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좌파도서관

초대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출생
출생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왕국 샤르데냐 알레스
사망
사망
1937년 4월 27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
국적
국적
이탈리아 왕국
약력
약력
칼리아리 고등학교 졸업
토리노 대학 중퇴
《아반티》[1]편집장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개요

이탈리아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생애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알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해서 건강문제를 많이 겪은 나머지 성인이 되어서도 키가 150cm도 안 되었다. 1898년에는 아버지인 프란체스코 그람시가 횡령으로 투옥되는 바람에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어 어린 그람시도 아버지가 1904년 풀려날 때 까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일을 하면서 독학을 해야 했다. 1911년에는 토리노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마저도 건강문제와 돈 문제 때문에 1915년 그만두어야 했다.

1913년부터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활동하였다. 1914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16년에는 사회당 기관지 편집장까지 하면서 글 쓰는 방법과 사회적 식견을 익혔다. 저널리스트로써 경력을 쌓으면서 그람시는 몇몇 활동가들과 함께 1919년에 신질서라는 주간 신문을 창립하였다.

1900년대 초 토리노는 공업도시로 성장하면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는데, 1919년~1920년에는 노동자 평의회 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의 파업이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회당은 이 혁명적 에너지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그람시는 이 과정에서 레닌주의적 혁명론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어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하고 그 당의 지도자가 된다. 다만 실권은 동료인 보르디가가 쥐고 있었다. 그람시는 새로운 공산당의 대표로써 1922년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 러시아 공산당의 지침도 받고 결혼도 했는데, 그 사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아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출범시키고 공산당 주요 인사들을 체포했다. 1923년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그람시는 만신창이가 된 이탈리아 공산당을 수습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얼마 후인 1926년 파시스트 정권이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하면서 체포되었다.

1927년 그람시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고 수석검사의 논고는 이러했다.

20년 동안 우리는 이 뇌가 기능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Per vent’anni dobbiamo impedire a questo cervello di funzionare.

그러나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그람시의 몸은 가둬둘 수 있었지만 그들 희망과 달리 그람시의 뇌가 기능하는 것은 막질 못했다. 그는 감옥에서 《옥중수고》를 비롯한 주요한 저작들을 써내려갔다.

하지만 감옥 생활이 원래 건강이 좋지 못했던 그람시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으며, 수감 11년째인 1937년 4월 27일 옥사하고 말았다.

사상

헤게모니론

진지전과 기동전

주요 저작

각주

  1.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로 '전진'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