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
부제: 评新编历史剧〈海瑞罢官〉
저자: 야오원위안
주제: 마오쩌둥주의 문화예술
발표시기: 1965년 11월 10일
개요: 상하이 《문회보(文汇报)》에서 발표한 비평글이다. 당시 베이징시 부시장이였던 우한(吴晗)이 1961년 1월에 발표한 희곡<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배경으로 작성되었다.
评新编历史剧〈海瑞罢官〉
저자: 야오원위안
1969년 6월부터, 우한(吴晗)[1] 동지는 《해서가 황제를 욕하다》, 《해서를 논한다》등 해서를 찬양하는 글을 연달아 쓰며, 해서를 배우는 것에 대한 현실적 의의를 반복하여 강조하였습니다. 1961년엔 7번의 개작을 거듭한 끝에 경극《해서파관》을 완성하고 이에 대한 서문 한편도 써내며, 다시금 모두 같이 해서의 좋은 품행과 도덕을 배우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극본의 발표와 공연이 이루어진 이후, 신문과 잡지에서는 이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어떤 문장은 그것이 깊고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관중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였으며, 람들이 "약방의 감초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남쪽의 포청천이 될 용기[2]"를 자기게 하였다 라고 선전하였고, 어떤 평론은 우한 동지가 역사 연구와 현실 투쟁을 결합하였으며, 차고풍금(借古讽今[3])의 방법으로 과거에 대한 역사연구를 현대에 응용하여, 이 연극은 역사 연구를 사회주의와 인민을 위해 더더욱 잘 봉사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며 극찬하였습니다. 또 어떤 글은 사람들이 연극에서 청백리를 칭찬하는 것은 당시의 관료들을 교육하는 작용을 하여 '대자보'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해서파관》 과 그 찬미자들이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들의 주장을 널리 퍼뜨린 이상,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연구를 한번 해보지 않을 수 없지요.
《해서파관》은 해서를 어떻게 그려내었나?
이 사극에서, 우한 동지는 해서를 매우 완벽하고 매우 숭고한 인물로 그려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백성들을 위하여 고민하였으며, 당시 억압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구세주였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몸에서 어떠한 결점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보아하니, 이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인 것 같은데, 그는 명나라의 가난한 농민들의 구세주였을 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 인민과 그 간부들이 배울 모범입니다.
자신의 영웅을 그려내기 위해, 저자는 매우 세심하게 설계를 했는데, 이 "청천대노야[4]" 의 출연을 주선하는 데만 극의 총 9장 중 3장이나 사용했습니다.
제1, 2장에서 해서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데, 극본은 먹물을 아끼지 않으며 서씨 집안(徐府) --즉 엄숭(严嵩[5])을 쓰러뜨린 후 수보(首辅) 자리에 올랐으며, 지금은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온 서계(徐阶)[6] 일가가 어떻게 농민들의 땅을 강점하고, 백성의 여식을 강탈하며, 관부에 뇌물을 주어 가난한 농민 조옥산을 때려죽였는지 묘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공당에서 농민 홍아란이 "비분에 가득 차 하늘을 부를"때, 한 통의 공문이 해서를 응천십부(应天十府[7])의 순무(巡抚)로 임명한다는 명을 가지고 긴급히 오니, 득의양양했던 벼슬아치들은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 어찌하면 좋으냐!"라고 외치고, 관아의 포졸들마저 "해청천이 오다니, 큰일이다!"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제3막에선 해서가 사복을 입고 등장하자, 작가는 그가 "속이 타들어가는 마을 백성들"과 대면하여 그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해청천에 대한 간절한 희망을 토해내고, 해서를 "공정하고 청렴한 관리", "명철하게 판결을 내린다", "좋은 평판이 널리 퍼져있다", "훌륭한 정치를 많이 베풀었다"라며 찬송하는 걸 듣는 장면을 안배합니다.
비록 봉건사회는 "위아래가 모두 벼슬아치의 세상"이고 "이치가 맞아도 돈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농민들은 한결같이 "해청천"이라는 관리만큼은 예외라고 믿으며 "해청천은 반드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홍운탁월(烘云托月[8]) 의 수법은 관중들이 오직 해서만이 농민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데, 이는 《해서파관》이 저자의 말대로 무슨 "봉건적 지배계급 간의 내부 투쟁"을 쓴 것이 아니라, 오늘의 괜객들을 위하여 농민의 운명을 결정하는 영웅을 그려낸 것임을 나타냅니다.
연극은 "퇴전(退田[9])"을 둘러싼 충돌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비록 우한 동지는 서문에서 극본을 "악덕 지주를 벌하는 주제로 개편하였다"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이 누명을 쓴 재판은 지주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악덕 지주를 벌하는 것과 누명을 벗는 일도 "퇴전"을 둘러싸며 진행됩니다. "퇴전"은 농민을 돕는 방법으로 쓰였으며, 연극이 최고조에 달하는 "패관(罢官 관직을 그만두다)"역시 이 땅을 돌려주기 위하여 관직을 그만두려고 한 것입니다.
극본은 "마을 주민 갑(甲)"의 입을 빌려 "우리는 모두가 서 씨네 집안의 소작농"이라 특별히 강조하여, 극 중의 내용인 가난한 농민과 서계 등 벼슬아치, 아전들과의 투쟁 중에서, 해서는 소작농들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관중들의 뇌리에 새겨 넣습니다.
과연 해 청천은 부임하자마자 "농민들을 돌보아"주었는데, 그는 부임하자마자 "고리대를 놓고 땅을 탐하다니 참 시정아치가 따로 없다!"라며 욕설을 퍼붓고, 농민들에게 그간의 일을 일러바치도록 하도록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도 참 "민주적"으로 증언을 하러 온 동네의 어르신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농민들은 이뿐만이 아니라 서 씨 집안과 "각 고을의 관리들"이 뺏어간 토지를 돌려달라며 "영감마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십시오" 하며 요구하니, 해서는 "방문을 붙여라! 각 고을의 관리들은 10일 이내에 강탈한 양민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원래만큼 돌려주어라!" 하며 호령을 했습니다.
"퇴전"이 끝나자, 원래 첨예하였던 계급모순은 갑자기 아무런 힘도 발휘하질 못하기 시작합니다. "마을의 백성들"은 해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영감마님이 백성을 보다듬어 주시니, 강남의 빈민들은 앞으로 좋은 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또 작가는 빈민들에게 "감지덕지하며, 밤낮을 가르지 않고 예배하며" 춤출 정도로 기뻐하고, 한목소리로 "오늘 청천을 만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집안을 재건한다. 땅이 있으니 어찌 옷과 밥이 걱정되느냐, 좋은 광경이 바로 눈앞에 있다!"라며 찬송가를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극본은 비록 봉건 제도는 고스란히 남아 있고, 지주의 잔혹한 억압과 착취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해서의 방법대로만 하면 농민의 '토지'와 '의식주' 문제는 죄다 해결되어 "좋은 광경이 바로 눈앞에" 올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주려고 합니다.
