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변증법적 방법 (2)

좌파도서관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1. 변증법적 방법 (2)

무정부주의자들은 변증법적 방법을 어떻게 보는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변증법적 방법의 창시자는 헤겔이다. 맑스는 이 방법에서 그릇된 것을 내던지고 그것을 개선하였다. 물론 이런 사정은 무정부주의자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헤겔이 보수주의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헤겔을 “복고주의”의 지지자라고 욕설을 퍼 부으며 “헤겔은 복고주의 철학가이다. … 그는 절대주의적 형식의 관료적 입헌주의를 찬양하며 그의 역사철학의 전체 사상은 복고주의 시대의 철학적 유파에 속하며 이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등등을 열심히 “증명”하고 있다(≪호소≫ 1) 제6호, 체르께지쉬빌리의 논문을 보라).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끄로뽀뜨낀도 자기의 저작에서 역시 이와 같은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실례로 러시아어로 쓴 그의 저서 ≪과학과 무정부주의≫를 보라).


체르께지쉬빌리에서 Sh. G.에 이르기까지의 우리의 끄로뽀뜨낀주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끄로뽀뜨낀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호소≫의 각 호들을 보라).


사실 헤겔이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들과 논쟁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동의할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들의 ≪비판적 비판의 비판≫에서 헤겔의 역사관이 인민의 주권과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은 헤겔이 “복고주의”의 지지자라는 것을 계속 “증명”하고 있으며 날마다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하는가? 아마 이렇게 함으로써 헤겔의 명성을 떨어뜨리며, “반동분자” 헤겔에 있어서는 방법도 “추악”하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려는 것 같다.


이러한 방법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은 변증법적 방법을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방법으로는 자기들의 무지밖에 더 증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빠스깔과 라이프니츠는 혁명가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수학적 방법은 오늘날 과학적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마이어와 헬름홀츠는 혁명가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물리학 분야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과학의 기초로 되었다. 라마르크와 다윈도 역시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진화론적 방법은 생물학을 확립케 하였다. … 그렇다면 헤겔이 비록 보수주의자이지만 그가 변증법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사실을 인정해서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전혀 없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자기의 무지밖에는 더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변증법은 곧 형이상학이다.” 그런데 그들은 “형이상학으로부터 과학을 해방시키며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해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변증법적 방법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호소≫ 제3, 9호의 Sh. G.의 논문과 끄로뽀뜨낀의 ≪과학과 무정부주의≫를 보라).


한심한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말하자면 “자기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격이다. 변증법은 형이상학과 투쟁하는 가운데서 성숙하였고 또 이 투쟁에서 명성을 얻었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변증법은 곧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변증법은 세계에는 영원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세계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며 자연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며 도덕과 풍습도 변하며 정의의 개념도 변하고 진리 자체도 변한다고 말한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은 영원한 진리라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변증법은 “일단 발견된 후에는 다만 암송하기만 하면 되는” 추상적인 “교조적 명제”(엥겔스,≪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를 보라)도 부인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말을 한다.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세계는 영구불변한 그 어떤 것이며(엥겔스, ≪반듀링론≫을 보라), 세계는 그 누구에 의하여 또는 그 무엇에 의하여 영원히 규정되어 있다 ―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자들의 입에서는 항상 “영원한 정의”니, “변함없는 진리”니 하는 말이 나온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시조”인 프루동은 말하기를, 세계에는 영원히 규정된 변함없는 정의가 있으니 이 정의를 미래 사회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관계로 프루동은 형이상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맑스는 변증법적 방법에 의거하여 프루동과 투쟁하였으며, 세계와 모든 것이 변하는 이상 “정의”도 변해야 하며 따라서 “변함없는 정의”란 형이상학의 잠꼬대라는 것을 증명하였다(칼 맑스, ≪철학의 빈곤≫을 보라) 그런데 형이상학자 프루동의 그루지야 제자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하기를 “맑스의 변증법은 곧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은 여러 가지 애매모호한 교조, 예컨대 “인식할 수 없는 것”, “사물 그 자체” 등을 승인하며 결국은 내용 없는 신학으로 넘어가고 만다. 프루동이나 스펜서와는 반대로 엥겔스는 변증법적 방법에 의거하여 이런 교조와 투쟁하였다(≪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를 보라). 그런데 프루동과 스펜서의 제자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프루동과 스펜서는 학자이나 맑스와 엥겔스는 형이상학자라고 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어쨌든 무정부주의자들이 헤겔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그의 변증법적 방법과 혼동하고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불변의 이념에 의거하고 있는 헤겔의 철학체계가 철두철미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온갖 불변의 이념을 부정하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이 시종일관 과학적이며 혁명적이라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칼 맑스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치명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은 칭찬하였다. 맑스의 말에 의하면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은 “어떤 것 앞에도 굴하지 않으며 그 본질상 비판적이며 혁명적이다.” (≪자본론≫ 제1권, 서문을 보라.)


이것이 엥겔스가 헤겔의 방법과 그의 체계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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