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맑스의 이론적 학설을 알았다.
그의 방법을 알았으며 그의 이론도 역시 알았다.
우리는 이 학설에서 어떠한 실천적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변증법적 유물론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간에는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변증법적 방법에 의한다면 나날이 자라나며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며 훌륭한 미래를 위하여 꾸준히 싸우는 그 계급만이 노예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라나며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며 미래를 위하여 싸우는 유일한 계급은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무하여야 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맑스의 이론적 학설에서 나오는 첫 실천적 결론이다.
그러나 복무하는 데도 여러 가지가 있다. 베른슈타인도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무”하고 있다. ― 그는 사회주의를 잊어버리라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설교하고 있다. 크로포트킨도 역시 프롤레타리아에게 “복무”하고 있다. ― 그는 광범한 산업토대를 못 가진 분산적인 공동체적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하고 있다. 칼 맑스도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무하고 있다. ― 그는 현대적 대공업의 광범한 토대에 의거하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를 건설하라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롭도록 하자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무하여야 할 것인가?
유물론적 이론에 의한다면, 어떠한 이상이든 그것이 국내의 경제적 발전에 모순되지 않고 그 발전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되는 때에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직접 봉사할 수 있다. 자본주의 제도의 경제적 발전이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 현대의 생산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요 과업은 자본주의적 소유를 전복하고 사회주의적 소유를 확립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잊어버리라고 설교하는 베른슈타인의 학설이 경제적 발전의 요구와 근본적으로 모순되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자본주의 제도의 경제적 발전은 현대의 생산이 날로 확장되어 개개의 도시나 도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부단히 그 한계를 타파하여 전 국토를 포괄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의 확장을 환영하여야 하며 개개의 도시나 공동체가 아니라 전 국가의 불가분적인 전 영토를 미래의 사회주의의 기초로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영토는 앞으로 더욱더 확장될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사회주의를 개개의 도시나 공동체의 한계 내에 몰아넣는 끄로뽀뜨낀의 학설이 강력한 생산 확장의 이해와 모순되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범한 사회주의적 생활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투쟁 하는 것 ― 우리는 이렇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복무하여야 한다.
이것이 맑스의 이론적 학설에서 나오는 두 번째 실천적 결론이다.
명백히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제도는 자본주의 제도이다. 이것은 세계가 두 개의 서로 대립되는 진영 즉 한 줌도 못 되는 소수의 자본가 진영과 대다수를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진영으로 나뉘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지만 여전히 가난하며 자본가는 일을 안 하지만 부유하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자가 미련하고 자본가가 영특하기 때문인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의 열매를 빼앗기 때문이며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노동자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의 열매를 가지게 되는가? 왜 노동자가 자본가를 착취하지 않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가?
그것은 자본주의 제도가 상품생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며 어디서나 매매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다. 이 제도하에서는 일용품이나 식료품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노동력, 그들의 피, 그들의 양심까지도 살 수 있다. 자본가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며 그들을 고용한다. 이는 자본가는 그가 사들인 노동력의 주인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자기가 판 노동력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하면 이 노동력이 만들어 낸 것은 이제는 노동자의 것이 안 되고 자본가의 것으로 되며 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가령 당신이 판 노동력이 하루에 100루불의 상품을 생산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것으로 되지 않으며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자본가의 것으로 되며 그에게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루의 임금을 받을 뿐이다. 그것은 물론 당신이 아껴 쓰는 경우에야 겨우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며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의 열매를 가지며 또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본가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는가? 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고용되지 않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는가?
그것은 생산도구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가 자본주의 제도의 주되는 기초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장, 토지, 지하자원, 삼림, 철도, 기계 및 기타 생산수단이 한 줌도 못 되는 소수 자본가들의 사적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가 이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가가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 노동자를 고용하게 된 이유이다. ― 그렇지 않다면 그의 생산도구와 생산수단은 아무런 이윤도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게 된 이유이다. ― 그렇지 않다면 그는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성격을 명백히 보여 준다. 첫째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어떤 단일하고 조직된 생산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완전히 개개의 자본가들의 사적 기업체로 분할되어 있다. 둘째로, 분산된 이 생산의 직접적인 목적은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윤증가를 위한 판매용 상품을 생산하는 데 있다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누구나 다 자기의 이윤을 증대시키려고 열망하는 것만큼 그들은 저마다 될 수 있는 대로 더 많이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여 그 결과 시장에 급격히 상품은 차고 넘쳐나며 상품가격은 떨어져 드디어 전반적 공황이 닥쳐오게 된다.
이렇듯 공황, 실업, 생산의 중단, 생산의 무정부성은 현대의 비조직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비조직적인 이 사회제도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아직 그것이 노동계급의 공격에 완강하게 대항하고 있는 것은 우선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정부가 그 사회제도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