극본은 해서가 어떻게 '민중의 한을 풀어주고' '탐관'을 죽였는지를 묘사하는데도 힘을 쏟습니다. 극본은 "억울한 옥사가 많아도 전부 바로 세워야 한다" 하며, 해서가 "백성의 원한을 해소" 하려 결심하고, "탐관오리를 전부 쓸어내 버리" 려고 하며, "오늘은 반드시 백성들을 원한을 벗길 것이고, 법은 너그러움이 없으며 산처럼 무겁다"라고 선전합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극본 중의해서는 화정현의 지현(知县) 왕명우에게 참형을 내리고, 송강부의 지부(知府) 이명도에게 "삭관 탈직하여 조정을 명을 기다려라"라고 판결을 하며, 서계의 아들 서영에게는 교수형을 내립니다.
우한 동지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해서가 "재미없게 그냥 쓸쓸히 퇴장"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영을 처형하기로 결정 하였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관직을 그만둔 해서는 봉건왕조에 대항한, 승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갈 때, 서영은 사형에 처해지고, 서계는 놀라 기절하고, 신임 순무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해서는 인장을 높이 들고 "대장부는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있다!"라고 입으로 말하며, 마음속으로는 "나, 해서가 결국은 이겼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역시 자신만의 영웅적인 인물을 만드는 데에 "승리" 합니다.
이 연극에서, 긍정적인 영웅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오직 해서 한 사람뿐입니다. 농민들은 소극적으로 영감마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영감마님이 우리를 돌보아주십시오"라고 간청하며 '해 청천'에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해서의 이미지가 모든 다른 봉건 관리들보다 얼마나 숭고한지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극에 출현한 다른 관리들은 죄다 나쁜 놈들로 그려졌습니다. 해서의 부인과 가족들은 명철보신(明哲保身[10])파이며, 그의 어머니만 홀로 그를 지지했을 뿐입니다. 해서는 홀로 외롭게 단기필마로 경제부터 정치까지의 대혁명을 이루었습니다.
이 연극을 보면, 사람들은 우한 동지가 만들어낸 이 영웅적의 이미지가, 과거 봉건시대에 만들어진 해서를 찬양하는 연극과 노래에 등장하는 해서의 모습보다 더더욱 숭고하게 그려졌다고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비록 오한 동지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극본의 앞에 일부러 역사에 대한 설명을 쓰고, 또한 "해서파관본사<海瑞罢官本事>"에서 많은 사료를 발췌하여 사람들이 그가 완전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연극을 쓴 것이라는 인상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부득불 제기하게 됩니다: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에서 과연 이런 영웅이 나타난 적이 있을까요? 이 '해청천'은 과연 역사 속 해서의 실제 모습을 예술적으로 가공한 것일까, 아니면 우한 동지가 근거 없이 꾸며낸 인물인 것일까요?
거짓된 해서
우리는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자료에 따르면, 극에서 묘사된 역사적 모순과 이러한 모순을 다루는 해서의 계급적 입장은 역사적 현실과 배치됩니다. 극 속의 해서는 우한 동지가 자신의 견해를 선전하기 위해 지어낸 것입니다.
해서는 1569년 여름부터 1570년 봄까지 응천의 순무였는데, 당시 강남의 농촌에서는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이 매우 첨예했습니다. 정덕(正德)에서 가정(嘉靖)·융경(隆庆) 년에 이르기까지, 지주 계급이 온갖 방법으로 농민의 토지를 미친 듯이 마구 강탈해감에 따라, 토지의 집중도는 나날이 늘어났고, 농민들이 받는 착취는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일지록 (日知录)[11]》은: "옛 오나라 지역의 백성 중, 땅을 가진이는 십 중의 일이고, 소작농은 십 중의 구에 달한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송강 일대의 대부분의 토지는 지주들이 점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고염무(顾炎武)가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찾은 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추정은 명나라 중기 이후 강소 및 송강 지역의 상황과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장 많은 토지를 수탈한 것은, 정치 세력을 등에 업고 '황실 농장'을 확대하는 황족 지주 집단이고, 이 외에는 향촌에 있는 관료 지주가 있는데, 서계부터가 수많은 토지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일설에 따르 24만모(亩)이고, 일설에 따르면 40만 모(亩)인데, 이는 이는 오늘날 상하이시에 속한 송강현의 총 경작지 면적의 약 1/3 또는 절반에 해당합니다. 해서가 말한 "화적현의 지방관들이 수많은 땅과 저택을 가지고 많은 노비를 부리고 있어서 소민들 이 헐뜯고 미워한다"라는 바로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계급투쟁의 격화를 묘사한 것입니다. 토지의 집중은 농민과 지주계급 사이의 모순의 격화를 가속화시켰습니다. 《화정현지(华亭县志)[12]》에 따르면 "수많은 농민들이 파산하여 도망치고, 수많은 토지들은 황폐화되어 농지가 없는 사람은 소작농이 되었다"고 합니다
농민 계급과 지주계급의 모순은 봉건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이며, 계급투쟁의 첨예화는 필연적으로 지주계급 내의 다양한 계층 간의 상호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토지의 절대다수를 지주들이 점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관료 지주들이 계속하여 토지를 겸병하려면 그 대상을 중소 지주와 "사람을 고용하여 경작을 위탁하는" "부유한 집안" 즉 "부농"으로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따라 지주 계급 내부의 갈등도 첨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와 동시에, 관료 지주가 세금을 내지 않는 토지를 많이 은닉하여 착취의 과실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봉건왕조의 재정은 매우 어려워지며 점차 고갈됩니다. 이에 따라 일부분의 조정에서 벼슬을 살고 있는 현직 관리들은 지속적으로 토지 조사를 요구하며, 황실과 기타 장원이 중소 지주가 "민간의 전답"를 겸병하는 것을 제한하라 요구하였는데, 이는 조정과 민간의 각 파벌의 지주 간의 모순을 첨예화 시켰습니다.
한데 당시의 관료들이 토지를 겸병하는 데 사용한 주된 수법 중 하나가, 바로 해서가 "퇴전"에서 반대한 소위 "투헌(投献)"이라는 방법입니다.
