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유물론적 이론 (3)

좌파도서관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2. 유물론적 이론 (3)

무정부주의자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이론을 어떻게 보는가?


변증법적 방법이 헤겔로부터 시작한다면 유물론적 이론은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의 발전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방하기 위하여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의 부족점을 이용하려고 한다. 헤겔과 변증법적 방법에 대하여 말한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의 이러한 계책은 그들 자체의 무지 이외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지적하였다. 포이에르바흐와 유물론적 이론에 대한 그들의 공박에 대해서도 역시 동일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무정부주의자들은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하기를 “포이에르바흐는 범신론자였으며…” 그는 “인간을 신격화하였으며…”(≪호소≫ 제7호, 젤렌지의 논문을 보라.) “포이에르바흐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이란 곧 먹는 존재이며…” 이로부터 맑스는 “가장 주요하며 가장 제1차적인 것은 경제적 처지이다. …”(≪호소≫ 제6호, Sh. G.의 논문을 보라)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물론 포이에르바흐의 범신론에 대해서나 그가 인간을 신격화한 데 대해서나 또 그와 유사한 그의 다른 오류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도리어 맑스와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오류를 폭로한 첫 사람들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미 폭로된 포이에르바흐의 오류를 또 다시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아마도 포이에르바흐를 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이론을 비방하고 싶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우리가 문제를 공정하게 고찰한다면, 역사상의 많은 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이에르바흐에게도 그릇된 사상과 함께 옳은 사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여전히 “폭로”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


다시 한 번 말해 두거니와, 그들은 이러한 계책으로는 그들 자신의 무지 이외에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이제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이 유물론적 이론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들은풍월로 그 이론을 비판해 보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들은 흔히 서로 모순에 빠지며 서로 논박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물론 우리 “비판가”들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실례로 체르케지쉬빌리 씨의 말에 의한다면 맑스와 엥겔스는 일원론적 유물론을 증오하였으며 그들의 유물론은 속류 유물론이고 일원론적 유물론은 아니었다고 한다. 즉,


엥겔스가 몹시 증오한 자연 과학자들의 위대한 과학과 그 진화론 체계, 생물 변이설 및 일원론적 유물론은 … 변증법을 기피하였다 운운.
≪호소≫ 제4호, 체르케지쉬빌리의 논문


체르케지쉬빌리가 찬성하고 엥겔스가 “증오한”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일원론적 유물론이며 따라서 그것은 찬성을 받을 만하지만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은 일원론적 유물론이 아니므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무정부주의자의 말에 의하면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은 일원론적 유물론이며 따라서 배격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한다. 즉,


맑스의 역사적 견해는 헤겔의 열성형질의 되풀이다. 일반적으로는 절대적 객관주의의 일원론적 유물론과 특수하게는 맑스의 경제적 일원론이란 자연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이론상으로 오류인 것이다. … 일원론적 유물론은 서툴게 위장한 이원론이며 형이상학과 과학의 타협물이다. …
≪호소≫ 제6호, Sh. G.의 논문


결국 일원론적 유물론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며, 맑스와 엥겔스가 일원론적 유물론을 증오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이 일원론적 유물론자라는 사실이 일원론적 유물론이 배격되어야 할 이유라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뒤죽박죽이다. 누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알 수 있으면 어디 말해 보라! 아직 그들 자신이 맑스의 유물론의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으며 아직 그들 자신이 맑스의 유물론이 일원론적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있으며 아직 그들 자신이 속류 유물론이 나은지 일원론적 유물론이 나은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 그런 주제에 맑스주의를 분쇄하였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우리의 귀청이 터질 듯이 요란을 떨고 있다.


