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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에 [[제네바]]로 망명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는 가운데 이전의 [[바쿠닌]]적인 [[아나키즘]] 입장에서 정치투쟁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인민의 의지'당과의 합동 교섭을 하는 가운데 '인민의 의지'당이 주도한 「러시아 사회혁명 문고」의 한 권으로서 『[[공산당 선언]]』(러시아어판 서문, 1872년 독일어판 서문, 『내전』 발췌, 「국제노동자협회 일반규약」)의 러시아어 번역을 행하고, 82년에 제네바에서 출판했다. 교섭이 결렬된 후 83년에 러시아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그룹 '노동해방'을 결성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의 러시아어 번역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보급을 위한 '현대 사회주의 총서'를 발간했다. 지적으로 플레하노프의 지도를 받던 이 그룹은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규정하였고 1914년까지 [[레닌]]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1880년에 [[제네바]]로 망명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는 가운데 이전의 [[바쿠닌]]적인 [[아나키즘]] 입장에서 정치투쟁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인민의 의지'당과의 합동 교섭을 하는 가운데 '인민의 의지'당이 주도한 「러시아 사회혁명 문고」의 한 권으로서 『[[공산당 선언]]』(러시아어판 서문, 1872년 독일어판 서문, 『내전』 발췌, 「국제노동자협회 일반규약」)의 러시아어 번역을 행하고, 82년에 제네바에서 출판했다. 교섭이 결렬된 후 83년에 러시아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그룹 '노동해방'을 결성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의 러시아어 번역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보급을 위한 '현대 사회주의 총서'를 발간했다. 지적으로 플레하노프의 지도를 받던 이 그룹은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규정하였고 1914년까지 [[레닌]]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
이 총서의 한 권으로서 『[[공상에서 과학으로]]』(1884), 『[[자유무역론]]』(1885), 『[[철학의 빈곤]]』(1886), 「[[포에이르바흐에 대한 테제]]」(1892) 및 「[[루게에게 보내는 서간]]」(1892년 『사회민주주의자』 지에 게재)의 러시아어 번역을 감수하는 동시에 '인민의 의지'당 계열의 사상가들을 비판했다. | 이 총서의 한 권으로서 『[[공상에서 과학으로]]』(1884), 『[[자유무역론]]』(1885), 『[[철학의 빈곤]]』(1886), 「[[포에이르바흐에 대한 테제]]」(1892) 및 「[[루게에게 보내는 서간]]」(1892년 『사회민주주의자』 지에 게재)의 러시아어 번역을 감수하는 동시에 '인민의 의지'당 계열의 사상가들을 비판했다. [[1889년 파리 국제노동자대회]]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개요|사회민주주의]]자의 대표로서 참가해 러시아 혁명은 노동운동으로서 승리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후에 울리야노프(레닌)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결성한다. | ||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플레하노프는 자신이 집필·편집한 책과 팜플렛 및 잡지들을 통해 인민주의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를 보급하였고 1914년까지 운동을 지배했던 장기적 전략의 전반적 흐름을 주도하였다. |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플레하노프는 자신이 집필·편집한 책과 팜플렛 및 잡지들을 통해 인민주의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를 보급하였고 1914년까지 운동을 지배했던 장기적 전략의 전반적 흐름을 주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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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 ||
1905년 이후로 | 1905년 이후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플레하노프의 위치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하여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적으로 역사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 ||
===말년=== | ===말년=== | ||
플레하노프는 1914년에는 공공연한 전쟁 지지자가 되었으며, 1917년에 추방된지 35년 만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 플레하노프는 1914년에는 공공연한 전쟁 지지자가 되었으며, 1917년에 추방된지 35년 만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
2022년 4월 24일 (일) 01:29 기준 최신판
Георгий Валентинович Плеханов | |||
❝ | 유한한 모든 것은 그 자체를 취소하고 그 반대 방향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모든 현상에 내재된 자연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에는 반대 현상을 일으키는 힘이 포함된다. | ❞ | |
출생 ▼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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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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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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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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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생애
생애 초기
탄보프 지방의 타타르계 소지주로 군인 일가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페테르부르크의 포병학교에 진학한 후 광산전문학교로 전학하지만 중퇴한다.
플레하노프는 자신의 혁명적 생활을 혁명적 인민주의의 신봉자로서 출발했다. 1876년 12월의 카잔 광산의 데모에서 연설한 이후 혁명 조직인 '토지와 자유'의 활동가로서 공장노동자들의 선동에 종사했다. 1878년에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공동체의 공동적 토지 소유가 러시아의 지배적 생산양식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며 마르크스주의를 거리낌없이 인용했었다. 그는 그 당시에 주류를 이루었던 정치적 테러리즘 노선을 거부하면서 도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최초의 인민주의적 선동가였다. 1879년에 조직이 분열될 때 '인민의 의지'당의 정치테러에 반대하고 농촌에서의 선동을 중시하는 '흑토 재분할'파를 데이치, 악셀로트, 자술리치 등과 함께 결성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다.