"투헌投献"은 주로 두 가지 유형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토호 지주가 농지의 기존 주인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앞잡이(狗腿子)"를 매수하여 기존의 주인이 가진 농지를 자신에게 "헌납" 하게 만드는 방법인데, 이리하여 원래의 "부농"은 전답을 잃고, "농지를 바친"앞잡이는 그 농지의 마름이나 거간꾼이 됩니다.
다른 한 가지는 중소 지주, 부농이나 개별적인 소수의 자작농이 무거운 부역과 세금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밭을 관료 지주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명률(明律[13])》은 관료에게 자신의 품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부역과 세금을 감면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고, 따라서 그 전답을 관료 지주의 명의로 돌려놓으면 부역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료 지주는 그 틈을 노려 부역을 피하려는 중소 지주와 부농, 자작농의 토지를 강탈하였습니다.
애초에 토지의 대부분을 지주와 부농이 점유하고 있어 관료 지주가 "투헌"을 통해 강점한 토지 역시나 주로 중소 지주, 부농의 토지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사건의 본질입니다.
《해충개공전(海忠介公传)》이 기록하기를: "그리하여 부자(富者)들은 그의 지산을 사대부의 명의로 돌려, 소작농이 되어 조세를 바쳐서라도 부역을 피하기를 원하였는데, 이를 투헌(投献)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사대부가 향시에서 과거에 급제하기만 하면 부자들에게서 투헌을 받았고, 사대부가 권세를 잃어 몰락하면 벼락출세한 사람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강대하고 힘 있는 사람이 전답과 저택을 가져가도 아무도 감히 거절하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부자"는 당연하게도 가난한 농민이 아니라 부농입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바칠" 전답마저 없기 때문이지요. "부자"는 지방의 "권세를 잃은" 사대부나 정치적 신분이 없는 중소 지주와 부농들을 뜻합니다. 그들이 가진 "민간의 전답"은 계속하여 "강대하고 힘 있는" 관료 지주에 겸병당하여, 결국 "뺏어가도 아무도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정도에 도달하여 중소 지주와 부농들의 이익에 큰 손해를 끼쳤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황실과 조정의 재정 수입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해서가 송강 화정 일대에 도착하자마자 현지의 "생원들", "향반 중의 현명한 자", 심지어 몇몇 "지부과 지현(知府县, 부령과 현령)"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서계와 같은 대관료 지주가 거대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들이 "투헌"을 받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향반 중의 현명한 자"가 해서에게 말하길: "20년 동안 수령들이 지방 관리들의 편만 들어줘서, 백성의 자산은 점점 줄어드는데, 관리들은 점점 부유해집니다" 라 하였는데, 이 몇 글자가 중소 지주를 합병하는 대관료 지주들의 생생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 않나요?
이에 대하여 해서는 "어질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으니, 민심이 모두 분을 내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분을 내고 있다"라는 바로 중소 지주, 부농과 그들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대지주가 토지를 겸병하는 것에 대한 공통적인 정치적 태도입니다. 장강 이남 대지주들의 대변인인 대봉상(戴凤翔)이 해서가 "천한 백성"이 제멋대로 굴게 방종한다고 공격할 때, 해서는 상술한 증거들을 통해 자신의 '퇴전'이 이 사람들의 요구에 근거하고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보아하니, 해서의 말은 사실인 것 같군요.
그의 "퇴전"은 이러한 "자산이 점점 줄어드는" 중소지주와 부농의 공통된 요구를 반영하였고, 또한 지주계급 내부의 모순과 수많은 농민들과 지주계급 사이의 갈수록 첨예해지는 계급모순을 완화하기 위한것이며, 또한 조세수입을 증가시켜 조정의 재정난을 해결하는데도 유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한다면, 《해서파관》이 계급관계를 어떻게 왜곡하였는지가 명백히 밝혀집니다.
해서가 지방관리들에게 "퇴전"을 요구한 것은 지주가 농민에게 전답을 반환하라고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명사(明史)》나 다른 해서를 쓴 전기들은 모두 해서가 지방관에게 "퇴전"을 요구한 대상이 "투헌"받은 전답이라고 명백하게 기록합니다
"공(公)은 엄격하게 정사를 다스려, (전답을) 헌납 받은 자들은 반환하거나 돈으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토지 겸병을 약화시키고 대지주를 타격하는 것인데, 이중 관청에 다시 반환되는 것들을 제외하면, 되돌려지는 전답의 절대다수는 원래 "땅을 바친 약자"인 "부자", 즉 중소 지주와 부농의 손으로 돌아가니 실제로는 중소 지주와 부농의 이익을 보호한 것입니디. 가난한 농민과 소작농은 애초에 "바칠"수 있는 토지가 없었고 "돌려줄" 돈도 없으니, "퇴전"을 한다고 해도 당연하게도 그들의 손엔 들어오진 않을 것입니다. 한데 어떻게 해서가 일편단심으로 빈농을 위해 땅을 얻으려고 "전투"한다고 날조할 수 있겠습니까?
해서가 서계에게 "퇴전"을 요구한 것은 "서 씨 가문의 소작농"들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서일까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해서는 이춘방에게 쓰는 편지에서 서계에게 퇴전을 요구한 이유를 적었습니다:
"만약 전답의 절반 이상을 되돌려주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품성이 교활하고 사나운데, 과연 이들을 저지할 수 있을까? 어질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쌓는 것은 백해무익할 뿐이니, 뒷사람들이 이를 거울삼아 경계할만하다... 이는 재산 중 절반만을 푸는 것으로, 그자가 앞으로 백 년 동안 평온하게 살수 있도록 하는 계책이니, 부디 이에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과연 이보다 해서의 계급적 입장을 더 이상 명확하게 밝힐 수 있을까요? 퇴전은 명백히 백성들이 "교활하고 사나워지는"것을 멈추기 위해서이고, 지주 계급이 갈수록 첨예해지는 계급 투쟁에서 타도되지 않기 위해서이며, 서계가 "백 년 동안 평온하게 지낼 수 있기"를 위해서이지, 어디를 봐서 빈농들의 의견을 구하여 "서 씨네 소작농" 들의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일까요?
해서가 "퇴전"을 한 것은 "백성을 돌보기 위해"서 일까요? 해서 스스로가 《독무 조약(督抚条约)》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길, 그가 총독으로서 취한 조치는 모두 "적폐를 제거하여 평화롭게 만들고, 조종조부터 내려온 법을 회복시키는 것" 이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조종조"에 만든 《명률(明律)》은 "다른 사람의 전답과 재산을 자신의 것인처럼 속여 지위가 높고 권세가 강한 관리에게 '투헌(投献)' 했을 시, 공여 한자와 수여받은 자 모두 각각 장 100대를 치고 3년간 노역을 시킨다"라고 이미 규정했었군요. 이것이 비로 해서가 처리한 모순이 아니었나요?
