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좌파도서관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출생
출생
1918년 12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키슬로보츠크
사망
사망
2008년 8월 3일

소련 페트로그라드 젤레노고르스크
국적
국적
소비에트 러시아 -> 소련 -> 무국적 -> 소련 -> 러시아
약력
약력
1970년 노벨상 수상, 1983년 템플턴상 수상.


생애

유청년기

솔제니친은 소련의 전신인 소비에트 러시아 키슬로보츠크(Кислово́дск)의 캅카스 쿠반(Kuban) 지역의 부농이었던 아버지를 포함해 러시아 정교회를 믿던 집안에서 출생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신자가 되었으며, 이것이 그가 젊은 시절을 제외하고는 소련의 국가적 무신론 정책을 비판[1]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30년 이후 가족의 재산이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집단 농장으로 바뀌었다.

그 뒤 로스토프 주립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으며, 모스크바 철학, 문학, 역사 연구소의 통신 강좌를 수강하였고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포병 장교로 입대해 붉은 별 훈장(Орден Красной Звезды, Order of the Red Star)을 수상하였다.

수감

출소

소련 추방

말년

비판

나치에 대한 옹호

그는 1960년대 말에 그의 책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이 반소련선전을 살포하는 반혁명활동을 한 것으로 1946년부터 노동수용소에서 8년간을 복역했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2차대전나치독일과의 전쟁은 소련 정부가 히틀러와 협상에 성공했다면 피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솔제니친은 스탈린이 소련국민들에 대해 끔찍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보다 더 나쁘다는 시각이다. 솔제니친은 나치를 옹호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그는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솔제니친의 저서는 니키타 흐루시쵸프의 인가 하에 소련에서 1962년부터 출판되었는데, 첫번째 책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죄수의 하루를 묘사한 것이다. 흐루시쵸프는 솔제니친의 문건을 스탈린의 사회주의 업적을 비방하는데 사용했다. 1970년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그후 그의 노동수용소에 관한 글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대량으로 출판되었고 마치 진실처럼 받아들여져 소련의 사회주의와 싸울 제국주의의 강력하고 유용한 도구로 추가된다. 1974년 솔제니친은 소련 국적을 거부하고 스위스로 이민갔다가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때는 이미 그는 자본주의 언론에 의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위대한 전사로 인식되게 됐다. 그의 나치옹호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전쟁에 방해되므로 묻혀지게 된다.


친제국주의적 행보

미국에서 솔제니친은 중요한 강연에 자주 초대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1975년의 AFL-CIO 회담의 주요 연사로 초빙되었고, 1975년 7월 15일 그는 미국 상원에서 세계정세에 대해 강연하게 된다. 그의 강연은 자극적이고 격렬한 방식으로 빠르게 반응을 끌어냈다. 미국이 패배한 전장이었던 베트남을 다시 공격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포르투갈에서는 40년동안 지속된 파시즘 정권 이후에 좌익장교들이 1974년에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켰는데, 솔제니친은 거기에 미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그들이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강연에서 솔제니친은 줄곧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해방된 것에 대해 씁쓸해했다.

반공주의적 행보

솔제니친의 강연들의 핵심은 언제나 사회주의에 대한 추악한 공격이었다. 그에 의하면 소련에서 수백만이 처형됐다는 것으로 시작해서 북 베트남에서 수천만의 미국인들이 감금되고 노예로 부려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북베트남에서 혹사되는 미국인들의 이미지는 이어서 베트남에 관한 람보류의 필름들로 만들어지게 된다. 소련과 미국간에 있어 평화를 주장하는 미국언론인들은 그에 의하면 잠재적인 반역자로 말해졌다. 솔제니친은 또한 소련보다 군사적 우위를 갖기위해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에 의하면 소련이 비행기와 탱크에 있어 5~7배나 더 많고 게다가 '짧게 말해' 핵무기도 소련이 갖은 것이 2,3배 혹은 5배까지 강하다는 것이었다. 솔제니친의 소련에 관한 강연은 극우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떠서 파시즘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의 18년간의 망명생활에서 대중의 눈에서 사라지게 됐고, 자본주의 정부로부터 전격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됬다. 자본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사회주의와의 전쟁에 있어, 솔제니친과 같은 사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과 같은 존재였지만 모든 것에 그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자본주의화된 새 러시아에 있어, 서방이 지지하는 정치집단이라는 것은 오직 그런 집단들의 비호 아래에서 사업에서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한 것일 뿐이다. 러시아에 있어 파시즘은 당연히 사업에 좋을리가 없다. 솔제니친의 바램은 러시아에 러시안정교와 손을 맞잡은 짜르의 전제왕권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고 제국주의자들조차 그정도를 지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서방에서 솔제니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극우세력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코 옹호

프랑코가 1975년에 사망한 후,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은 정치적 상황을 수습하지 못한다. 1976년 초에 일어난 사건들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났고 프랑코의 후계자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소요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민주적 조치'를 허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페인 역사상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마드리드에 나타난다. 그리고 3월 20일 토요일밤 피크타임에 방영된 Directisimo라는 프로그램에서[2] 인터뷰를 한다.

솔제니친은 사전에 질문이 준비되었고, 그는 온갖 선동적인 발언을 한다. 그의 의도는 국왕의 '민주적 조치'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솔제니친은 민주개혁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의 TV인터뷰에서 1억 1천만명의 러시아인들이 사회주의 때문에 희생되었고 이 것을 스페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비교했다. 또한 스페인을 독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상주의자들의 진보라고 몰아붙였다. 그가 진보라고 지칭한 것은 자유주의자건, 사회민주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민주적 반대파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가을, 세계는 스페인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염려했습니다.[3] 줄곧, 이 진보세력은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테러리즘을 옹호했습니다"..."빠른 민주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은 내일이나 모레가 어떻게 될지 압니까? 내일 스페인이 민주화가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다음날 민주주의가 전제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기자들이 조심스럽게 그의 말이 자유가 없는 나라들의 정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수 있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지구상에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는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러시아요!"

솔제니친의 이 TV인터뷰는 스페인의 파시즘에 대한 정면적인 옹호였고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입장을 고수했다.

저서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 《크레체토프카 역의 사건》(1963)
  • 《암병동》(1968)
  • 《수용소 군도》(1973)
  • 《공산주의: 공포의 유산》(1975)
  • 《200년 동안 함께》(2003)

참고자료

각주

  1. 관련 기사관련 기사2. 이처럼 종교 및 우익 언론계에서는 솔제니친이 무신론과 반종교적 입장을 비판하기 위한 증거를 제시하는 용도로 자주 쓰인다.
  2. 1976년 스페인신문 ABC와 Ya지의 3월 21일자
  3. 프랑코정권때 처형된 반파쇼세력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