유로 용인되는가?


2010년, 전 세계의 농업 생산력은 100억이 넘는 사람들을 매일같이 배불리 먹이고도 가축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정도로 충분했다. 78억 지구 인구를 모조리 먹여 살리고도 부족함이 없다. 최신 자료를 살펴봐도, 밀과 옥수수를 비롯한 주요 작물의 생산량은 억 톤 단위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만약 여러 가지 불합리한 이유로 인해 제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농토에 수로만이라도 제대로 놓아 진다면, 이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은 당연히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가?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우리에게 20년째 던져온 질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끝까지, 빠짐없이 읽었다면 그 이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럽 연합의 과잉 생산된 곡물을 떠넘기기 위해 아프리카의 농업 자체가 근간부터 붕괴하였다는 내용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21세기 유럽 ‘선진국’들의 행보는 과거 그들이 자행해오던 제국주의적 정책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이 말이 틀렸는가?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유럽 연합의 집행위원은 경질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해피 엔딩을 맞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하나 물러남으로 인해, 10년도 더 지난 지금 아프리카의 농민들이 제대로 대우받으며 살고 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유럽의 정부들은 농촌에 불건전한 연명 치료만을 유지해두고 있다. 그 치료로 인해 나온 의료 폐기물은 어김없이 빈국에 무책임하게 버려져, 자기 손으로 일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그 폐기물만을 주워 먹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희망이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에 있다고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그 주장은 기껏 잘 써둔 이 책의 유일한 오점이자 모순이다. 잘 생각해보라.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프리카 경제의 불가피한 중심 요소인 농업이 완전히 파괴된 근본적인 이유는, 총칼 대신 돈다발로 무기를 바꾼 ‘선진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다. 그 정책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바로 그 유럽인들이다. 대체 어떤 국가의 정치인이, 국민이 자신들의 이익을 전부 포기하면서까지 남을 돕자는 주장에 찬성할 수 있을까? 네오나치에게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종교의 계율에 경도된 사람이나 간혹 보이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위해 푼돈을 적선하는 사람 빼고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것이다. 매번 돌아오는 선거철에만 인권을 팔아 자리를 노리는 비열한 정치인들이나 잠깐 떠들다 갈 것이다. 국제기구의 취임사에서나 눈물을 흘리며 열변을 토하고는, 금세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발뺌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를 도울 것을 구걸하는 작금의 대책,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장 부끄럽고 오만하며 반인륜적인 정책들은 하루빨리 전면 폐기 후 대체되어야 한다. 빈곤 포르노는 아무런 대안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문제 제기부터 대안 마련까지 완벽하게 해 두었으나, 그 대안을 실현할 주체를 잘못 지정해둔 것이 문제다.


잠깐 옛날이야기를 해보자. 구 일본 제국은 자신들의 경제 발전을 위해 쌀 가격을 의도적으로 통제하였다. 그 재원은 어디서 났느냐? 식민지 조선이다. 배곯는 조선인 빈농을 수탈하여 가까스로 유지한 것인데, 그 덕분에 일본인 하층민은 비참하게 살아갔어도 밥은 지을 수 있었다. 당연히 노동력 착취를 이어나가기 위함이었지만,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게 되자, 그들은 일왕을 찬양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품목은 변했어도 착취의 고리는 ‘신자유주의’의 이름 아래 더욱 공고하고 견고해졌다.

근대 제국주의의 야만성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자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아무런 죄 없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일은 근대의 그것보다 오히려 늘었다는 말은 엄연한 사실이다. 국제적인 책임을 외면하며, 언제나 피해자를 자처하는 대한민국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 농촌에 돈을 위해 끌려온 결혼 이주 여성을 생각해보라. ‘다문화 존중’을 위해 한국 정부가 국제결혼을 장려했는가? 그저 소외당한 농촌에 던지는 값싼 안정제에 그칠 뿐이다. 국가 주도 성매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이 책이 부르짖는 인권과 자유라는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있더라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기본적인 교양도 갖추지 않은 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교양을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인권과 자유가 필요함에도 알지 못하여 누리지 못한다. 배운 사람은 무엇이 다르냐 하면, 다시금 이 나라를 보라.