옳소, 옳소, 무정부주의자 여러분이 앞으로도 서로 상대방의 견해를 이렇듯 열성적으로 분쇄한다면 미래는 틀림없이 무정부주의자들의 것일 것이오. …


이보다 못지않게 우스운 것은 몇몇 “저명한”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학의 여러 가지 유파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드러난 바에 의하면 그들은 과학에 여러 가지 종류의 유물론이 있으며 그것들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 예를 들면 관념적 측면의 의의와 물질적 측면에 대한 관념적 측면의 작용을 부인하는 속류 유물론도 있으며 또 관념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의 상호관계를 과학적으로 고찰하는 일원론적 유물론―맑스의 유물론적 이론―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여러 가지 종류의 유물론을 혼동하며 심지어 그들 간의 확연한 차이도 보지 못하는 주제에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우리는 과학을 갱신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크로포트킨은 자기의 “철학적” 저서에서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는 “현재 유물론 철학”에 의거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으나 그는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가 어떤 “유물론 철학”에 의거하고 있는가, 속류 유물론인가 일원론적 유물론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다른 “유물론 철학”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다. 명백히 그는 유물론의 여러 가지 경향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또 이 경향들을 서로 혼동하는 것은 “과학을 갱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터무니없는 무지를 드러내 놓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크로포트킨,≪과학과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와 그의 철학≫을 보라).


크로포트킨의 그루지야 제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말해야 한다. 들어보라:


엥겔스의 견해에 의하면, 카우츠키의 견해도 마찬가지이지만, 맑스는 특히 “유물론적 이론”을 발견함으로써 인류 사회에 거대한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옳은가?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 기구가 지리적, 기후-지구적, 우주적, 인류학적 및 생물학적 조건에 의하여 운동하게 된다는 견해를 가진 역사가들과 학자들과 철학가들은 모두 다 유물론자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 … 까닭이다.
≪호소≫ 제2호를 보라.


이들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와 돌바크의 “유물론” 간에 혹은 맑스와 몰레쇼트의 “유물론” 간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셈이다! 과연 한심한 비판이다! 이런 지식을 가진 자가 과학을 갱신하려고 덤벼든 것이다! 속담에 “구두수선공이 과자를 굽게 되면 엉망이 된다!…”고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우리의 “저명한” 무정부주의자들은 맑스의 유물론이 “창자(belly)의 이론”이라고 한 말을 어디선가 얻어듣고 맑스주의자들을 비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이에르바흐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이란 곧 먹는 존재이다. 이 공식은 맑스와 엥겔스에게 마술과 같이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맑스는 “가장 주요하며 가장 일차적인 것은 경제적 처지, 생산관계…”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무정부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철학적 훈시를 한다.


이 목적(사회생활)을 위한 유일한 수단은 먹는 것과 경제적 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 만일 이데올로기가 주로 일원론적으로 먹는 것과 경제적 처지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라면 대식가들이 천재로 되었을 것이다.
≪호소≫ 제6호,Sh. G.의 논문


보다시피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을 논박하기는 이렇듯 쉬운 일이다. 맑스주의의 “비판가”라는 명성을 대번에 얻자면 어떤 여학생에게서 맑스와 엥겔스에 대한 항간의 소문을 얻어듣고 ≪호소≫ 같은 신문에서 철학적 뻔뻔스러움을 가지고 그 소문을 되풀이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신사 여러분, 어디서, 어느 때, 어느 행성에서 어떤 맑스가 “먹는 것이 이데올로기를 규정한다”고 말하였는가? 왜 당신들은 자기들이 말한 바를 확증하기 위하여 맑스의 저서에서 단 한 구절, 단 한 마디라도 인용하지 않았는가? 사실 맑스는 사람들의 경제적 처지가 그들의 의식,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규정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먹는 것과 경제적 처지가 같은 것이라고 누가 당신들에게 말하였는가 그래 당신들은 먹는 것과 같은 그런 생리학적 현상이 사람들의 경제적 처지와 같은 그런 사회학적 현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어떤 여학생이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현상을 혼동한다면 용서할 수 있겠지만 “사회민주주의의 정복자”이며 “과학의 개혁자”인 당신들이 어찌 그렇듯 경솔하게 여학생의 오류를 반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또 먹는 것이 어떻게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가 한 말을 좀 곰곰이 생각해 보라. 먹는 것과 먹는 형식은 변하지 않는다. 옛날에도 사람들은 지금처럼 음식을 씹어 먹고 소화하였지만 부단히 변하고 있다. 겸해서 말한다면 이데올로기 형태에는 고대적, 봉건적,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적 형태가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이 부단히 변하는 것을 규정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넘어가자.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맑스의 유물론은 “곧 병행설이다…” 혹은 달리 말하면 “일원론적 유물론은 서툴게 숨겨진 이원론이며 형이상학과 과학의 타협물이다…”


맑스가 이원론에 빠지게 된 것은 그가 생산관계를 물질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인간의 지향과 의지를, 비록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의가 없는 환상으로, 이상향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호소≫ 제6호, Sh. G.의 논문


첫째로, 맑스의 일원론적 유물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 병행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맑스 유물론의 관점에 의하면 물질적 측면 즉 내용은 관념적 측면 즉 형식보다 반드시 앞선다. 병행설은 이 관점을 부인하고, 물질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이 서로 앞서지 않고 함께 병행적으로 발전한다고 단언한다.