명나라 왕조는 일찍이 "투헌"을 반대하는 법률은 계급의 내부 모순을 완화하고 토지 겸병이 격심해지는 것을 방지하여 지주계급의 독재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제정하였습니다. 비록 이 법률은 나중에 사문이 되었지만, 해서는 그저 이 범위 안에서 "투헌" 반대 운동을 펼쳤을 뿐인데, 이를 어떻게 강남의 농민들을 "돌봐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해서가 "가난한 농민"들을 위하여 "고리대"를 반대하였나요? 이는 대봉상(戴凤翔[14])의 공격을 해서가 반박하면서 한 말을 한번 들어보는 것이 좋겠군요:
"예전에는 징세 관입 추수할 때 오면, 우선 자신이 사적으로 빌린 돈을 갚은 다음, 나중에 세금을 계산하였습니다. 부호 역시 추수할 때를 노려 빚을 갚도록 하는데, 공(公)과 사(私)를 같이 내라고 하니, 둘 다 완전히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선 세금을 먼저 전부 납부한 다음에 사적인 빚을 갚으라고 하는 거지, 아예 빚을 갚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공(公)"은 봉건왕조며, "사(私)"는 지주 토호입니다. 해서는 자신이 농촌의 지주들이 착취에 반대하지 않고, "고리대"도 반대하지 않으며, 오직 황실과 조정의 재정수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의 지주들이 착취의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해서는 단 한 번도 농민과 지주 간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이 모순을 완화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해서는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을 섬길 땐 의리가 없어서는 안되고, 그 손익(损益)을 조정하여 오랫동안 갈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스스로 말하며, 그가 하는 일이 "손익을 조정" 하는 일이고, 그 목적은 대지주의 착취가 지주계급의 근본적인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법이 정한 범위 내로 제한하여, 농민의 반항을 약화시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봉건 착취가 "오랫동안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솔직하게 밝힙니다.
그는 농민들에게 봉건 통치에 복종하고 유가의 '예의'를 준수하며 "도적이 되지 말라"라고 서너 번 거듭하여 요구하였고, 이미 발생한 농민봉기에 대해선 "병사를 쓰는 것과 백성을 돌보는 것, 둘을 병행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라며 당근과 채찍을 같이 들것을 주장합니다.
그가 가장 반동적인 대지주를 반대하는 까닭은, 지주의 토지 소유제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주의 토지 소유제와 지주의 농민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봉건적 지배계급 내부의 각 집단, 파벌의 공통적인 이익이며, 지주계급에게 있어서 "장기적인 이익"이기도 합니다.
해서를 농민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로 묘사한 것은, 적과 우리를 혼동하고 지주계급 독재의 본질을 말살하며 지주계급을 미화시킨 것입니다. 해서는 황제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계속하여 표명하였고, 고공(高拱)에게 쓰는 편지에서 "온 힘을 쏟아 강남땅에 수천수백 년 동안 유지될 기초를 세워서 황상이 저를 알아봐 주신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라며 자신의 속마음을 통렬히 밝혔는데, 그가 뭐 하려 '수천수백 년 동안 유지될 기초'를 뒤흔드는 일을 하려고 할까요?
"퇴전"에 대한 묘사는 거짓된 것이라면, "평원옥(平冤獄 억울한 옥사를 바로잡다)"에 대한 묘사는 진실된 것일까요? 우리가 찾은 자료에 근거하자면, 우리는 부정적인 대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송강의 지부(知府), 화서의 지현(知县)은 처형, 파직된 적이 없습니다. 해서가 응천 군무에 임명된 기간 동안, 소주와 송강 지역에서 현령급 이상의 관리가 파직당한 기록 자체가 없어요. 서계(徐阶)의 아들은 애초에 죽은 적이 없고, 충군(充军 죄인을 군역에 복무하도록 한 형벌) 된 적은 있다만, 이는 해서가 아닌 서계가 관직을 그만둔 후 재기하여 수상이 된 그의 정적 고공(高拱)이 한 짓입니다, 그 후 장거정이 수상 자리에 오르자 이 판결은 곧 취소됩니다.
《명사•고공전(明史•高拱列传)》은 이와 같이 기록합니다:"서계의 자제들이 지방에서 횡포를 부리니, 고공은 옛 지부 채국희를 감사로 삼아 그들의 목록의 작성하고 죄다 변방에서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고공은 이렇게 서계의 사람들을 전방위로 압박하였는데, 이는 고공의 실각하고 나서야 풀어졌다."
《서계열전(徐阶列传)》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서계의 아들이 잡혀간 사건의 본질은 고공이 기회를 틈타 서계에게 보복을 한 것이고, 이 일의 집행자 역시 해서와는 무관한 다른 관료입니다."
엄숭이 실각한 이후, 서계, 고공, 장거정(张居正)은 서로 장기간의 권력투쟁을 벌였는데, 내각의 서로 다른 정치집단의 알력 다툼을 해서에게 억지로 옮겨와, 이를 해서가 "농민의 편에 서서 민중의 분노를 잠재웠다"라고 포장하니, 이는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과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요?
우한 동지는 "서계의 아들은 군역형에 처해지기만 했다"라는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해서를 극구 미화하기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영웅을 창조하기 위해서라면, 역사를 고쳐 쓰는 것마저 마다하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
해서는 극에서 나온 것처럼 "민주적"이지도 않습니다. 정 반대로, 해서는 "강남의 백성들은 품성이 교활하고 사납다", "온갖 사건이 있는데, 그중 무고가 아닌 사건이 열 개 중 아홉을 넘는다"라고 여겼으며, 그는 자신의 입으로 "조송(刁讼 무고)"를 막기 위해 "아문(衙门 관청) 앞에 족쇄를 찬 자들을 항상 일고여덟을 두고, 일단 자백을 위해 고통스럽게 때렸다"라고 하며, 이를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또한 해서는 《흥혁조례(兴革条例)》에서 "의옥(疑狱 진상이 불명확한 사건)"을 다루며 말하길: "말로 인하여 다툴 땐, 향완(乡宦 향반)에게 굴욕을 주느니, 차라리 소민(小民 지위가 낮은 백성)에게 굴욕을 주어 질서를 지켜야 한다"라고 하며, 작은 글씨로"향완과 소민 사이에는 귀천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질서를 지킨다'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주석을 남겼습니다.