세계의 절반이 의도적으로 조장된 끔찍한 빈곤 아래 죽어갈 때, 다른 절반은 이 책에서 의지하는 ‘북반구 국민들의 양심과 의식’은커녕 새로운 제국주의 체제 아래 노예가 되어, 고작 드라마 정도나 겨우 보며 살다가, 빚만 잔뜩 진 채로 비참하게 늙어 죽는다.


싸구려 믹스커피 하나에도 비인간적 아동 노동을 통해 얻어낸 원두가 들어간다. 그 저렴한 가격만큼 그들에게 가는 금액도 저렴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비싼 커피를 사 먹으면 그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가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건물주 골프채 하나 보태줄 뿐이다. 공정무역 역시 무용지물이다. 모든 생산자가 공정무역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한, 그저 패션의 일종일 뿐이다.

물론 단순히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 의미가 전혀 없다며 힐난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다. 다만 그 책임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않고서는 어떠한 변화도 이뤄낼 수 없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피해자이자 모든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가해자이다. 좋게좋게 넘어갈 게 아니라, 이 책에서도 말하듯 확실히 깨닫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우리는 결코 TV 화면 속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안타까워하면 안 된다.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우리 또한 단순히 현 체제의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 그 꼴을 면했을 뿐, 필요가 없어진다면 언제든지 버려질 것이다.

어떤 것이든 물건처럼 쓰고 버리는 자본주의적 생활 양식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우리들은, 나 또한 그저 물건으로 취급당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담담히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아마 앞으로 다가올 몇 안 되는 기회마저 지나가면,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그래야만 할 것이다. 서구 열강의 총칼이 원주민들을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빼앗고는 끊이지 않는 고통의 수렁으로 내몰았듯이, 우리 역시 곧 다국적 기업의 자본과 기술에 의해 밀려나 하나같이 빈민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내 박스는 황금빛이라며 자랑할 것이며, 누군가는 상황을 타개하려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공고한 자본가 독재가 이루어지는 순간, 기술에 의한 지배가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개혁의 성공을 목전에 두고 전복당한 상카라의 부르키나파소나, 미국에 의해 저지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칠레보다 더한 무기력의 시대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런 미래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신자유주의 집단 최면에 빠진 사람들에게 모든 대안은 사치로 보인다. 그러나 생색만 내는 국제 원조를 당장 중단하고 근본적인 문제인 억압의 고리를 끊자는 주장은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주장이다. 허울뿐인 원조로 목숨만 살려 두어 봐야 굶주린 이들의 고통만을 길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을 자립하게 하면 지금까지 들인 돈의 몇 곱절은 더 큰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굶어 죽어가는 40억의 인구를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로 바꾼다면, 시장은 대체 얼마나 넓어지겠는가? 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을 보아라, 외면받던 그들은 이제 ‘할랄 푸드’를 위시한 거대한 시장으로 변하여 각국이 공격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꿈의 판매처가 되었다.


이제 더는 변명하지 말자. 남의 일이 아니다. 막연한 불안감과 적대감이 향해야 할 곳은 사회의 변화를 외치는 이들이 아니라, 지금의 고통뿐인 세상을 정당화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만드는 기득권의 공고한 요새이다.

부정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고,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해야만 한다. 즉, 우리에겐 혁명이 필요하다. 동정에 기초한 원조가 아니라 연대를 통한 투쟁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주어진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유용한 과학기술이라는 선물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활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책을 읽었으나 그저 동정심만을 가지는 이들은, 아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꽃밭에서만 사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도 “왜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노예처럼 사는 것에 거부감 자체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동정에 근거한 국제 구호 활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감히 나는 주장한다. 사람들에게 “너는 저 사람들보다는 낫게 살고 있으니 불만을 가지지 말라.”는 의도가 담긴 모욕적, 선정적인 광고를 통한 활동이 유익하면 얼마나 유익하겠는가. 여성 인권 문제나, 기후 변화 문제는 물론 이해할 수 없는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자본주의의 최종 진화 버전, 신자유주의의 철저한 몰락으로만 이루어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더 말을 이어갈 재주가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였다면, 부디 다른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달라. 이 세상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제로 인해 인간이 고통받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그 일들은 모두 인간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이 체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믿음을 가져달라. 그렇게 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2021년 2월 7일 오후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가들>

