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올슨

좌파도서관
프랭크 올슨
Frank olson
출생
출생
1910년 7월 17일

위스콘신주 아이언 카운티 헐리
사망
사망
1953년 11월 28일

뉴욕주 뉴욕시 맨허튼구
국적
국적
🇺🇸 미국
약력
약력
헐리 고등학교 졸업
위스콘신 대학교 세균학 박사 학위 취득
퍼듀 대학교 농업실험기지 연구원


개요

미국의 세균학자이자 세균전 연구자.

생애

생애 초기

올슨은 위스콘신 주 아이언 카운티 헐리에서 스웨덴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올슨은 1927년에 헐리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위스콘신 대학교에 입학했고 1938년에 세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만난 앨리스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올슨은 대학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예비군 장교 훈련단에 등록했으며,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텍사스의 포트 후드에서 현역 복무했다. 올슨은 현역으로 복무하기 전에 퍼듀 대학교의 농업실험기지에서 작물의 세균을 연구했다.

육군 및 CIA와 협력

올슨은 미 육군 화학부대 대위로 복무했다. 1942년 12월, 그는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였던 아이라 볼드윈으로부터 생물학 무기 개발에 관한 비밀 프로그램을 지휘하기 위해 대학 연구직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볼드윈은 올슨이 포트 데트릭의 설립자로 함께 일하길 원했다. 올슨은 메릴랜드의 엣지우드 병기창으로 근무지를 옮겼으며, 몇 달 후, 화학 부대는 포트 데트릭을 인수하고 비밀 생물학 전쟁 연구소를 설립했다.

포트 데트릭에서 볼드윈은 조지 W. 머크 및 미군과 같은 산업 파트너와 협력하여 1943년부터 미국의 일급 비밀 생물 무기 프로그램을 수립했다. 올슨은 또한 에어로졸화된 탄저병의 활용에 관해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전직 나치 과학자들과 협력했다.[1]

올슨은 1944년 육군에서 제대하고 민간 계약자로 포트 데트릭에 남아 세균무기 대한 연구 및 개발을 이어나갔다. 그가 어느 시점에서 CIA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CIA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첩보기관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를 모체로 1947년에 만들어졌다. 올슨이 CIA에 세균전문가로 고용된 것은 그 무렵으로 보인다. CIA가 출범하던 1947년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의 냉전 대결구도가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다. 언젠가 벌어질지 모를 소련과의 전쟁에서 세균무기 공격을 받을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미국도 세균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1949년 봄 데트릭 기지 안에 특수작전부서(Special Operations Division, SOD)가 꾸려졌다. SOD는 극도의 보안을 요구했기에 '테트릭 안의 데트릭'으로 일컬어졌다. 1950년 올슨은 SOD의 '책임자 대행'(acting chief) 자리에 올랐다.

바다-스프레이 작전

데트릭 기지에서 올슨이 주로 했던 연구는 대기 중에 독성 물질을 분무기(스프레이)로 뿌려 그 성능을 실험하는 것이었다. 이런 실험이 공개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비밀 실험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생겨나고 법정 다툼으로 이어지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1950년 이른바 '바다-스프레이 작전'(Operation Sea-Spray)로 알려진 세균 실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작전은 1950년 9월20일과 27일, 샌프란시스코 연안에서 이뤄졌다. 미 해군 함정은 모두 6회에 걸쳐 세라티아와 바실러스 세균을 분무 형태로 뿌렸다. 거대한 호스로 뿌리는 세균 분무는 해변에 깔린 짙은 안개 속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다. 데트릭 기지 연구원들은 그 세균들이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 8개 도시 중심부에 이르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히는지를 기록했다.

문제는 모의실험 과정에서 세균에 취약한 노약자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는 점이다. 세균을 뿌린 일주일 뒤, 11명의 환자가 심각한 요로 감염으로 샌프란시스코 스탠포드 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이 가운데 75살 난 환자 1명이 죽었다. 의사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허둥댔고 나중에 그 사실을 의학지에 실었다. 2015년 6월 미 잡지 <디스커버>(Discover)에 실린 그 때의 기록은 이렇다.

스탠포드 대학병원 의사들은 특이하고 예상치 못한 발견을 했다. 세라티아 세균 감염은 매우 드물어서 철저한 역학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 특이한 유기체의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 스탠포드 의료진은 보고서에서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임상 관찰로서 인간의 소변에서 붉은 색소를 생성하는 박테리아를 분리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중에 두 명의 환자에게 균혈증이 생겼고, 한 명의 환자는 반복적인 요로 감염과 심장 감염의 합병증으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미생물학 역사상 세라티아의 첫 번째 발병으로 기록되었다.
- Rebecca Kreston, Blood & Fog: The Military's Germ Warfare Tests in San Francisco

