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명
鄭鍾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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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초기
1896년 3월 5일 서울 남산정 장충단 부근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배화학당에 입학하며 조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어머니 박정선이 나중에 북감리교 전도사였던 것으로 보아 서양식 문물과 기독교를 일찍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러시아로 떠난 아버지와 연락이 두절되고 어머니 혼자 가정을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가난했다. 배화학당이 무상 교육 기관이었음에도 4년 만에 학업을 중단할 정도로 어려웠다. 정종명은 자신의 성장기를 “빈궁과 고독과 학대로 다진 인생의 최하층에서 태어나 소녀시대, 청춘시대를 모조리 보냈다”라고 표현했다.
정종명은 17세에 집안의 결정에 따라 대한의원 통역관이던 박 모 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무시한 결혼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록 졸업은 못 했지만,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만들어진 근대적 자아가 조선시대의 강제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의 삶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 박홍제였다. 그리고 남편은 곧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들 홍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시댁에 머물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때가 19세였다.
돌봄 운동의 시작 : 간호사에서 산파로
1917년 정종명은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양성소에 들어갔다. 자의식 강한 그녀가 가난한 친정에서 생활하려면 경제적인 기반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배화학당의 설립자가 간호교육을 받은 종교인이었고 사망한 배우자 역시 의원에서 일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이 시기 정종명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정종명이 서양 근대 자연과학과 의학을 공부하며, 사회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그녀의 사회운동은 ‘돌봄 정신’에 입각해 일관성 있게 진행됐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했다.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앞이 민중의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남대문 밖에 위치한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11명이 붕대를 가지고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세브란스 병원은 항일 투쟁의 주요 근거지였다. 간호부가 전문성을 발휘해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했다. 이들 간호부의 항일 독립투쟁은 3.1운동이 처음이 아니었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부터 시작됐다. 군대해산으로 야기된 조선 군인과 일본 제국주의 군인의 전투로 다친 조선 군인들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때 간호부의 간호는 단순히 전문적인 의료 활동을 넘어 항일 독립투쟁의 한 방법이었다. 1904년 9월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은 서양 선교사들이 주축이 돼 운영됐던 까닭에 일제의 감시가 느슨한 공간이었다.
정종명은 3.1운동의 단순 시위 참가자가 아니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려고 위장 입원한 시위 연락책 강기덕이 외부와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세브란스 병원 약제실 주임이면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이갑성의 기밀 서류를 맡아두었다가 경찰에 잡혀 고초도 겪었다. 어머니 박정선도 적극적으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정선은 대동단에 가입해 부인 대표 자격으로 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11월 28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경성 안국동 광장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1920년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양성소의 10회 졸업생이 된 정종명은 간호사로 일하는 대신 산파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산파는 간호사보다 보수가 좋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정종명이 원하는 사회운동의 필요조건을 충족했다. 하지만 당시 면허를 받은 조선인 산파가 21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면허 취득이 어려웠고, 시험 합격률도 낮았다. 그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산파강습소를 다니며 산파 면허를 취득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경성 안국동에 독자적인 조산원을 개업했다.
혁명가로 거듭나다
정종명은 경제적·심적 여유가 생기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여자고학생상조회’였다. 1920년 경성 지역 남자 고학생들이 상조 단체인 ‘갈돕회’를 설립해 운영하다 1922년 여자부를 두었는데, 이를 정종명이 주도해 20여 명의 여성을 모아 ‘여자고학생상조회’로 발전시켰다. 1922년 4월 1일 창립한 여자고학생상조회는 과거의 자신처럼 ‘빈곤과 고독에 우는 여자고학생’을 돕기 위해 전국 순회강연회를 진행했다. 이 순회 강연에서 정종명은 한껏 입담을 과시했고, 단번에 조선 최고의 연사로 떠올랐다.
정종명의 강연 주제는 주로 여성문제에 관한 것으로,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조선 여성의 현실을 짚어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정종명이 최고의 대중 연설가로 유명해진 배경에는 1923년 6월 지하에 조직된 ‘공산청년회’에 가담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당시 코민테른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고려국) 국내부 공산청년회의 유일한 여성 회원이었다. 제1호 여성 공산당원이던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변혁을 꿈꾸는 여성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삶을 본격화했다.