우선 난 이 책을 인터파크 배송 언제 오나 시험해보려고 산 거라, 큰 기대는 안 했다. 그 작은 기대마저도 배신당했지만, 기대한 내 잘못이다. 왜 샀는가 하면, 지금의 주요 좌파 철학자들에 대한 우익 입장에서의 비판서라길래 어떨지 궁금했고, 인터파크에서 보여주던 인용구들이 생각보다 맘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서평을 시작하자. 우선 내가 올렸듯이 이 책의 서문(정확하게 말하자면 1장)은 현대 서구 보수 우익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한테 정확히 알려줬다. 우선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물론, 정파도 다른 학자들을 싸잡아서 신좌파라고 설명한다. “반 이데올로기”를 부르짖으면서도 참으로 이념에 매몰된 추태를 보인다. 저자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히틀러와 저자를 반동이라는 이유로 같은 위치에 두면 저자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다소 궁금하다.

이 책의 본문은 어떤가? 우선 생각나는 것부터 나열하겠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관점이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 물론 저자의 관점은 “내 판단은 무조건 옳기에, 나는 중립적이다.” 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 그 말은 옳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직업윤리를 따를 필요가 없다. 오직 필요한 것은 노동의 해방이고,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는 인간이 자본주의에서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의 선두에 설 영광을 가진다. 저자는 좌익 이론가들의 부족함도 비판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좌파들은 그들의 조악한 이론을 이해하기도, 또 저런 답 없는 비판을 비판하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보겠다.

저자가 그렇게 강조하는 전통과 결사, 시장은 이 사회를 지키는 요소인가 망치는 요소인가? 만일 전자라면 충분치가 않은 것이고, 후자라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묻는다면, 저자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태도”라고. 논의를 막아버리는 원천 봉쇄의 오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사회란 논리로 재단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만약 그들의 모든 논리가 완벽하더라도, 사람들의 고통이 필요한 논리라면, 그 논리는 부수어야 맞다. 인류란 신화를 통해 태어나고 자라난다. 민족을 움직이는 것은 경제적 가치가 아닌 전 민족적 신화다. 나는 논리만으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자를 혐오한다. 인류는 인류의 뇌 속에 이상에 구현된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다. 인류는 공상 속의 야망과 열정, 광기의 공간에 존재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저자의 논리는 어쩌면 완벽할 수도 있다. 반공 프로파간다에 뇌가 절여졌다면, 무슨 논거를 대든 무슨 문제가 있으랴? 공산주의를 깎아내릴 수 있다면, 그들은 악마와도 연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그들의 이상대로 되지 않는다. 그들이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같다고, 같은 전체주의라고 주장한다면, 우린 파시즘과 자본주의 세력이 철의 동맹을 맺고 있었음을 기꺼이 상기시켜줄 것이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시장이 중심이며, 파쇼가 다스리는 세계에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우린 알고 있다. 파시스트 체제에서 모든 것을 휘어잡은 이들은 자본가 계급이었다고, 그 사실은 현재 자본주의 사회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사실상 모든 초국가적 대기업과 밑의 하청기업들의 관계는 사실상 코포라티즘 경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인류는 자본가 독재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떠한 탈을 쓰고 있어도 결국 같은 체제라고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은 또다시 말을 돌릴 것이다. 음모론이라며, 패배자의 망상이라며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피부로 느낀다. 이 세계체제가 사실상 하나로 통합되어있음을. 모든 국가는 자본가 독재로 굴러가며, 동시에 노동자에게 조국이 없듯 자본가에게도 조국이 없으며 그것을 그저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자유와 법치주의의 유무에 의해 나뉜다고 말한다. 과연 자유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저자는 아는가? 나는 단순하게 저 주장을 일축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한탄할 자유뿐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침묵할 자유뿐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착취당할 자유뿐이라고. 법치주의?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검증된 진리를 진정 모르는가? 저자는 공산주의가 유토피아를 원한다며 떠들지만, 우리가 없애려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체제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회를 진정으로 보완하는 것이며, 인류 공동체를 자본주의의 예속에서 해방하고자 할 뿐이다.