최후

MK 울트라 프로젝트와 세균무기 연구윤리에 대한 자책

올슨은 1952년 5월 문제의 CIA 심문 프로그램인 아티초크 프로젝트에 관계하게 됐다.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LSD와 같은 약물, 최면과 더불어 필요할 경우 고문을 해서라도 스파이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려는 실험적인 심문 기법이었다. 말이 '실험'이지 약물·최면·고문을 결합한 심문을 받는 용의자의 결말은 대부분이 초죽음 상태였고 때로는 죽기도 했다. 1953년 CIA 안에서는 마인드 컨트롤로 용의자를 세뇌시킨다는 이 기법을 'MK 울트라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올슨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이 또 있었다. 유럽으로 출장을 가는 길에 그곳 CIA 안전가옥에서 끔찍한 순간들을 마주하게 됐다. 소련 스파이로 의심 받은 용의자들이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끝내 숨을 거두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이었다. 그러면서 "이건 아니지 않는가"하는 직업적인 회의를 강하게 느꼈고, 사표를 내고 떠날 생각을 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올슨이 데트릭 기지를 그만 두려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직업적 스트레스였다. 당시 올슨과 그의 동료 연구자들은 세균무기와 아울러 보툴리누스 세균과 탄저균을 요인 암살용으로 연구 개발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1960년 아프리카의 반미 성향 지도자였던 패트리스 루뭄바 콩고 총리를 암살하려고 보툴리누스 세균을 아프리카로 실어 보냈다. 그러나 CIA 요원들은 삼엄한 보안을 뚫는 데 실패했다. 미국에겐 다행히도, 루뭄바가 쿠데타 군에게 살해되자, 그 암살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2]

올슨이 특히 노력을 기울인 것은 탄저균을 은밀하게 퍼트리는 에어로졸 개발이었다. 그 과정에서 데트릭 기지 안에서 실험 재료로 썼던 동물들이 병원균이나 가스에 중독돼 처참하게 죽는 모습들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침에 데트릭 기지로 출근한 뒤 실험실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는 원숭이들을 볼 때마다 올슨은 우울해졌다.

올슨의 집은 기지 철조망 바깥에 바로 맞닿아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 아내 앨리스는 남편 올슨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금세 알아챘다.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원숭이들이 죽을 때마다 올슨은 입을 굳게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죽기 얼마 전부터 그는 아내에게 데트릭을 떠날 뜻을 비쳤다고 한다.

한반도 세균전에 대한 반발

올슨이 사표를 내려 했던 요인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세균전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세균무기로 성능을 실험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데트릭 기지에서 미 CIA 직원으로 일한 세균전문가 올슨이 모를 리 없었다. 올슨은 직급상이나 업무상으로도 그런 사실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에롤 모리스의 다큐 <웜우드>(Wormwood)를 보면, 올슨의 아들 에릭은 2001년 그가 어릴 때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던 데트릭 기지의 동료 연구원 노먼 케노이어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에릭,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린 게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은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해야 해."

그 말을 듣고 에릭은 케노이어의 집으로 찾아갔다. 노먼은 전부터 에릭이 짐작해왔던 예민한 대목을 들려주었다. "네 아버지는 미국이 한국에 세균무기를 사용한다고 생각해 격분했어." 그 말을 들은 아들 에릭은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사실을 못 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CIA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끝내 제거 대상에 올랐음을 확신하게 됐다.

제거 대상에 오르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요인들이 겹쳐 1953년 말 무렵 올슨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급기야 올슨은 '직업적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 악화'를 이유로 상사인 빈센트 루웨트 중령에게 사직할 뜻을 밝혔다. 올슨은 그 무렵 동료들에게도 "내가 그냥 사라지게 해달라"(just let me disappear)는 말을 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루웨트 중령은 "사표를 내려하지 말라"고 말렸다. 올슨이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로 뒤 올슨을 동료 연구원 래시브룩과 함께 뉴욕으로 떠나보냈다. 명분은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이었지만,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캐나다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자 역사학자인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올슨의 맏아들 에릭과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서로 얼굴을 알고 지냈다. 1970년대 중반 이그나티에프는 역사학 박사과정을, 에릭은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그나티에프는 <뉴욕타임스>에 '누가 프랭크 올슨은 죽였는가'란 제목을 단 기고문에서 CIA가 올슨을 '위험 인물'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제보가 있었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프랭크 올슨의 여권에 있는 출입국 도장은 그가 1953년 여름에 스웨덴, 독일, 영국에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 언론인 고든 토마스를 통해 (올슨의 큰 아들) 에릭은 그의 아버지가 런던에서 (용의자) 세뇌 기술에 대해 영국 정보부에 조언을 해왔던 정신과의사 윌리엄 서건트를 만났고, 그에게 CIA의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건트의 평생 친구였던 토마스에 따르면, 올슨은 서건트에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영·미 공동 비밀 시설들에서 끔찍한 약물실험과 고문이 저질러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서건트는 올슨의 말을 들은 뒤 그가 보안을 위태롭게 한다고 영국 정보기관에 알렸다. 그러면서 (영국 윌트셔에 있는 과학 및 국방기술연구소, 사실상의 생화학무기 관련 연구소인) 포톤 다운(Porton Down)에 올슨의 접근을 막으라고 권고했다.
-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누가 프랭크 올슨을 죽였는가? <뉴욕타임스> 2001년 4월 1일