둘째로, 설사 “맑스가 생산관계를 물질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인간의 염원과 의지를, 아무런 의의가 없는 환상으로, 공상으로 묘사한” 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그것이 과연 맑스가 이원론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알다시피 이원론자는 관념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을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로 보면서 양쪽에 동등한 의의를 부여한다. 그런데 당신들이 말한 대로 맑스가 물질적 측면을 더 높이 내세운 반면에 관념적 측면은 “공상”이라 하여 거기에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비판가” 여러분, 당신들은 대체 어디서 맑스의 이원론을 끌어내었는가?


셋째로, 일원론은 물질적 형태와 관념적 형태를 가진 자연 혹은 존재로부터 즉 한 가지 원리로부터 출발하는 반면에 이원론은 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서로 부정하는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으로부터 즉 두 가지 원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바인데 유물론적 일원론과 이원론 간에 어떠한 연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넷째로, 대체 어느 때에 맑스가 “인간의 염원과 의지를 공상으로, 환상으로 묘사하였는가?” 사실 맑스는 “인간의 염원과 의지”를 경제적 발전으로써 설명하였고 또 어떤 탁상공론적인 철학자들의 염원이 경제적 환상에 부합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공상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맑스가 인간의 염원을 모두 다 공상적인 것으로 보았단 말인가? 그래 이 점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야 하겠는가? 그래 당신들은 “인류는 언제나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자기에게 제기한다”(≪정치 경제학 비판≫ 서문을 보라)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류는 공상적인 목적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맑스의 말을 읽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우리의 “비판가”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의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다섯째로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염원과 의지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는 말을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왜 당신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어디에서 이 말을 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루메르 18일≫, ≪프랑스 계급투쟁≫, ≪프랑스 내전≫ 및 기타 이와 유사한 소책자들에서 과연 맑스는 “염원과 의지”가 가지는 의의를 논하지 않았단 말인가? 만일 맑스가 “염원과 의지”에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의지와 염원”을 사회주적 정신으로 발전시키려고 하였으며 무엇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속에서 선전을 하였는가? 또 엥겔스가 1891-94년경에 쓴 유명한 논문들에서 지적한 것이 바로 “의지와 염원의 중요성”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물론 맑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와 염원”은 경제적 처지에서 그 내용을 얻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의지와 염원” 자체가 경제관계의 발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그래 이렇듯 단순한 사상이 무정주의자들에게는 그렇게도 이해하기 어렵단 말인가?


무정부주의자 여러분의 또 한 가지 “비난”은 다음과 같다. “내용이 없는 형식이란 생각할 수 없다. …” 그렇기 때문에 “형식이 내용을 뒤따른다(즉 내용보다 뒤떨어진다―K.)고는 말할 수 없다. … 형식과 내용은 ‘공존한다.’ … 그렇지 않다면 일원론은 황당한 것이다.” (≪호소≫ 제1호, Sh. G.의 논문을 보라.)


우리의 “학자”는 또다시 자그마한 혼란에 다졌다. 형식이 없는 내용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 옳다. 그러나 현존하는 형식이 현존하는 내용에 결코 완전히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옳다. 형식은 내용보다 뒤떨어지며 새로운 내용은 어느 정도까지는 항상 낡은 형식 속에 있게 되며 그 결과 낡은 형식과 새로운 내용 간에는 언제든지 갈등이 있게 된다.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혁명이 일어나며 바로 이 점에서 맑스의 유물론의 혁명적 정신이 표현된다. “저명한” 무정부주의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 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그들 자신의 탓이고 유물론적 이론의 탓은 아니다.

이상이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이론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견해(이런 것도 견해라고 할 수 있다면)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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