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좌파도서관

대한민국의 1,2,3대 대통령
이승만
李承晩
당신의 부모 형제가 공산주의자라면 이미 그들은 당신의 부모 형제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호열자(콜레라)와 같다
출생
출생
1875년 3월 26일

조선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능안골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봉천군 성기리)
사망
사망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카운티 호놀룰루 시
카이무키 구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국적
국적
조선 → 대한제국 → 일본령 조선 → 미국 → 미군정 → 대한민국
약력
약력

개요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 후임은 윤보선이다.

생애

초기이력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에 있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이성계의 18대손의 가계를 가지고 있는 몰락 왕손의 후예인 이승만은 5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배웠다. 이어서 남산에 있는 도동서원에 입학하여 10대 시절에는 사서삼경과 통감절요를 읽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했었으며, 그는 11차례나 과거 시험에 응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3세때부터 11차례나 과거에 응시했던 그는 계속 떨어졌다. 1891년 16살의 나이에 박 씨와 결혼을 하게 된 이승만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더 이상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자, 신학문에 눈을 돌렸고, 그 과정에서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승만은 189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영어 공부를 하며 역사, 지리, 수학 성경 등의 과목도 이수했다. 당시 그는 미국의 독립 전쟁과 남북전쟁사에 매혹되었고, 소위 미국이 말하는 정치적 자유와 기독교 국가의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배재학당에 있을 당시 서재필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 또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97년 7월 이승만은 우수한 성적으로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그는 졸업생 대표 연사로 선발되어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의 연설을 했다. 배재학당 시기 그는 서재필이 했던 강의를 들었었는데, 서재필의 강의는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어연설을 하며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1898년 협성회보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가 당시 있던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고 의회설립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만민공동회 개최를 준비하자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도 활동하며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개화활동을 하던 중 이승만은 조선 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에서 중형이 선고됨에 따라 서소문감옥에서 옥생활을 하게 됐다. 당시 이승만은 서소문감옥에서 죄수들을 교육하는 활동을 했었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이승만 또한 체포되었고,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출옥했다. 여기에는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도움이 컸다. 대략 5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했던 박용만과 의형제를 맺었고,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었다.

미국으로 망명 및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개화운동과 감옥생활에서 친미성향을 가지게 된 그는 출옥 이후 미국에 가기로 결심했고, 1904년 11월 이승만은 제물포에서 미국행 선박에 올라 3주 뒤 미국령 하와이에 도착했다. 미국 기독교계 인사들의 지원으로 이승만은 1905년 가을학기부터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 이승만은 1907년 6월 졸업할 때까지 2년간 학업에 종사했다. 이승만은 워싱턴 대학을 마친 뒤 서재필 등의 주선으로 보스턴에서 있는 하버드 대학, 즉 현재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하버드 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될 우드로 윌슨이 그의 지도 교수였다. 하지만 그의 학위 취득과정에는 의문점이 적지 않다. 이승만의 동지였지만, 뒷날 정적이 된 이현구는 자서전에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는 이승만이 통상 12년 이상 소요되는 학부와 박사과정을 단 5년 만에 어떻게 수료할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하다.”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독립운동 태업

여기까지의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그는 개혁적인 사람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악행과 치졸함 그리고 배신행위는 미국 유학부터 시작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친구인 스티븐슨은 일본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양했고,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리화했다. 1908년 센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전명운이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재미한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기독교적인 이유를 들어 “살인마를 변호할 수 없다”며 변호를 거부했었다. 그의 재판과 변호를 위해 미주 본토는 물론이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여 그 당시 돈으로 7390달러가 모였는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어려운 살림의 교포들이 힘들게 모아 보낸 비용으로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는 1913년 자신의 의형제인 박용만의 도움을 받아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의 의형제인 박용만은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이라는 무장투쟁 조직을 만들 정도로 무장투쟁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반면에 그는 하와이에 있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을 맡아 교포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가 가르친 교육과정에는 반일을 가르치는 내용이 없었다. 오히려 친일에 가까운 내용들이 많았다. 1916년 이승만이 호놀룰루 스타블러딘 신문에서 쓴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심지어 그는 하와이에 정착하기 전인 1912년 워싱턴 포스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한일합방후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놀랍게도 이런 주장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주장이었다. 박용만의 도움으로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정착한 이후 박용만과 대립했다. 한때 자신의 의형제였던, 박용만의 무장투쟁 노선을 비판하는가 하면, 1918년 하와이 법원에선 인간으로썬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했다. 1917년 그가 이끌던 국민회의 회계처리에 대해 문제를 삼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승만 세력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재정문제에 문제를 제기한 국민회 대위원들을 ‘폭동죄’를 적용하여 미국 경찰에게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행동을 하며 일본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한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친미 매국