"귀천의 차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소민에게 굴욕을"주어도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주계급 독재의 반동적 본질의 표현된 것입니다. 한데 지금 와서 해서가 민주적이며, 심지어 그가 농민에게 "가르침"을 요청했다 하고 억지를 부리니, 이것은 해서의 정치적 입장을 정반대로 뒤바꾸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 《해서파관》의 해서를 보고 있으면, 이 해서가 조작된 가짜 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부르주아적 관점으로 개조된 인물입니다. 물론 사극은 예술적 가공과 재창조가 필요하며, 우리는 새로이 쓰인 사극이 세부 사항까지 모두 역사와 같을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물의 계급적 입장, 계급관계는 반드시 역사적 진실에 부합해야 합니다.
비록 우한 동지는 일찍이 스스로 사극이 "가능한 역사의 진실에 비교적 부합하도록 힘써야 하며, 왜곡이나 날조는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현실은 웅변을 이기는 법, 이 신편 역사극 속의 해서는 이미 합리적인 상상과 전형(典型)의 요약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그저 "왜곡, 날조 "와 "차고풍금(借古讽今)"의 범주에 속할 뿐입니다.
계급 투쟁의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해서든, 해서 이후의 봉건 관리든 간에, 이미 부패하고 몰락한 명나라 황실의 청춘을 되살릴 수 없었고, 농민들의 증오의 뜨거운 불길은 더욱이 누그러뜨릴 수 없었습니다. 해서 이후에도, 송강의 농민들은 여전히 가혹하고 잔인한 압제와 착취에 시달렸으며, 토지 겸병과 농민의 유랑은 가일 차게 진행되었으며, 계급모순은 계속하여 첨예화되었습니다.
해서는 1587년에 죽었는데, 그 후 농민들의 봉기는 폭풍처럼 거세게 일어나 성난 파도와 같은 기세가 되었습니다. 명나라는 1644년에 멸망했는데, 이는 해서가 죽은 후 60년도 채 채우지 못했을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역사적 현실 앞에서, 각본에서 빈농들이 "퇴전"에 대하여 "땅이 있으니 어찌 옷과 밥이 걱정되느냐, 좋은 광경이 바로 눈앞에 있다!"라고 노래를 부르도록 하다니, 이는 웃길 정도로 황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해서파관》은 무엇을 선전하였나?
극 중의 해서가 거짓된 해서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함께 작가가 이러한 예술적 가공이 된 이미지로 무엇을 선전하려 했는지 들여다보도록 하지요.
모두 알다시피, 국가는 계급 투쟁의 도구이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입니다. 계급적이지 않은, 초계급 적인 국가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적인 관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반한다면, 봉건주의 국가는 지주계급이 농민에 대해 독재를 실행하는 도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봉건주의 국가의 법률, 법정과 통치권력을 집행하는 관리는 '청백리'나 '호관 (好官, 좋은 관리)'를 포함하여 지주계급 독재의 도구일 수밖에 없으며, 결코 초계급적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에 동시에 복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주계급 내부에는 다양한 계층과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계급투쟁 형세의 변화로 인해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문제, 대지주와 중소 지주, 부농의 이익을 대하는 태도, 혹은 농민을 억압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고 투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본질이 지주계급 독재를 수호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느 때라도, 우리는 이러한 지주 계급의 내부 투쟁을 농민과 지주 사이의 계급 투쟁으로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청백리'와 '탐관오리' 사이의 투쟁을 예로 들자면, 청백리가 지주계급의 법정에서 지주계급 법률의 특정 조항에 의거하여 일부 '탐관'을 처벌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고, 몇몇 농민들이 고발한 것이 공교롭게도'청백리'가 반대하는 어떠한 파벌이나 집단의 일원이라 개별 농민들이 이 '청백리' 가 주도한 재판에서 '승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투쟁 경험이 없는 많은 농민들을 미혹시켜, 그들이 '청백리의' 계급적 입장이나 봉건국가와 봉건 법정의 계급적 본질을 명확하게 볼 수 없게 하였는데, 지주계급도 종종 이러한 현상을 이용하여 농민들의 자각을 마비시키고, '청백리'를 계급 통치의 본질을 은폐하는 도구로 삼아 무장 탄압을 보조하고 농민에 대하여 계급투쟁의 진행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명사(明史)》에도 지주 계급이 완병지계로서 '청백리'를 파견하여 시간을 끌다, 농민 봉기 군을 일거에 없애버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청백리'가 아무리 '청렴'하고, '호관'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들은 결국 지주계급이 농민을 계급 지배 하는 수단인 '청백리' 고 '호관' 이지, 결코 그 반대 일수는 없습니다.
허나 《해서파관》은 우리에게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청백리"는 지주계급 독재의 도구가 아닌, 농민계급에게 봉사하는것 이라는 말입니다.
자, 보시죠. 극 중의해서는 비록 봉건왕조의 흠차대신(钦差大臣)이지만, 그는 가난한 농민의 이익을 대표하여 시계를 향한 격렬한 투쟁을 벌입니다. 이 투쟁에서, 한편으로 "청백리"인 해서는 '서가 집안의 소작농'과 모든 가난한 농민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영웅으로 나타나 지주계급 독재를 실행하는 모든 다른 관리들과 대립하는 모습으로 나오며, '청백리'와 '탐관오리' 사이의 모순은 농민의 보호와 탄압의 모순, 농민에게 토지를 반환하는 것과 농민의 토지를 강점하는 것 사이의 모순으로 쓰여있지 청백리'가 지주계급 독재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농민들은 모두 소극적으로, 혁명적인 투쟁정신이 전혀 없다는 식으로 쓰여지며, 그들의 유일한 역할은 무릎을 꿇고 '해청천'에게 고자질을 하며, 청렴한 영감 나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청백리'를 자신의 구세주로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하게도, 《해서파관》의 저자는 역사를 전진시키는 동력이 계급투쟁이 아닌 "청백리"에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인민 대중은 스스로 일어나 자기가 자신을 해방시킬 필요 없이, 어떤 "청백리"가 은혜를 베풀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그 즉시 "좋은 나날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가의 문제는 "아마도 부르주아 학자, 작가, 철학자들이 가장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은 문제일 것이다[15]."