<조국이 위험에 처하다>를 읽고

일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자 중 노동 계급 출신이 유독 많았었다는 것이다. (못 믿겠다면 프루동이나 바이틀링을 생각해보라)

그렇기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노동 계급 중심성이 존재했었고, 생디칼리슴이라는 지극히 노동계급적이고 지극히 프랑스적인 사상이 태동할 수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독일에서의 사민당-자유노조의 관계, 영국에서의 노동당-TUC와의 관계가 긴밀했던 것과 달리 프랑스의 CGT는 아미앵 헌장을 발표함으로써 당과 노동조합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1871년, 파리 코뮌이라는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온건 왕당파 띠에르의 제3공화국에 의해 처참하게 진압된 이후,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자들, 공화파들, 노동운동가들은 한동안 추방당했었고, 프랑스 사회주의는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금 부활했다.

당시 블랑끼주의 정당인 ‘바이양 CRC(중앙혁명위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는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 일명 FTSF라는 사회주의 정당에 참가했다. ( 약자가 사노맹일 것 같지만 의외로 사노당이다. 사실 책 제목도 조국인데 사노맹까지 있으면 모 교수가 떠올라서 집중이 안 될 것 같다. ) 그러던 1882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쥘 게드, 폴 라파르그의 노동당으로 분리되어나갔다. (지식인들이 많았다).

1880년대는 프랑스 사회주의에 있어 격동의 시기였다. 막 부활한 사회주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이 자신감이 넘쳤고 실제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공화국이 위험에 처했다. 책 제목대로, 조국이 위험에 처했다. 옛 보나파르트주의의 탈을 뒤집어쓴 민족주의자 장군, 불랑제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공화국을 위협하는 가운데, 극우들이 그를 지원하고 극좌 일부마저 그에 동조했으며, 그를 막아야 할 공화파 정치인들은 무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사건이다'며 무시해버릴 법도 한데, FTSF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공화국을, 인간을 수호하기 위해 나서서 심지어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시의주의 공화파들과도 손을 잡은 것이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FTSF 기관지를 통해 실린, 불랑제를 반대하며 쓰인 기사들을 모은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 책이 특이한 점은, 책의 구성이 정말 독특하다. 독특해봤자 얼마나 독특하겠냐 싶겠지만, 무려 본문(기사 모음)보다 저자의 부연 설명과 주석이 더 길다! 이쯤 되면 저자의 설명을 듣기 위해 산 셈이다. 나도 그러려고 샀다.

앞서 프랑스에 노동 계급 중심성 전통이 있다고 했었던 이유는 이 말을 하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이 기사들은 모두 노동자들이 기고한 글들이다. 그래서 뭐?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딱히 그들의 사상에 대해 알아보기는 힘들고 글 자체도 투박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사회주의와 자유>와는 상반되는 측면이다.

다만 특이했던 점은 당시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도 남녀평등 문제를 1면에 올릴 정도로 그들이 여성 문제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과거 프루동이 여성을 경시했고, 공화파들이나 심지어 일부 여성 운동가마저 여성 참정권에는 반대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 또한 여성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계급 문제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할 때에도, 남성 단체로서는 거의 유일한, 여성 참정권을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로써 외치는 단체였다. 저자도 이 점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 심지어 제1 인터내셔널에서도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의결을 한 지 고작 20년 밖에 안 된 시기다! 당시 성 문제에 있어 가장 진보적인 축이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수준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뭐···. 말할 필요가 없다. ) 아까도 <사회주의와 자유>와 이 책은 대척점에 서 있다. 둘 다 19세기 후반에, 사회주의자가 쓴 글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여러 면에서 다르다. <사회주의와 자유>를 쓴 장 조레스는 뒤르켐, 사르트르, 베르그송 등을 배출한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지식인이었던 반면, 이 책의 저자들은 노동자 출신이다. 조레스가 독자들 대가리 깨지라고 쓰는 건지 라이프니츠, 헤겔, 마르크스를 신나게 인용하는 반면, 이 책의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게 말이 되냐'고 까일 정도로 사상이 세련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닮은 면 또한 존재한다. 그토록 다른 출신과 사상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같은 목적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인간해방,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담은 공화국 수호, 사회주의의 실현, 반전을 목적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동지였고 같은 전선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다른 이들을 묶어줄 수 있던 이유는 아마도 프랑스 사회주의에 내재된 또 하나의 전통, 1796년의 바뵈프 이후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염원해오던 인간해방이라는 가치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 사회주의는 그 뿌리부터 인본주의, 공화정, 자유와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러한 문제들을 계급 문제의 뒷전으로 떠넘겼던 카우츠키와 같은 당대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사회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번역