1880년에 제네바로 망명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는 가운데 이전의 바쿠닌적인 아나키즘 입장에서 정치투쟁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인민의 의지'당과의 합동 교섭을 하는 가운데 '인민의 의지'당이 주도한 「러시아 사회혁명 문고」의 한 권으로서 『공산당 선언』(러시아어판 서문, 1872년 독일어판 서문, 『내전』 발췌, 「국제노동자협회 일반규약」)의 러시아어 번역을 행하고, 82년에 제네바에서 출판했다. 교섭이 결렬된 후 83년에 러시아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그룹 '노동해방'을 결성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의 러시아어 번역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보급을 위한 '현대 사회주의 총서'를 발간했다. 지적으로 플레하노프의 지도를 받던 이 그룹은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규정하였고 1914년까지 레닌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총서의 한 권으로서 『공상에서 과학으로』(1884), 『자유무역론』(1885), 『철학의 빈곤』(1886), 「포에이르바흐에 대한 테제」(1892) 및 「루게에게 보내는 서간」(1892년 『사회민주주의자』 지에 게재)의 러시아어 번역을 감수하는 동시에 '인민의 의지'당 계열의 사상가들을 비판했다. 1889년 파리 국제노동자대회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대표로서 참가해 러시아 혁명은 노동운동으로서 승리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후에 울리야노프(레닌)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결성한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플레하노프는 자신이 집필·편집한 책과 팜플렛 및 잡지들을 통해 인민주의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를 보급하였고 1914년까지 운동을 지배했던 장기적 전략의 전반적 흐름을 주도하였다.
플레하노프는 보다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수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적이고 정통적인 이론가로서 카우츠키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었다. 플레하노프는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에서 헤겔과 포에이르바흐가 마르크스의 성숙한 사고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며 철학 및 사회 사상의 전반적인 발전을 추적하였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러한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 방법이 모든 인식을 조명해주며 통합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방법을 정치학, 경제학, 철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미학, 문학 비평에 적용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변증법적 방식으로 적용된 경제적 결정론이 완전한 세계관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완수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는 다른 철학적 요소들을 들여옴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개량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맹렬하게 대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베른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의 절충주의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 일원론의 대표적 옹호자였다.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1905년 이후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플레하노프의 위치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하여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적으로 역사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말년
플레하노프는 1914년에는 공공연한 전쟁 지지자가 되었으며, 1917년에 추방된지 35년 만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남은 여생 동안 그는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느끼는 볼세비키의 행동을 비판하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볼세비키의 권력 장악과 그로 인한 불행한 결과의 유발을 개탄하였다.
“ | … 나는 말세(1917년 10월)의 사건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 나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승리를 바라지않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 노동계급이 준비되지 않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보다 더 큰 역사적 비극은 노동계급에게 없을 것이라는 엥겔스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권력 장악)은 금년 2월과 3월에 획득한 위치에서 멀리 후퇴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 “ |
-《변증법적 유물사관》 中 |
사후
레닌은 그의 저서들을 전투적인 유물론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였으며 이러한 저서들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소련의 행동파 세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사상
2단계 혁명론
러시아의 복잡한 사회·경제적 구조의 독특하고 저개발적인 특성을 인식함으로써 플레하노프는 혁명은 필연적으로 2단계로 진행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1단계는 차르 체제와 봉건적 잔재를 반대하는 민주혁명의 단계가 될 것이다. 민주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고 따라서 계급 분화를 가속화시켜 제2단계 또는 사회주의 혁명이 활성화될 집회 및 출판의 자유와 같은 조건들을 갖추어 나가게 할 것이다. 이러한 2단계의 혁명이 추구하는 목적은 분명히 다르지만 시기상으로는 필연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부르주아의 특수한 취약성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와 그 당이 민주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당의 임무는 예외적이라 할만큼 무겁고 복잡하며, 특히 숫자상의 상대적 열세와 의식의 저급성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플레하노프는 노동계급을 조직하고 의식화시키며 응집하는 데 있어서 사회민주적 인텔리겐치아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였다. '인텔리겐치아로 구성된 혁명적 세포'의 단호한 행동이 없이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고 플레하노프는 일관성 있게 주장했다.
변증법적 유물론
참고자료
- 플레하노프, 노동자의 책
-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