그렇다면 이른바 "청백리", "평원옥(平冤獄)"은 국가 문제의 일부분으로서, 아마 지주 부르주아 계급이 특히 혼란스럽게 만들어놓은 문제일것으로, 이는 인민들의 사상을 독해(毒害) 하는 일종의 미신이 되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는 이러한 허상을 폭로하고 이러한 미신을 타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한데 《해서 파관》은 정 반대로 이러한 미신을 타파하지 않을뿐더러, 신편 역사극이란 미명 아래 지주 계급의 관리, 법정, 법률을 미화하여 이러한 미신을 심화시킵니다. 농민들은 원래는 그래도 "위아래가 모두 벼슬아치의 세상"이며, "이치에 맞아도 돈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해서가 등장하자마자 분개하여 농민과 지주, 토호에게 "어느 왕법에 의한 것이냐"라고 묻고, "이건 너희의 잘못도 있다, 왜 진작에 알리지 않았느냐?" 하며 농민을 혼내며, 억울한 재판을 바로잡는 과정에선 "왕의 자식이 법을 범해도 서민과 같은 처벌을 받는다"와 같은 "왕법"의 계급적 본질을 덮어 감추는 말을 반복적으로 강조함여, 해서와 같은 "청백리"가 "왕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법정이 농민을 보호하고, 백성들의 한을 풀고, 억울한 옥사를 평정하고, 농민들이 땅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이는 지주계급의 국가기계를 농민을 보호하는 도구로 여긴것이 아닌가요? 이것은 지주계급독재하의 농민 탄압이란 본질을 없던 일로 여겨버린 것이 아닌가요? 이것은 지주 계급의 청렴한 영감나리들이 관아에서 '백성들을 돌봐주고' 있으니, 농민들은 이들에게 일러바치기만 하면 해방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와 같은 지주계급 국가를 대대적으로 미화하고 혁명적이지 않은 계급조화론을 선전하는 이런 연극을 가지고, 무슨 "역사극의 창작도 반드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우한, 《해서를 논하다》)고 말하나요?
인류 사회에 계급과 국가가 나타난 이래, 세상에 '영감 나리가 백성을 돌봐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중국에선 지주계급 개량파 뿐만이 아니라, 설사 부르주아 민주파 일지라도 농민들에게 '좋은 나날'을 가져다준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위대한 혁명만이 지주 부르주아 계급의 국가 기계를 완전히 부숴버렸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끄는 노동자-농민 동맹에 기초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만이 강남과 전국 농민의 '토지'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누구도 뒤집을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한 동지가 스스로 자신이 그려낸 해서의 이미지를 마오쩌둥 동지가 거듭 천명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관점과 대조하여 보아, 우한 동지가 지주 부르주아 계급의 국가관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국가관을 대체하고, 계급 조화론으로 계급투쟁론을 대체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지주 부르주아 계급이 수천 년 동안 자랑해 온 낡은 관점을 선전하는 것은 도대체 왜인가요? 과연 누구에게 유리한 것인가요? 우리는 이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가려내야 합니다.
《해서파관》은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는가?
해서는 영향력 있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보아하니, 그는 그는 봉건사회가 쇠퇴할 무렵, 지주계급 중에서는 좀 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 이였던것 같습니다. 그는 봉건 제도에 충실한, 봉건 왕조의 '충신'입니다.
그는 당시 농민 계급과 지주계급 사이의 첨예한 모순적인 어떠한 특정 현상들을 보았고, 지배계급 내부의 특정 부정부패한 현상들이 황실 조정의 통치에 불리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봉건적 통치를 공고히 하고, 농민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첨예한 계급 모순을 완화하기 위하여, 봉건 왕조의 근본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용기를 내어 봉건 왕조의 이익을 해치는 특정 집단이나 특정 조치에 대해 첨예한 투쟁을 진행했습니다.
많은 문제에서, 그는 중소 지주와 부농과 이익을 공유하고 토호 지주를 억제하였지만, 그의 목적은 여전히 농민에 대한 전체 지주 계급의 독재를 강화하고 황실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치안소(治安疏)》라는 상소문을 올렸었는데, 이는 우한 동지나 많은 글과 희극들은 이를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였고,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극 《해서상소(海瑞上疏)》를 저작하고 공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상소의 머리말에서 "주군께선 천하의 신하와 백성, 그리고 만물의 주인입니다."라고 한 것처럼, 그의 목적은 황실 조정을 위해 "통치가 만세 동안 계속 안정될 방법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행동 역시 그가 얼마나 군주에게 충성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제(嘉靖)는 그를 죽이지 않았고, 그가 죽은 후 황제는 매우 슬퍼하며 "태자소보(太子少保, 관직명)로 추존하고 충개(忠介)의 시호를 올린다" 하였습니다. 예부 좌시랑은 그의 제사를 지내며 말했습니다: " 비록 외부의 강압으로 인해 같이 있을 수 없었지만, 하나 그 진심 덕에 마침내 만났구나!" 봉건왕조는 해서가 지주계급 이익의 충실한 보위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해서의 계급적 본질이며 해서의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입니다.
우한 동지처럼 해서를 농민 이익의 대표자로 묘사하고, 해서가 "인민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해 생각한다"라고 하며, 그가 "인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고, 심지어 그를 "봉건 관료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으로 묘사하는 것은 해서의 계급적 면모를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명나라 왕조는 해서가 "백성을 자식처럼 보호한다"라고 칭송했고, 우한 동지는 해서가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해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이 둘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요?
예로부터 지주 계급의 역사서는 수많은 자료로 해서가 '모든 것을 백성을 위하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대서특필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해서가 강남 순무(巡抚)에 임명되었던 시절에 어떻게 서계를 크게 반대하여 "퇴전(退田)"을 벌였는지, 어떻게 "한 달도 안 되어" 오송강(吴淞江)의 치수시설을 고치고 인민들에게 "해용왕(海龙王)"이라 찬양받았는지 등등입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엔 "백성들은 시장을 닫고 강변에서 애도하여, 하얀 상복과 상모를 차려입고 그를 보내는 사람이 강의 양안을 빼곡히 채웠으며, 술을 땅에 뿌리며 우는 사람이 백 리 동안 끊이지 않았다"합니다. 이러한 기록에 더해 옛 소설과 연극의 연출과 함께 사람들을 쉽게 미혹합니다. 하나 이러한 "관서(官书 공문서)"의 기록은 명백하게도 지주 계급이 과대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계급적 관점에서 신중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해서가 "투헌(投献)"에 반대하고, 서계에게 "퇴전(退田)"을 요구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 서계가 실제로 땅을 돌려주었는지, 얼마만큼 돌려주었는지, 진짜로 돌려준 건지 돌려주는 척만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부 믿을만한 자료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담천(谈迁)이 쓴 《국교(国榷)》의 융경(隆庆) 5년 7월의 기록에 따르면, 서계는 4만 모(亩)에 달하는 전답을 돌려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아주 명확하게 관아에 돌려준 것이었지, 농민에게 반환한 게 전혀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반 이상의 재산을 반환했다"쳐도, 이는 여전히 지주 계급의 이익을 위한 일일뿐더러, 해서 혼자만 했던 일 역시 아닙니다. 서계가 조정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을 때, 그도 "퇴전"을 한 바 있습니다. 가정(嘉靖) 제의 넷째 아들 경왕(景王) 재천(载圳)이 죽었을 때, 서계는 "경왕이 차지하고 있던 수만 경의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주자며 상소를 올리니, 옛 초나라 지역의 백성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합니다.