2021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

미얀마 쿠데타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라고 해서 대중투쟁이 무시당할 이유는 없다

최근 군부에 맞선 미얀마 민중들의 투쟁에 대해, “지금 시위대가 근거도 없이 맹목적인 반중 레토릭 뱉는 거 보면, 이 운동은 결국 미 제국주의에 복무하게 될 뿐인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군부가 집권하는 게 나을 듯.” 이라는 글 보고 밥숟가락 내려놓고 바로 달려와서 글 쓴다.

일단 저 글쓴이가 미얀마 내 투쟁 상황에 대해서 전반적인 이해에 기반하지 않고 인상비평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자세히 써보려고 함.


1. 시위대의 반중적 구호는 과연 근거가 없을까? 우선 미얀마의 정치적 내부 상황에 대해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지금 쿠데타 도중 군부에 의해 구금된 아웅 산 수 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이유로 서방세계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아웅 산 수 치와 미얀마 군부와의 관계가 조슈아 웡과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 혹은 김대중과 신군부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넘겨짚는 부분에서부터 이러한 오해가 비롯된다고 봄.

박근혜가 구 동교동계 인사들까지 품어 안으면서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던 것처럼 군부와도 함께한다는 '국민 대통합'의 이미지는 아웅 산 수 치의 슬로건 가운데 하나였음.

공식 석상에서 아웅 산 수 치는 군부와의 관계가 썩 나쁘지 않다고 발언할 정도. 또한 아웅 산 수 치가 미얀마 내에서 제한적이나마 권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만들었던 헌법은 초안은 2011년에 만들어졌는데 이 헌법의 초안을 만든 건 2008년의 군부였음. 이들이 헌법 초안 작성에 나선 이유도 미국이 배후에 있는 '색깔 혁명'에 전복되지 않고 서구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음. 그러기 위해서는 아웅 산 수 치를 그 대표적 인물로 내세우는 것이 군부에도 필수적인 수순이고.

그렇게 미얀마 내에서는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가 서로를 활용하며 공생하는, 아웅 산 수 치와 군부의 은근한 동맹 관계가 상당한 기간에 걸쳐 이어져 왔던 것임. 이번 정국에서 군부와 아웅 산 수 치를 필두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정치적 지향을 완전히 분리해서 바라볼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

사실 아웅 산 수 치와 그 측근들은 친중 인사들이 상당하며 심지어 미얀마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인프라 원조를 받는 국가이기도 함.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아웅 산 수 치가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을 만나 중국으로부터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왕이 외교부장과 아웅 산 수 치의 만남이 있던 자리에서 미얀마의 라카인주에서 경제특구를 미얀마와 중국 양국이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는 점인데, 이로써 중국 무역은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미 해군이 통제하는 믈라카 해협을 우회할 수 있게 되어서, 해당 지역 내에서 미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상당하게 줄어들게 했음.


이거만 봐도 미얀마라는 나라가, 단순히 매년 한국 대중정치인들이 “쎼쎼”, “니하오마” 하면서 중국 인민들에게 축하 메시지 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친중'적 행보를 보여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임.


미국도 이러한 사정을 뼈아프게 인지하고 있는지 오바마 정부의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대니얼 러셀은 “이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익 측면에서도 엄청난 차질을 가하게 한다. 이번 쿠데타는 미얀마 지역에 대해 미국의 신뢰할 만한 그리고 지속적인 개입이 오랜 기간 부재했던 것이 반민주세력을 대담하게 해줬다는 점을 다시금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라고 언급하면서 숟가락 못 얹어서 배 아파 죽겠다는 심정을 에둘러 표현함


2. 이 운동은 결국 미 제국주의에 복무하게 될 것인가? 만일 이러한 운동이 미 제국주의에 포섭되는 국가 하나가 늘어나는 정도의 처참한 결과로 수렴하게 된다면, 아웅 산 수 치를 비롯한 부르주아 대중정당, 혹은 그곳에 속한 대중정치인에 대한 지지와 신뢰의 움직임이 보다 확산되어야 하며,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의 측면 지원도 이들을 대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게 필수적일 것임.