이승만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영미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1919년에 파리강회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는데, 그게 바로 위임통치 청원이다. 즉 조선의 문제를 미국에게 맡기겠다는 얘기로써 미국이 대신해서 통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이 청원했던 청원서 내용 중 문제가 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 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이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 청원서 내용이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 알려지면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당연히 크게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반발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1919년에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놀랍게도 이승만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20년 상하이에 갔는데, 1년 6개월 기간 동안 임시정부와의 갈등만을 조장하다, 임시정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자신의 조직을 확장시켜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했고, 안창호와 대립했다. 결국 이승만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고, 그가 만들어 놓은 혼란은 김구가 잠재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전형적인 친미 제국주의자 답게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모습을 미국인들에게 보였고, 사회주의 계열과는 절대 손을 잡지 않으려했다. 심지어 1920년대 당시 그는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노예국화 하는 것이기에 오직 미국의 성의있는 원조에 기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승만은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두고, 임시정부의 김구에게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주제넘게 평가절하기도 하였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는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고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의 유력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져 여러 명을 폭살 또는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만주를 비롯해서 고국에 무장투사가 잠입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러한 행동을 크게 비난하고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크로니클>지 보도에 의하면, 그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비밀사절’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에 의하면 이봉창이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한국의 독립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이승만박사 해외독립운동 내막》, 경향신문, 1965년 8월 7일

기회주의

1931년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국제 정세는 다시 암울해졌다. 이승만은 일본의 위세가 뻗어나간 1930년대 거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40년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군사 동맹을 체결했고, 더 나아가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장악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던 1941년 6월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주미외교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가 집필한 ‘일본 내막기’는 현실이 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를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정과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년 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를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고 매도했었다.

또한 이승만은 매우 반공적인 인물이었기에 불화를 자주 일으켰다. 1940년 광복군 창설이 있을 당시, 김구는 김원봉을 임시정부로의 입각을 추진했는데.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은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하며 김구와 조소앙 등에게 항의를 했다. 이것은 비록 반공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일제에 맞서 좌우를 연합시키려던 백범김구의 행적하고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정세판단이 빨랐던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보였던 행동과는 달리 극렬한 반일 투사가 되었으며, 1942년에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라는 방송을 통해 국제사회의 소식을 알리는 방송활동을 한 것이다. 거기다 미국의 미국 전략사무국(약칭 OSS)가 충징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합작전을 하려고 하자 그의 요청을 받아 무장투쟁을 준비한다고, 대략 50명 정도의 한인들을 OSS에 투입시켜 훈련받게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행위들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기존에 보였던 행위와는 모순된 행위였다.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UN)을 창설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음모론이었다. 즉 이승만은 예전에 그랬듯이 반소련 입장을 미국에게 강력히 보여주고 싶었던 목적도 있었던 것을 보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7월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 전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반소 반공의 입장을 맥아더에게 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 있던 맥아더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전적으로 돕게 된다. 그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해방공간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 또한 1945년 10월 더글라스 맥아더가 보내준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해방 후 한반도 이남에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 세력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총재 자리에 올라갔다. 그는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고, 보수우익 세력들과 친일파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과 결탁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의 내용이 왜곡되어 전달되면서 신탁통치 반대투쟁이 격해졌고, 1946년 초 삼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되면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 지지를 표명하자, 이승만은 김구와 손잡고, 반탁투쟁에 나섰다. 그 반탁투쟁을 통해 친일파 세력들은 기사회생 할 수 있었고, 이승만은 이들을 이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친일파 출신들이 대다수인 우익 경찰과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세력들은 대중들을 향해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개최가 어떠한 합의점을 보지 못한 채 끝나자, 그해 6월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에 내려가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하는 정읍 발언을 했다. 이후 미군정이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자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승만이 반소반공의 지도자로 거듭나게 된 사건이 1946년과 1947년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그리스 내전과 그 내전에 개입한 미국이 선포한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좌우합작운동 시기 미국에 로비를 지속적으로 넣었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아의 반공 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독정부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실패로 끝났고, 이승만은 친일세력과 더불어 단독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미국은 한반도 정부 수립 문제를 UN으로 이관했고, 1948년 5월 대한민국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진행되었다. 단독 정부 수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주와여수, 순천에선 무장 항쟁이 일어났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 그리고 군대를 파견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제주4.3 항쟁에서 최소 3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이승만과 미군정에 의해 학살당했고, 여순 항쟁에서도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1948년 8월 15일에 탄생한 대한민국은 그렇게 탄생했고, 대통령은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반도 이북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대한민국 내에서 1949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일당은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면서 반민특위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고, 이승만 밑에 있던 친일파 출신인 장경근이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체했다. 그 바람에 대한민국에서 처벌받은 친일파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은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점에서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친일파 척결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은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승만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대한민국 단정수립