만약 "땅을 백성에게 돌려주었다" 할 때의 "백성"이 어느 계급인지를 분석하지 않는다면, 만약 우한 동지가 주장하는 데로 "퇴전"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곧 영웅이라면, 수만 경의 황실 농토를 돌려준 서계는 해서보다 더욱 위대한 영웅이 아니겠나요?
오송강의 수리시설을 수리한 것은 확실히 있던 일이지만, 과연 어느 정도 수리하였는지는 한번 의심해 볼 만합니다. 간단히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조건 하에서도 강의 치수는 쉬운 일이 아닌데, 과연 해서는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강을 정비하는 게 가능했을까요?
해서가 《개오송강서(开吴淞江疏)》에서 스스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원래 "강의 넓이를 15장(丈) 만큼 키우기로 의논하였"고, 정월 초삼일부터 착공하였는데 2월 중순에 돈을 다 써버려, "공사가 너무 커 은전(银两)이 모자란다"라며 공금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적어도 한 달여 동안은 원래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어려움도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한 동지는 "진도는 매우 빨랐고, 한 달도 안 돼 완공되었다"라며 찬양을 했는데, 이러한 과장은 심지어 해서 본인이 한 말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장례식에 대한 묘사도 한번 생각을 해볼만합니다: 해방 이전, 수많은 가난한 농민들은 지주 계급의 가혹한 착취 아래서 옷조차 제대로 못 입을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많은 농민들은 몇 세대에 걸쳐 누더기 옷을 돌려가며 입었고, 자신의 가족이 죽어도 입을 상복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하얀 상복과 상모를 번듯하게 차려입고 노변에서 제사를 지낸 사람들은 결코 가난한 농민들이 아니고, 우함 동지가 말한 "수많은 인민"들도 아닌 지주, 부농, 상인 중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신편 역사극이 진정으로 사적 유물론의 원칙을 관철하고, 계급적 관점으로 이러한 사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진위를 가려내어, 해서의 본래 모습에 따라 이 인물을 묘사하여 관중들이 그의 계급적 본질이 무엇인지 볼 수 있도록 하고, 사적 유물론의 관점으로 역사적 인물의 계급적 모습을 알게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해서를 찬양하는 많은 과거의 소설과 연극들이 퍼뜨린 나쁜 영향을 타파했다는 점에선 오히려 긍정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한 동지는 역사적 진실을 위배할 뿐만 아니라, 지주 계급이 해서를 찬양할 때 사용한 입장과 자료를 그대로 베끼고, 한술 더 떠 그를 가난한 농민들의 "구원자"이자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승리자로 만들어 오늘날 인민들의 본보기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올바른 방향을 완전히 벗어나 것입니다.
우한 동지는 사람들이 그가 묘사한 해서를 "배우도록" 분명하게 요구하였는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퇴전(退田 땅을 돌려주다)"을 배워야 하나요? 우리나라의 농촌은 이미 사회주의 집단소유제를 실현하였고, 위대한 인민공사를 설립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누구한테 "땅을 돌려주라"라고 하라고 하는 건가요? 인민공사한테 "땅을 돌려주라"라고 하는 건가요? 또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누구에게 돌려주라고 하는 건가요? 지주에게 돌려줄까요? 농민에게 돌려줄까요? 사회주의의 길로 꿋꿋이 나아가고 있는 5억 농민들이 이런 '퇴전'을 '본받을' 필요가 있나요?
"평원옥(平冤獄 억울한 옥사를 바로잡다)"을 배워야 하나요? 우리나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한 국가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모든 피억압 피착취계급이 지상의 가장 어두운 지옥에서 뛰쳐나와 지주 부르주아 계급의 족쇄를 부수고 사회의 주인이 된 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억울한 옥사를 바로잡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퇴전"이나 "평원옥"을 배우는것이 아니라면, 《해서파관》의 "현실적 의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마 우한 동지는 이렇게 말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퇴전"과 평원옥"을 배우는 게 잘못되었다면, "옛 시절의 향원[16](乡愿)과 오늘날의 관료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그의 영웅적인 "대장부" 정신을 배웁시다. 이건 괜찮지요? 제가 《해서파관》의 시놉시스에서도 이 연극은 "해서의 강정불아(刚直不阿[17]) 와 강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썼다"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오늘날의 우리도 내부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이런 종류의 "진짜 사나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극본은 해서가 "감초(甘草)"를 반대하고 "향원(乡愿)"을 욕하며, 서계를 전형적인 "향원(乡愿)"으로 묘사한 것이 두드러집니다.
관료주의에는 확실히 반대해야 합니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결코 느슨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관료주의에는 사회적 뿌리와 사상적 뿌리가 있으며, 이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이 나왔던 "강직불아(刚直不阿)”, "대장부", "진짜 사나이" , "반(反) 향원" 등등은, 먼저 그것의 계급적 내용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어느 계급을 위해서인가요? 또 어느 계급에 대해서인가요?
각 계급은 이러한 개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의 구체적인 계급적 내용을 떠나 추상화할 수 없습니다. 지주 계급이 제창하는 "강직불아", "대장부" 등등은 그 고유한 계급적인 함의를 가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성, 전투성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오쩌둥 동지가 루쉰의 유명한 시 두 줄에 해설 할때 남긴 내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매서운 눈초리로 뭇사람들의 질타에 맞서며, 기꺼이 머리 숙이고 대중을 위해 소처럼 봉사하겠다(横眉冷对千夫指,俯首甘为孺子牛[18] ), 여기서 '천부(千夫)'는 적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흉악한 적에 대해서도 우리는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자(孺子)'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인민 대중을 말하는 것입니다."(《연안 문예 좌담회에서의 발언》) 적을 대할 때는 "매섭고 차가운 눈초리로 대하고 (横眉冷对 행미냉대)", 인민을 대할 때는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만약 이렇게 명확한 계급적 입장과 계급적 관점을 떠나, 추상적으로 무슨 "강직불아(刚直不阿)”, "대장부" 운운하고, 심지어 "대중을 위해 소처럼 봉사하는것(俯首甘为孺子牛)" 마저 "향원(乡愿)"이라 칭하며, 매섭고 차가운 눈초리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노동 인민을 대하는 것을 "강직(刚直)" 이라 칭하고, 이러한 오만함으로 무슨 "퇴전(退田)", "평원옥(平冤狱)"을 하여 "오늘날의 관료주의를 반대"하려고 하고, 노동인민들을 향하여 파관(罢官 벼슬을 그만두다) 하는 것은,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려고 하는 것입니까?