1924년 1월 26일 정종명은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했다. 조선간호부협회는 조선인 간호사들이 주체가 돼 회원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직 알선을 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보건교육을 개최했다. 한강 수해로 발생한 이재민 구호 활동과 대중 보건교육을 진행하는 등 폭넓은 사회활동을 수행했다. 1926년 12월 세브란스 병원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사회적 이슈가 되자 사건 진상 조사에 들어간 단체가 조선간호부협회였다. 정종명은 이 사건을 담당하면서 근로조건 문제와 갑질 문제 등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정종명은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에 나섰다. 이는 공산청년회 회원으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1924년 5월 10일 창립총회에서 정종명은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창립 동지들로 정칠성, 주세죽, 허정숙 등 쟁쟁한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있었다. 동우회는 조선 여성의 해방을 사회변혁과 관련해 인식하고 이를 해결할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 여성 단체였다. 이 단체에서 그녀의 역할은 계몽운동이었다. 정종명의 강연은 보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색채를 분명히 띠었다. 강연 제목도 여성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표현하던 이전과 달리 ‘현대사회와 무산여성’, ‘현대 경제조직과 여성해방’ 등 유물론과 계급투쟁이 투영됐다. 이런 강연은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됐고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자, 농민을 조직하지 않은 것은 선전 등의 계몽운동에 주력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도입 초창기 정세 인식 때문이었다.
1924년 11월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에 참여해, 북풍회의 월간 사상잡지 《해방운동》의 기자로 활동했다. 1926년 4월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 등 4단체가 당 건설을 위해 합동으로 ‘정우회’를 결성하며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1927년 2월 좌우 합작의 신간회가 창립될 때 중앙집행위원을 거쳐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될 정도로 조직 내에서도 신뢰와 역량을 인정받았다.
정종명의 여성운동의 정점은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여성운동 조직인 근우회 활동이었다. 근우회는 1927년 좌우 합작의 형태로 설립된 여성운동 단체로, 정종명은 그해 5월 27일 열린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 21명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됐다. 정종명은 선전조직부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해 9월에는 상무집행위원이 됐고, 자신이 역량을 인정받아 이듬해 7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1931년 근우회가 해소될 때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대표하며 투신했다.
1930년 정종명에게 매우 슬픈 일이 일어났다. 19세부터 홀몸으로 키워온 외아들 박홍제가 격문 사건의 주범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박홍제는 10대 중반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동화를 연재하고, 문예지 〈소년 운동〉과 〈소년 조선〉을 창간할 정도로 문학에 재능과 열정을 보였다. 이미 일제의 감시를 예고했고 체포는 시간문제였다. 결국 1930년에는 무허가 출판물 〈무산청년에게 줌〉 등을 발행해 검거됐고, 1930년 11월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김천 소년감으로 이송돼 수감됐다.
이즈음 정종명에게도 사회주의 운동에 제동이 걸렸다. 1930년 8월 정종명은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당재건위)에 참여했다. 당재건위는 혁명적 노동조합을 지하에 결성하고 각 공장, 직장, 가두에서 세포를 조직해 제대로 된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1931년 3월 당재건위가 갑자기 해체되고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준비회(전평준비회)가 새롭게 결성됐다. 정종명은 중앙상무위원으로 노동조합 내에 부인부를 건설하고 활동을 지도했다. 하지만 결성 한 달만인 1931년 4월 23일에 ‘조선공산당 재건’을 포착한 일제에 발각됐고 조직원 대다수가 검거됐다. 정종명은 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고 3년 형을 언도받았다.
1935년 7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녀는 경성에서 산파 일에 전념하며 조용히 지내다 해방 이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정종명은 1945년 12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에서 잠시 활동하고 이후 북한 지역으로 가서 함남 대표로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1947년에는 함흥에서 부인 운동을 펼쳤고 1948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것을 마지막으로 정종명의 모습은 기록에서 사라진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정종명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자료
- 이꽃메, "일제강점기 산파 정종명의 삶과 대중운동”, 《의사학》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대한의사학회, 2012.
- 이방원, “세브란스 간호사의 독립운동: 1919년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연세의사학》 제22권 제1호,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2019.
- 이임하, 《조선의 페미니스트》, 철수와영희, 2019.
- 이애숙, “정종명의 삶과 투쟁: 민족과 여성의 해방을 위해 싸운 한 여성투사 이야기”, 《여성》, 한국여성연구소, 1989.
- 최규진·선우상, “‘행동하는 간호사’의 원조, 정종명”, 《의료와사회》 제10호,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