그러나 지금 미얀마의 상황은 그다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임.

이번 쿠데타를 계기로 미얀마 내 민주화 운동의 거목으로 여겨지던 아웅 산 수 치의 로힝야족 학살을 비롯해 이를 보도한 기자들을, 군부의 입맛에 맞게 체포해 왔다는 점이 서구 주류 언론들에까지 알려지면서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그간의 긍정적 이미지가 상당 부분 훼손되고 있음. 이런 상황에서 아웅 산 수 치를 더는 과거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 수호에 선봉에 나섰던, 지극히 매력적인 인물로 내세울 수가 없다는 말임.

그리고 이미 미얀마의 젊은이들은 아웅 산 수 치라는 부르주아 대중정치인을 뛰어넘고자 하는 급진주의가 확산하고 있는 상황.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며 더 그런 구세주적 대중정치인에 목매지 말자는 주장 역시 힘을 얻고 있음.

단순히 국내 주류언론이 보도하는 상황에 비해 미얀마의 투쟁은 사상적으로도 급진적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그럴 바에 차라리 군부가 집권하는 게 나을까?

이건 언급의 가치가 없다. 이딴 소리 지껄일 시간에 그냥 나가 죽자.


로갤에서 이러한 주장을 본 건 처음이지만 사실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의 맞서는 대중투쟁에 대해 그 의미를 축소하려는 시도는 이미 숱하게 봐왔음.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라고 해서 그들의 대중투쟁까지 비닐하우스 숙소로 구겨 넣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모음

그들은 왜 신문을 길거리에서 ‘파는가’···?

갤에 노동자연대 애들 허구한날 가판대 열어놓고 신문 팔던데 그런다고 팔리냐? 하는 글이 생각나서 써봄. 이거 말고도 해외 몇몇 조직은 '그분 우리 신문 길거리에서 팔아'가 해당 활동가가 그 조직과 얼마나 연이 닿아 있고 얼마나 그 조직의 지향을 담은 실천을 하는지에 대한 척도가 되기도 하더라.

영국 밀리턴트 계열 조직의 활동가랑 나눈 대화라서 아마 영국이 본사인 노동자연대의 활동 방식이랑 정서적으로 맡닿는 부분이 상당히 있을거 같음. 아 물론 밀리턴트랑 노동자연대는 철천지 원수 사이다. 밀리턴트 애들한테 노동자연대 이야기 꺼내면 일단 안색부터 달라짐. 그래서 “우리 노연은 그래서 그러는거 아니야! 니가 뭘 알어?!”라고 말하고 싶은 노연 회원 있으면 말 좀 해주라. 본인은 아는 노연 회원이 없어서 물어보고 싶어도 못 물어봄···.

우선 한국에서는 보통 공짜로 한 장 분량의 유인물을 나눠주는 게 일반적일 거임. 뭐 노동절 집회 같을 때 가면 장수도 좀 더 늘어나고 진짜 신문 뺨치게 넓은 종이에 주는 경우도 있는데 노동절이 운동권의 빅 이벤트인걸 감안하면 특수한 경우로 분류해야겠지.

그래서 나도 공짜로 주면 볼 사람, 안 볼 사람 다 가져가긴 할 텐데 왜 굳이 돈을 받고 파느냐 하고 물어봄. 그러니까 그 활동가가 하는 말이, “맞다. 그러나 돈을 안 받고 그냥 공짜로 주면 사람들이 가져가서도 잘 안 본다. 어차피 공짜로 보는 거니까. 그러나 돈 주고 팔면 그때부터는 자기 돈 써서 보는 거니까 주의 깊게 보게 된다. 그리고 신문을 '파는'것은 신문을 주의 깊게 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도 정말 최소한의 금액만 받고 판다.” (영국의 경우 신문 한 부에 1파운드만 받고 미국에서는 1달러 이하로 받는다고 함) 그래서 사실 신문 팔면 팔수록 적자다'