한국전쟁

1948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부터 그가 정권에서 물러날 때 까지 외치던 통일 방법이 있다. 북진통일이다. 한국전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이승만은 미국에게 전쟁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했었다.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미국은 그의 요청을 거부했고, 한국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먼저 일으키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에게 서울은 안전하다는 거짓 방송을 해놓고, 한강 다리를 폭파했으며 대전과 부산으로 도망쳤다. 이승만이 한 거짓방송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발목이 묶였고, 서울은 3일 만에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초기 대략 250대의 T-34 전차를 동원한 인민군의 진격은 국군을 계속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과정에서 잠재적인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데 그게 바로 국민 보도연맹 학살이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른 최악의 민간인 학살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로 인하여 최대 30만 명 이상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또한 이승만은 전쟁 초기 대한민국의 전시 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겼고, 대한민국의 전작권은 아직도 미국이 가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하는 전쟁으로 변하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북진을 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까지 수복하였으며, 그해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서울을 다시 탈환한 이승만 정부는 자신이 버렸던 서울 시민들이 인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학살했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 청년 단체들의 학살은 유엔군과 국군이 장악한 곳에서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1950년 10월 말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인민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에게 다시 밀렸다가, 서울을 재탈환 하면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UN은 휴전을 논의하게 되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또 다른 만행을 저지르는데, 그게 바로 국민 방위군 사건이다. 국민 방위군을 만들었던 이승만은 방산비리로 인하여 자국 군인 10만 명을 아사시켰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까지 이승만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최소 30만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

장기집권 및 죽음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독재정치의 길을 걸었다. 1954년에는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억지로 개헌안을 통과시켜 3선의 길을 마련했고, 자신의 정당인 자유당을 이용하여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그리고 이기붕을 내세워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이기붕이 대한민국에서 한자리 차지하도록 뒤에서 힘을 썼다. 1958년, 지난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과 적잖은 표차를 보였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법살인하였다. 1960년, 이승만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부정선거가 일어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승만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위에 나선 학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허위자백을 받아냈고, 민중을 향해 실탄을 발포하기 까지 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 까지 수백명의 민간인이 죽고 수천명의 민간인이 다쳤다.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원하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휘하의 정치깡패들이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1960년 부정선거로 인하여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은 주한 미대사인 매카나기의 말을 들어 하야했고, 그는 하와이로 도망쳤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귀국하려 했으나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그러던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하와이 홀놀룰루에서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평가와 비판

총론

같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idbhQx10-9A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