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좌파도서관

살바도르 기예르모 아옌데 고센스(스페인어: Salvador Guillermo Allende Gossens, 1908년 7월 26일 ~ 1973년 9월 11일)는 칠레의 의료인 겸 정치인이자 민주적인 투표로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이다. 칠레 사회당 사무총장직을 지내며 정당 활동을 시작한 후 내각에서 보건부 장관을 지냈으며, 중의원 의원, 참의원 의원을 거쳐 1970년에는 남미 최초의 진보 진영 출신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재임기간 도중 빈민과 아동들을 위해 전국적으로 복지 정책을 펼쳤고, 미국의 경제제재와 우익들의 테러 공작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업적과 성과물을 남겼다. 그러나 미국의 닉슨 정부[1]는 자국의 기업 이익 등을 방해하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획책했고,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을 위시한 반동주의 기득권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통령궁에서 총을 들고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생애

젊은 시절

살바도르 아옌데는 1908년 6월 26일 칠레의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이었고 할아버지 라몬 아옌데는 1860년대 칠레 교육역사에서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관련이 없는 비종교계 학교를 설립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오랜 기간 혁명적 비밀결사에 가담한 이력이 있는 집안이었다. 유년 시절 지금의 페루 영토인 타크나에서 보낸 아옌데는 칠레와 페루 어린이가 뒤석인 학교를 다녔었다. 10살이 되던 1918년 아옌데는 그이 가족을 따라 남쪽 이키케로 이주했는데, 그곳은 질산염 수출 산업의 중심지였고, 악명 높은 1907냔의 질산염 탄광 노동자 학살 사건이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1919년 이키케에 계엄령이 내려졌을 당시 아옌데는 노동자들의 집회를 목격했다고 한다. 1919년 그의 가족은 다시 한 번 이사길에 올랐고, 아옌데는 칠레 남부 항구도시 발디비아에 정착했다가 3년 뒤인 1921년 발파라이소로 귀향했다. 1924년 아옌데는 발파라이소에서 학업을 마쳤다. 학업에 열중할 당시 아옌데의 성적은 좋았고, 수영과 10종 경기에서 전국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16살에 탁월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친 아옌데는 친구들이 장래 희망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느 앞으로 칠레 대통령이 될 거야라고 말이다. 고교 학업을 마친 아엔데는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고나, 할아버지처럼 의사가 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의학을 선택했다. 의대에 다니게 될 아옌데는 정치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다. 그는 칠레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전에 아옌데는 의대 입학을 1년 미룬 채 사병으로 자원입대했고, 1925년 11월 군 복무를 마쳤다. 1926년 초 아옌데는 칠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산티아고로 향했다. 학업에 열심이었던 아옌데는 1927년 의대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 트로츠키 등의 저작들을 읽었다. 여기서 읽게된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은 앞으로 아옌데의 정치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의대 학생회장에 있으면서 당시 칠레의 독재정권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고, 총파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 수병 반란 이후 아옌데는 의견갈등으로 조직 내에서 축출됐고, 대학교에서도 쫓겨났다.

1932년 급진 군인들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무너진 뒤 또 수감된 아옌데는 청렴결백한 변호사였던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변혁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보수적인 병원들로부터 일자리를 거부당하자 병리학 조수로 근무한 그는 빈민들의 시신을 부검하는 일도 했는데, 이를 통해 빈민들의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리학 조수로 일하면서 빈민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깨달은 경험은 그가 사회를 변혁하는 이념으로서 사회주의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하였다.

정치입문

대통령 취임 후

사망

미국을 배후로 하는 쿠데타 직후 일주일 동안 3만여명의 칠레 시민이 무참하게 학살당했으며 이 중에는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자 피노체트는 이후 17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공식 보고된 숫자로만 3197명을 정치적 이유로 살해하였고 천여명이 여전히 실종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고문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이 약 10만명이며 국외로 추방된 이가 약 100만명이다.[2]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