그리고 이건 나도 일정 부분 예상한건데 사실 신문 가판대를 설정하는 것도 나름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숨어있다고 함. 예를 들어 공장 입구 앞에 가판대를 설치한다고 하면 보안 직원들이 “거 빨리 치우세요!” 하면서 실랑이 좀 벌이다가 물리적인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는데 그걸 보고 공장 노동자들의 동요를 일으킬 수도 있고 어용 조합원이 시덥잖은 이유로 다가와서 빈정대면 그 자리에서 토론하는 모습을 공장 노동자들에게 보여줄 수도 있고 그렇다 함.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도 웃긴 것

좌파들이 감성에 호소한다고 하는데, 사회 곳곳에 대놓고 드러나 있거나 암약하고 있는 문제들이 산재해있으면, 그걸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게 훨씬 이성적이고 사고 지향적이며 합리적인 판단 아닌가?

나는 진보 또는 좌파란 이들조차 보수 우파들에 대한 방어 기제로 연민이나 측은지심 같은 요소를 들 때 참 아쉬움. 물론 그게 문제 인식의 근원이자 핵심이면서 가지고 가야 할 품성일 순 있지만, 마르크스가 단순히 감정 이입이 되어서, 감성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사회 구조의 문제를 치열하게 파고들었나?

우리가 이성적인 사고 판단이라고 여기는 것도, 학습을 토대로 한 감정의 일종이야. 인간의 뇌 활성화와 회로가 단순한 이성과 감성 체계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초 교양 과학만 훑어도 알 수 있는데, ‘팩트’를 그렇게도 신봉하는 보리수들이 부르짖고 있으면 너무 웃겨.


오히려 무슨 문제 제기라도 하면 사고 정지한 채로 그리도 부들부들 급발진하면서 온갖 비아냥만 쏟아내려고 발악을 해대는 쪽이 더 감성적이지 감정이 없으면 왜 그렇게 원초적인 반응을 필터링 없이 쏟아냄?


원래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떠든 게 바로 우파들인데, 지금 시대에는 자기네들이 가장 먼저 “나는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하는 게 코미디지. ‘공동체의 안정’, ‘시장의 자유’를 불가침의 영역에 두고 그걸 광신적으로 신봉하는 주제에 이성적이래!

미국은 사우디 인권법도 제정하라

여성 운전을 허용하며, 여성 투표권도 허용하며, 히잡 착용은 필수지만, 어쨌든 여성의 사회 진출을 허용하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풀고,

남성 도움 없이는 여성이 생활할 수 없으며, 여성 인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제재를 걸어라.

투표권은 장식인 민주주의의 적에게, 이란의 고위층들은 그저 들러리로 만들어버리는, 모든 권력과 부가 극소수 왕족에게만 집중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제재를 가하라.


대한민국의 청춘은 집어삼켜지고 있다

존속을 위해 극한까지 밀어붙인 기형적 자본주의 체제가 청춘을 집어삼키고 있다.

공교육은 민주시민을 기르고 대중주권을 가르치는 대신 복종하는 노동자와 기술관료를 찍어내고

대학교는 학문의 장이 아닌 취업 알선소로 전락한 지 오래다.

기업은 착취적 임금노예 관계를 강요하고 효율을 위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문제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 자본주의에 순응하지 말고 불복해라. 자본주의가 문제다.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이 체제를 우리 손으로 끝내야 한다.

그래야 청춘이 살고 네가 산다.


'자유'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들이 자신의 독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방패일뿐이며,

'민주주의'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소수, 과두제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감히 지껄이는 대중선동용 거짓말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유민주주의'에선 '자유'와 '민주주의'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북한이 사회주의 / 공산주의냐는 질문은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사회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 질문을 받고선, 대한민국엔 기업 규제, 의료보험과 복지, 국정농단, 정경유착 등등이 있으니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부정할 것인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당도할 수 없는 지상락원이라 여긴다면 한번 다시 생각해보아라. 그런 생각으로는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에 어긋나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궤변조차도 반박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