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노동자 월급제 쟁취 투쟁

좌파도서관

대한민국에 택시가 도입되고 ‘월급제 쟁취!’라는 택시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요구와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84년 11월, 박종만 열사가 목숨을 던지며 ‘사납금 철폐’를 외치면서이다. 이후 택시노동조합의 변화와 택시노동운동의 역사는 월급제 투쟁과 그 흐름을 같이하여 왔다.

필요성

전개

한시택시 제도와 PATA

1979년 정부는 최초로 택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같은 해 택시회사의 직영화 조치를 취하면서, 그때까지 공공연하게 있던 택시 회사안의 개인소유(지입)차량에 대해 특별조치로 개별면허를 발급해준 택시에 대하여 원래의 남은 차량연한에다 5년을 보탠 기간 동안만 영업을 한 뒤 면허가 소멸토록 된 시한부 면허제인 '한시택시' 제도가 도입되었다.

한편으로 정부는 PATA(Pacigic Area Travel Association,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 총회를 대비하기 위하여, '고급 서비스'에 한해 월급제를 실시하였다. 25개사 1,250대에 대하여 ‘운송수입금 전액관리제 시행, 고정월급 지급’을 내걸었으나, 운영 1년 6개월 만에 ‘기사들이 단합하여 1일 수입금 납입액을 일정수준 이하로 축소, 성실, 불성실 근로자 동일대우에 따른 동료 간 불화 초래, 운전기사의 오랜 관습과 타성으로 회사통제 기피’를 명목으로 중단했다.

1984년 대구 5.25 투쟁과 전국적 사납금 인하 투쟁

소규모 지입차주들에 의해 운영되던 회사택시들의 노동조건이 최악의 상태에 달한 상황에서, 하절기 사납금인하를 앞두고 사납금인하가 늦어지자, 대구지역 택시노동자들의 조직적인 투쟁이 전개된다. 84년 5.25 대구택시노동자들의 투쟁이라고 불린다. 이 당시 투쟁의 주요 요구는 사납금 인하, 노동조합 설립 및 노조 활동 자유 보장, 주유소 선정 자유화, 악질업주 처벌 등으로, 오전 5시 동대구역에서 5명이 시작한 투쟁이었다. 이것이 오전 9시경 대구시청과 중앙주유소 앞에 2,000여명의 택시노동자가 결집하여 대구시내 교통을 완전 마비시키는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투쟁이 폭발적인 양상으로 변하자 시민단체가 가세하여 대구시에 중재를 요구하였고, 대구시는 중재위원회를 구성하여 시장의 약속으로 ‘사납금 인하, 노조 설립 자유 보장’ 등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투쟁은 노동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핵심으로 활동하였던 9명이 구속되었고 많은 노동자가 해고되는 사태를 겪기도 하였다. 1984년 11월 고 박종만열사가 사납금제 철폐를 외치며 분신 운명하였다. 이후 박종만 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운수노보를 발행하면서 전국의 택시 동향 등을 알려내며 투쟁을 조직하는 모체가 되었고, 민주노조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84년 대구택시의 투쟁은 이후 구미, 인천, 부산, 서울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타지 택시노동자들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해 서울에서는 11월 30일 박종만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택시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어 택시노동운동이 본격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택시노동자들의 전국적인 투쟁이 확산되자 군사독재정권에서는 이 투쟁이 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월급제 지침’을 발표한다. 택시문제에 대한 정부의 강제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 ‘택시운전기사 월급제실시를 위한 지침’(도교1514-11461,84.12.1) 발표
  - 단계적 완전월급제 실시를 위한 업적금제로 전환(수범업체 선정 기준 삼음) 
  - 지입, 도급제에서 업적금제로 전환 
  - 지입차주 한시택시로 편입
84년 교통부 월급제실시를 위한 지침

이 투쟁의 영향으로 대구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택시사업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조합결성과 함께 택시노동운동도 체계화 되게 되었다. 특히 84.5.25투쟁은 사북탄광노동자의 투쟁과 함께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의 시작으로, 소규모로 진행되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나서게 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택시노동운동사에, 전체 노동운동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투쟁이었다.

전국택시노련

84년부터 87년 전국노동자대투쟁과정에서 택시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투쟁대오를 형성하면서 1년에 2번의 임금인상을 하는 등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87년 9월 서울택시 총파업이 전국 최초로 결행되었다. 일명 ‘빵빵시위’로 불리는 파업과 차량시위는 사납금제 철폐를 주장하며 서울 택시 1천여 대가 역삼동에 모여 서울시청으로 향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의 성과로 87년 대선과정에서 모든 후보가 택시완전월급제를 공약사항으로 걸게 되었고 택시노동자의 꿈도 점점 현실화되는 듯 했다. 이러한 요구를 모아 1988년 택시노동조합은 어용인 자동차노련에서 분리하여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을 창립하고 새로운 투쟁의 구심체로 정립하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어용화 되면서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내부에는 민주파와 어용의 투쟁이 전면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