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론
다원론(한자: 多元論, 독일어: Pluralismus, 라틴어: Pluralistarum)은 세계의 통일성을 부정하고 세계의 다원성 혹은 다수성을 현실의 기본 규정으로 삼는 세계관을 일컫는다.
개요
‘pluralismus’은 C. 볼프가 그의 저서 《합리적 사상》에서 최초로 사용한 용어이다.[1] 그는 세계의 본질을 다수로 상정하는 모든 철학에 대해 다원론적 세계관이라고 명명하였다.[1]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다원론은 〈네 가지 원소설〉의 주창자인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는 세계가 흙, 공기, 물, 불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네 가지 원소를 통틀어 리조마타(rhizomata)라고 칭하였다. 그는 네 가지 원소가 사랑(philia)과 미움(neikos)에 의해 혼합(mixis)되고 분리(diallaxis)됨을 반복하며 존재를 이루고 이것이 세계의 모든 복잡한 현상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2]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엠페도클레스는 네 가지 원소의 혼합이 사람의 모습으로, 또는 야생 짐승들의 종족, 또는 식물, 조류의 모습 등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
자연발생적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 역시 다원론적 세계관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심플리키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그가 말하는 실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였다:
“ | "데모크리토스는 장소를 허공, 아무것도 아닌 것, 한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이름들로 부르는 한편, 실체(ousia)들 각각을 어떤 것(to den), 꽉 찬 것(to naston),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그것[실체; 인용자]들은 온갖 모양(morphai)과 온갖 형태(schemata) 그리고 크기의 차이를 갖는다고 그는 생각한다."[3] | “ |
심플리키오스, ≪천체에 관하여≫ 주석 |
데모크리토스는 세계가 물질적 존재인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심플리키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주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그 원소가 세계를 이루는 가장 최소의 단위라고 간주하면서도, 그것들의 모양, 형태, 크기는 각기 다르다고 간주함으로써 다원론적 세계관을 전개한 바 있다.
그가 유물론적 일원주의자였다면, 물질(그가 원소라고 한)이 기본 규정임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기본 규정은 동일성을 확보한 것이며, 그 규정에 대해서 모양이나 형태 등의 이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이루는 가장 최소의 단위로서 실체(그가 원소라고 명명한)를 언급하면서, 이 원소가 모양, 형태, 크기에서 각자 상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기에 다원론자로 분류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경우와 유사하게, 레우키포스 또한 다원론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근대 이후 철학에서 다원론은 초기에는 G. W. 라이프니츠, 후기에는 신칸트주의 서남학파(또는 바덴학파라고도 불리는)[4]에 의해 전개된 바 있다.[5]
바덴학파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에는 각자 폐쇄된 체계로서 서로에 대해 무한한 틈을 지니고 있으며, 전자가 후자에 대해, 후자가 전자에 대해 관여할 수 없다고 간주하였다.[6] 이 학파는 이 주장을 다원론을 통해 정당화하였다. 빈델반트와 리케르트는 정신과학의 학문적 체계는 실체개념이 아니라 관계개념에 의거하며, 자연과학적 현상법칙이 아니라 주관에 의한 가치선택에 기반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빈델반트와 리케르트는 그간 전통적으로 논의되던 실체개념을 인식주관이 무한히 구상할 수 있는 무한한 관념적 상(그가 ‘가치’라고 명명한)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개성이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은 정신과학이라는 영역 뿐이며, 따라서 이 학문 체계를 ‘개성기술적’[7]이라고 하였다.[8]
리케르트는 인식주관에 의해 관계지어진 ‘이해들’(또는 ‘가치들’)이 문화과학을 정초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의 제자 에밀 라스크(Emil Lask)는 이 견해를 다양한 주관적 관념론과 절충하는 작업을 도맡았다.
바덴학파의 다원론은 수많은 주관적 관념론과 절충 과정을 거쳐 방대한 체계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철학’이라고 불린다.[1]
가치철학은, 질적으로 상이한 관념적 형식으로 구상된 표상들에 의해 각자의 독립된 계(界)를 형성되며, 그것이 곧 세계라는 관념론적 다원주의를 전개한다. 가치철학은 객관을 주관 일반으로 전락시키고, 기본 규정에서 파생 규정까지의 결정론적 매개 체계, 즉 질적으로 상이한 범주들의 매개와, 규정 사이의 상호연관을 부정한다.
관념론적 다원주의는 현대 사회민주주의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데, 이는 신칸트주의 서남학파와 마르부르크 학파의 일반적 견해를 절충하여 받아들인 개량주의자 E. 베른슈타인의 칸트주의 노선에서 유래하였다.[9]
‘실용주의’, ‘철학적 인간학’, 인격주의 등 현대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까지 다원론을 전개하여, 세계의 통일성을 부정하고 있다.
참고 문헌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저, 전양범 역 (2016), ≪그리스철학자열전≫, 동서문화사.
- 하인리히 리케르트 저, 이상엽 역 (2004),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책세상.
- 김인곤 역 (2005),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편 (1989), ≪철학대사전≫, 동녘.
같이 보기
각주
- ↑ 1.0 1.1 1.2 《철학대사전》, p. 248.
- ↑ 2.0 2.1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p. 351.
-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p. 547.
- ↑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 등으로 구성된 신칸트주의 학파로, 19세기 말 칸트의 교의와 기계론, 주관주의 등을 절충하여 관념론적 다원주의를 전개하였다.
- ↑ 이와 반대로, 신칸트주의 마르부르크 학파는 관념론적 일원주의를 전개하였다.
- ↑ 대표적으로 리케르트는 "엔트로피의 원리도 세계 전체의 일회적 전개 과정, 즉 ‘세계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임의의 각 부분, 또한 동시에 닫힌 부분에 대해서만 무엇인가를 말해줄 뿐이다"(《문화과학과 자연과학》, p. 216.)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상호작용, 변증법적 연관성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이라는 두 학문 체계가 서로에 대해 절대적인 단절을 전제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 ↑ 빈델반트와 리케르트는 심지어 정신과학이 개성기술적이라는 것의 근거로서 ‘일회적(一回的)인 가치에 의한 학문’이라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일회적인 가치란, 인식주관에 의해 관계된 상(象)은 그것이 주관적으로 ‘일관된’ 이해를 가지면 언제든 가치가 될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은 언제나 일회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pp. 150-151, 220-221.
- ↑ 《철학대사전》, pp. 757-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