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카 코뮌

좌파도서관

테살로니카 코뮌은 1342년부터 1350년까지 테살로니카 인근을 열심당이 통치하던 공화국 체제를 말한다.

배경

1320년대로 들어와 비잔티움 사회의 경제적 성장은 끝나갔다. 반면, 대토지 세력가와 대상인들의 팽창은 여전히 놀라웠다. 이 세력가들은 점차 비잔티움의 정관계로 영향력을 넓혔다. 이렇게 되자 지식인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빈부격차를 염려하는 풍조가 발달했다.

소아시아에서 유입된 난민들은 특히 그런 불안정한 상황을 고질적인 문제로 만들었다. 정부는 공립병원과 목욕시설의 운영시간을 연장하고 특별법정까지 설치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이제 정말로 자신들의 나라가 황혼에 있는 것인지 의심을 품을 지경이었다. 물론 비잔티움 정부와 지식인층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강화되는 빈부격차와 무너지는 사회 통합을 막기 위해 여러 수단이 강구되었다. 고리대를 차단하려는 이자율 책정과 부채탕감이 논의되었고, 지속적으로 세금 인하가 안건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국제경기가 정체되어 발전 자체가 제한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반면 이미 기초적인 자본이 축적되어 있는 토지, 거대상업에서의 발전은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 1290년대 말과 1300년대 초에 소빙하기와 정치적 재앙이 덮쳤디. 이에 잠시 세율을 낮췄던 1312-21년 이후, 정부는 다시 세금을 높여 받았다. 분노한 농촌 민심은 축적되는 사회적인 불만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1322년, 할아버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안드로니코스 3세[1]는 세금 탕감을 구호로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6년 뒤 결국 안드로니코스 3세는 신망을 잃은 할아버지를 몰아내고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의 주요 지지층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같은 대토지, 신흥대상인들이었다. 이후의 정책개변은 이런 신흥 자본가층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었고, 여전한 세금문제, 악화되는 빈부격차는 여전했다. 농촌과 도시민들의 분노는 쌓여만 갔다. 더군다나 1341년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하자, 정국 주도권은 섭정이 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2]에게 확실하게 넘어갔다.

전개

이런 상황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전통적인 비잔티움의 재무관료이자 중상층 시민인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였다. 그는 제국의 권력이 시민의 손에서 나오는 것인데 어째서 세력가가 좌지우지하냐며 비잔티움의 전통적인 시민층에게 호소했다. 총대를 기다려온 시민들은 그의 호소에 폭발적으로 호응했다. 군인관료와 세력가 가문들의 오랜 텃밭인 아드리아노폴리스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요안니스 6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운집한 시민들이 세력가를 비판하며 강제 진압당하였다. 그날 밤, 브라노스와 2명의 노동자들이 "부자들을 공격하라!"며 주택가를 돌아다녔고 마침내 혁명이 시작된다.

1341년 10월 아드리아누폴리스를 시작으로 비잔티움의 각지로 시민군의 깃발이 치솟았다. 요안니스 6세를 따르는 세력가들은 모두 추방당했고, '칸타쿠지노스 이념'을 따른다며 맹공격 당했다. 요안니스의 본거지인 디디모티코만이 시민봉기가 조기진압당해, 주변 혁명정부들에 의해 포위된다. ​ 국경지대에서 야전군 2천명을 거느리고 있는 요안니스 6세는, 순수 전력은 강했지만 공동체 단위로 수천의 민병을 동원할 수 있는 각 혁명정부를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급한대로, 친구인 시나디노스가 시장을 지내는 테살로니카를 장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테살로니카엔 고도로 조직화된 부두노동자조합이 있었다. 1342년 6월, 세력가 요안니스의 군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시내에 퍼트린 노동자 조합은 도시빈민과 중하층 시민들의 봉기를 엮어냈다. 도시는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장악됐고, 시나디노스 등의 세력가와 반대 지지파는 투옥되거나 쫓겨났다. 이것이 7년간 이어질 테살로니카 코뮌, 공화국의 시작이었다.

약 3년동안 콘스탄티노플 정부의 파견관 요안니스는 열심당의 지도자 미하일과 함께 테살로니카 집정관의 지위에 취임했다. 이들 2인의 집정관은 입법의회를 통해서 시정을 처리했다. 그러나 요안니스는 단지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존재였을 뿐 실제로는 거의 어떤 실제적 권력도 소유하지 못했다. 반면 집정관 미하일은 조직을 정교하게 갖춘 대중정당을 통해 중앙정부로부터 매우 독립적인 시정운영을 주도했다. 물론 시정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민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3년의 불편한 동거 끝에 요안니스는 친칸타쿠제노스파 귀족들과 함께 힘을 합쳐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고 실제 권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먼저 집정관 미하일을 암살하고 곧이어 칸타쿠제노스에게 도시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잠시 흔들리던 열심당(The Zealots)에서 중심 세력 중 하나인 부두노동자 조합은 안드레아스라는 사람을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곧바로 열심당의 원칙을 지지하고 칸타쿠제노스주의를 혐오하는 대중이 이 봉기에 대거 참여하면서 삽시간에 테살로니카는 피바다로 변했다. 결국 요안니스와 친칸타쿠제노스파 반혁명 귀족 100여명이 잠깐 구금된 끝에 분노에 휩싸인 대중에 의해 갈가리 찢겨졌다.