죽음

1953년 11월28일 새벽 2시30분 경, 스태틀러 호텔의 야간 근무자는 어떤 사람이 호텔 창문으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호텔 앞 보도에는 한 중년 남성이 속옷과 반바지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는 등을 펴고 누워 있었지만 다리는 끔찍하게 꺾인 모습이었다. 그래도 숨이 붙어 있었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낮게 중얼거렸다. 구급차가 왔을 무렵, 그는 숨을 거두었다. 야간 근무자가 위를 쳐다보니 11층 높이의 호텔방 창문이 깨지고 블라인드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경찰과 함께 야간 근무자가 문제의 방인 1018A호실으로 올라가보니, 한 남자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데트릭 기지에 근무하는 화학자 로버트 래쉬브룩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보니, 동료 과학자인 프랭크 올슨이 창밖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래시부룩은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이라 다른 사람을 들어 올려 창밖으로 내던질만한 힘은 전혀 없어 보였다. 호텔 교환원은 사건 바로 뒤에 1018A호실에 있던 사람이 누군가와 짧게 통화하면서 "그가 가버렸다"(He's gone)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래시브룩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죽음과 관련된 의혹

1975년

올슨의 가족은 친구들에게 그가 “넘어지거나 뛰어내려” “치명적인 신경 쇠약”을 겪었고 그 결과 추락사했다고 말했지만, 1975년 록펠러 위원회가 CIA의 MKULTRA 활동 일부를 폭로하기 전까지 가족은 비극을 둘러싼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올슨이 죽기 9일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LSD를 투여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가족이 올슨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기관을 고소할 계획이라고 발표한 후, 정부는 그들에게 $1,250,000의 법정 밖 합의금을 제안했고 나중에는 $750,000로 줄였다.[3] 가족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CIA 국장 윌리엄 콜비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1994년~1996년

1994년 에릭 올슨은 아버지의 시신을 발굴해 어머니와 함께 묻었다. 가족들은 두 번째 부검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올슨이 사망한 직후 작성된 1953년 의료 보고서에는 신체에 상처와 찰과상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 올슨이 CIA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이론이 촉발되어 조지워싱턴대학교 국립법률센터의 법학 및 법의학 교수인 제임스 스타스(James Starrs)가 두 번째 부검을 실시했다. 그의 팀은 몸에 베인 상처와 찰과상이 있는지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올슨의 머리 왼쪽에서 큰 혈종과 가슴에 큰 부상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팀은 머리의 둔기 외상과 가슴의 부상이 추락 중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스타스는 이 증거를 "살인을 명백히 암시하는" 증거라고 불렀다.

또한 1994년에 에릭 올슨은 미국 하원의 정부 운영 위원회의 입법 및 국가 안보 소위원회 청문회에서 미국 정부의 냉전 시대 인간 대상 실험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럽고 신비한 죽음이 그의 가족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CIA가 아버지의 마지막 날에 대한 더 많은 세부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기 위해 진행 중인 싸움에 도움을 줄 것을 의회에 호소했다. 에릭 올슨은 사망에 대한 법의학적 증거가 CIA가 첫 번째 암살 매뉴얼에서 발견한 방법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간단한 암살에서 가장 효과적인 사고는 75피트 이상 단단한 표면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2012년 이후

2012년 11월 28일, 에릭 올슨과 닐스 올슨은 워싱턴 D.C.의 미국 지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불특정 보상 손해 배상은 물론 아버지의 사망 및 CIA가 주장한 기타 문제와 관련된 문서에 대한 접근권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부분적으로 1976년 가족과 정부 간의 합의로 인해 2013년 7월에 기각되었다.

넷플릭스는 올슨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바탕으로 에롤 모리스가 감독한 <웜우드(2017)>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미니시리즈를 출시했다. <웜우드> 다큐의 핵심 내용은 이러하다. △미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미 생화학무기 연구·개발기지)에서 일하던 세균학자(박사) 프랭크 올슨(Frank Olson, 1910-1953)은 다름 아닌 CIA 요원이었고 △미국의 한반도 세균무기 사용과 미국 시민을 상대로 한 모의실험, LSD 약물과 고문을 이용한 CIA의 잔혹한 인간 심문 방식 등을 못 마땅하게 여겼고 △1953년 맨해튼 고층호텔에서 떨어져 숨진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 그것도 미 정보기관인 CIA가 처형했다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는 프랭크 올슨이 이 사건의 피해자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은폐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쉬는 자신의 출처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출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학자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여전히 사실에 저항하지만, [에릭] 올슨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앨런 덜레스, 리처드 헬름스와 미국 정부 고위층의 다른 이름 없는 사람들이 에릭의 아버지 [프랭크 올슨]이 한국전쟁 중 미국의 생물학전, 1950년대 초 유럽의 비밀시설에서 소련 요원과 전 나치 '소모품'에 대한 고문과 처형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를 살해한 CIA는 올슨의 죽음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이후 올슨이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은 LSD가 든 칵테일의 영향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이제 올슨이 정확히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메릴랜드에 있는 CIA 수련원에서 LSD를 투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실험에서 그가 실제로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지자 그는 뉴욕으로 이송되어 처분되었다."[4]

참고 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