만약 건망증이 없다면, 우리는 1957년 생산수단의 소유제에 관한 사회주의적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료된 이후, 한 줌의 사람들이 갑자기 "향원(乡愿)"을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향원(乡愿) 반대', '감초(甘草) 반대'라는 구호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 간부와 민주인사(민주당파의 인사) 중의 좌파를 반대하며, 당의 영도자가 '소덕(小德[19])*에 얽매인 향원'이라며 악담을 퍼부었고, 공산당과 함께 가는 민주인사들을 '감초주의'라고 모함했는데, 이러한 단어는 당시의 몇몇 신문에서 수두룩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주 부르주아 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당과 인민의 최고 이익을 위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민주적이고 설득적인 수단을 채택하고 단결--비판--단결의 방법으로 인민의 갈등을 올바르게 처리하여 인민들이 열심히 진보로 걸어갈 수 있도록 촉진하는 것은 모두 "향원"이자 "감초"이기 때문입니다.
지주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입각하여, 끝까지 잘못을 견지할 용기를 가지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반대파가 될 용기를 가지고,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을 단번에 때려죽일 용기가 있는 것이 "대장부"이고 "강재교(强哉矫)"이며 "약방의 감초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의 본질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해서 파관》과 그 평론가들은 왜 다시 이걸 주워와 부추기는 것일까요?
우한 동지는 끈질기게 한 이론을 선전한 적이 있습니다: "사극은 봉건시대의 어떤 인물들의 '좋은 품덕'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도덕윤리의 구성부분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도덕적 문제를 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역시 부르주아 학자, 작가, 철학자들이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은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해서파관》처럼 해서의 사상과 행위를 전부 공산주의 도덕의 "구성부분"으로 삼는다면, 마오주의는 무엇 때문에 배우고, 사상개조는 무엇 때문에 하고, 노농 결합은 무엇 때문에 하고, 혁명화와 노동화는 무엇 때문에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제 이 문장이 가장 먼저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해서파관》이라는 "대자보"의 "현실적 의의"는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 인민에게 있어서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이 작품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1961년은 우리가 3년간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일시적인 경제난에 봉착하였을 때입니다.
제국주의자와 각국의 반동파, 현대 수정주의가 다시금 중국에 반대하는 발동하고 고조시킨 가운데, 우귀사신들은 "단간풍(单干风[20])", "번안풍(翻案风[21])"을 불어댔습니다. 그들은 그들은 "단독경영(单干)"의 "우월성"을 선동하고, 개인경제의 회복을 요구하며, "퇴전(退田)"을 요구했는데, 이는 바로 인민공사을 무너트리고 지주와 부농의 죄악적인 통치를 회복시키려는 것입니다.
저 옛 사회에서 노동 인민에게 무수한 억울한 옥사를 만들어줬던 제국주의자들과 지주, 부농, 반동, 우파들은 억울한 옥사를 만들 권리를 잃었는데, 그들은 그들이 타도 된 것이 "억울" 하다고 여기며 "평원옥(平冤狱)" 을 떠들어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나 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맞서고, 그들을 위해 의분을 느끼며, 그들을 위해 "판결을 뒤집고", 그들이 다시 집권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퇴전"과 "평원옥"은 당시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의 초점이었습니다.
계급투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반영되고, 작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관없이, 이 작가 저 작가의 펜대에서 반영됩니다. 이러한 반영은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객관적 법칙입니다.
《해서파관》은 비로 이러한 계급투쟁 중 한가지의 형식을 반영합니다. 만약 우한 동지가 이러한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부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해 주길 바랍니다: 1961년에, 인민들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해서파관》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울"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해서파관》은 향기로운 꽃이 아니라, 한 뿌리의 독초입니다. 비록 이 연극은 몇 년 전부터 발표와 공연이 되었지만, 이 연글을 칭송하는 글은 계속 끊이지 않고 있고, 유사한 작품과 글도 대량으로 유포되어 큰 영향에 더불어 큰 해악을 광범위하게 퍼트렸습니다. 이를 해명하지 않으면 인민의 사업에 매우 유해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논의에서 계급 분석적 관점을 가지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반드시 현실적, 역사적 계급투쟁에 대한 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각주
- ↑ 우한(1909-1969),당시 베이징시 부시장
- ↑ 약방의 감초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남쪽의 포청천이 될 용기가 있다(羞为甘草剂,敢做南包公). 우한의 《해서패관》원문에서 인용한 문구로, 약방의 감초처럼 어딜가나 절충, 타협하는것이 아닌 남방 포청천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뜻
- ↑ 옛일을 빌려 현재를 풍자한다
- ↑ 봉건시대의 중국에서 공명정대한 판결과 인품가진 관리를 칭송할때 쓰는 별명. 이 별명을 가진 가장 유명한 인물은 포청천. 아래의 "해청천" 역시 같은 의미.
- ↑ 엄숭(严嵩)(1480-1567), 명나라의 관리이자 서계의 정적. 현 중국에서는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 ↑ 서계(徐階)(1503~1583), 명나라의 재상.
- ↑ 현 중화인민공화국 남경시
- ↑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내는 동양화 기법으로, 여기선 주위의 것을 안받침하여 주체를 두드러지게 한다는 의미.
- ↑ 땅을 돌려주다
- ↑ 적절한 행동으로 자신을 잘 보전한다는 뜻. 여기에선 반어법으로 사용됨.
- ↑ 일지록: 명말청초의 학자 고염무(顾炎武)가 쓴 필기체 문집
- ↑ 명나라-청나라 시기 화정현(현 상하이 인근)의 풍토지리와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역사서
- ↑ 명나라의 법전
- ↑ 희극 <해서파관>의 등장인물
- ↑ 레닌, 1919년 7월 11일 스베르들로프 대학의 연설에서
- ↑ 향원(乡愿):《논어 양화편》 자왈: "향원덕지적야.(子曰: 鄕原德之賊也.)에서 유래한 말. 매사에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지 않고 시속에 맞추어 두루뭉술하게 삶으로써 온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사람
- ↑ 강직하고 아첨을 하지 않는 정신
- ↑ 루쉰의 시《자조自嘲》의 문구
- ↑ 소덕: 소인지덕(小人之德)을 줄인말
- ↑ 단독 경영을 하자는 풍조
- ↑ 판결을 뒤집자는 풍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