... 수감자들은 성채의 벽에서 쫓겨나 아래에 모인 열심당 폭도 무리에 의해 갈가리 찢겨졌다. 그 후 상류층의 모든 구성원을 사냥했다: 그들은 목에 밧줄이 달린 노예들처럼 거리를 지나갔다. 여기서 하인은 주인을 끌고 노예는 노예주를 끌었으며, 농노들은 장군을 폭행했으며, 노동자는 군인의 토지 소유의 대가를 부과했다.
데메트리우스 키도네스, 1345년의 반 귀족 학살을 묘사하며

무절제한 행동과 최소한의 절차가 없는 행동에 시의 지도자들이 시민을 책망하고 경고했지만 분노에 싸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 전역을 뒤져 친칸타쿠제노스파를 살륙했고 그것이 사실이든 호도된 것이든지 닥치는 대로 집을 약탈했다.

분노가 가라앉자 테살로니카는 이제 더욱 확고하게 열심당과 그 주도 아래 운영되는 코뮌의 통제 아래 들게 되었다.

결말

1347년 칸탄쿠제노스와 황제 요안니스 5세는 화해했지만, 열심당원들은 그레고리 팔라마스를 대주교로 임명 등과 같은 콘스탄티노플의 명령을 무시했다. 이 도시는 외부 세계와 고립 된 채로 흑사병에 시달렸으며 스테판 두샨[3]의 지속적인 위협에 더욱 노출되었다.[4] 상황은 점점 더 절박해졌고, 외국, 즉, 세르비아의 보호령으로서 항복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집정관인 알렉시오스 라스카리스 메토키테스를 포함하여 많은 테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49 년 말, 도시민들은 마침내 자신들을 타도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한 열심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는 아토스 산으로 도망쳐 대 라 브라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협상은 계속되었고 1350년, 칸타쿠제노스는 요안니스 5세 황제와 팔라마스와 함께 도시에 대한 입성식을 치뤘다.[5]

테살로니카 코뮌에 대한 언사

이 봉기는,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던 파리, 리옹의 봉기를 생각나게 한다.
- 발렝텡 파리조(Valentin Parisot, 프랑스 저술가, 1800~1861)


테살로니카 코뮌은 부당하게도 폭도로 낙인찍혔던 사람들이다. 이 열심당은 기실 민주정을 지지했던 애국자들이었으며 자신들의 고향 도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인 것이다.
- 콘스탄디노스 사사스(그리스 역사학자, 1842-1914)


나는 이 열심당이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진정한 마음가짐과 도시를 방위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 샤를 딜(프랑스, 비잔틴예술사학자,1859-1944)


이 열심당은 좋은 의도를 지녔던 사람들로서 18세기 프랑스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자코뱅)처럼 급진적이었다. 또한 이들은 로마적 정치의 원칙과 절대적인 법으로서의 공화국의 안녕을 주장하는 원칙을 따라 행동하였다. 이들에 대해 적대적인 문헌과는 달리 이들은 피를 갈구하는 짐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정교한 사회개혁책을 가지고 있었다.
- 오레스트 타프랄리(루마니아 역사학자, 1876-1937)


열심당은 제국의 사회, 경제적인 재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소수의 정치개혁 운동가들이 이끌었던 소수자 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운동을 인해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 피터 차라니스(그리스계 미국인 비잔틴 사학자, 1908~1985)


열심당을 보라! 이것은 제국의 유일한 한 줄기 희망이었으며 만약 이 운동이 성공했다면 제국을 구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미트로판 바실리예비치 레브첸코(Mitrofan Vasil'evich Levchenko, 소련 비잔티움 사학자, 1890~1955)


이 "대중적 운동"은 결국 더 이상 재기의 가망이 없던 봉건계급에 한 줄기 선풍을 불러왔다.
- 알렉산데르 페트로비치 카즈단(Alexander Petrovich Kazhdan, 소련과 미국의 비잔티움 사학자, 1922~1997)

참고자료

각주

  1. Ανδρόνικος Γ(1297년 ~ 1341년) 로마 제국 124대 황제.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에 대항하여 내전을 벌인 후 황제로 즉위한 인물이다. 그는 44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며, 그의 요절은 이후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의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2. Ἰωάννης Καντακουζηνός(1292년 ~ 1383년) 비잔티움의 섭정공. 안드로니코스 3세의 적장자인 요한네스 5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14세가 섭정단을 전복시킨다. 이후 6년 간의 내전 끝에 승리를 거두고 요한네스 5세와 공동황제 자리에 오른다.
  3. Стефан Урош IV Душан Немањић(1308년 ~ 1355년) 세르비아 제국의 차르.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사후 비잔티움 제국에 내전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해 정복활동을 펼쳤다. 그의 제국의 영토는 도나우강, 사베강에서 코린트만까지, 그리고 그리스 중부에서 마케도니아, 아드리아해에서 이오니아 해, 에게 해에 이르렀다.
  4. Barker (2002), p. 17
  5. Barker (2002), p.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