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강령 초안 비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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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ocialist.kr/classics-of-socialism-critique-of-the-gotha-program-6/ 「고타강령 초안 비판」: 짧은 비판에 담긴 사회주의의 핵심, 《사회주의자》] | * [http://socialist.kr/classics-of-socialism-critique-of-the-gotha-program-6/ 「고타강령 초안 비판」: 짧은 비판에 담긴 사회주의의 핵심, 《사회주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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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마르크스]] | |||
* [[아이제나흐 강령]] | |||
* [[고타 강령]] | |||
* [[괴를리즈 강령]] | |||
* [[하이델베르크 강령]] | |||
* [[고데스베르크 강령]] | |||
* [[베를린 강령]] (1989년) | |||
* [[함부르크 강령]] (200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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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9일 (토) 15:48 판
고타강령 초안 비판은 1875년 5월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중에서 아이제나흐파에 쓴 편지를 중심으로 한 짧은 문헌이다. 아이제나흐파와 라살레파의 합당으로 새로 작성된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인 《고타강령》에 대한 비판을 배경으로 작성되었다.
배경
1862년 노동자들의 독자적 조직인 ‘전독일노동자협회’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이를 위해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진 중앙위원회라는 노동자 조직은 라살레를 초청하여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역사적 시대의 특성과 노동자계급의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라는 주제의 강연을 진행했다. 이 강연은 이후 『노동자강령』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인쇄되어 널리 읽히게 된다.
그리고 라살레는 1863년 5월 ‘전독일노동자협회’의 의장을 맡게 된다. 이후 이 조직은 ‘라살레파’로 불리게 된다. 라살레는 석달 후 한 여인과의 연애문제로 상대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다. 따라서 그가 ‘전독일노동자협회’ 의장을 맡은 기간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한편 초기 독일 노동운동에 큰 기여를 한 또 다른 지도자가 존재한다. 그는 바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였다. 리프크네히트는 1826년에 태어나 1848년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동맹’ 회원으로 적극 활동했고 혁명이 패배한 후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등과 더불어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는 망명기간 동안 마르크스 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도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1862년 프로이센이 사면령을 내리자 곧장 독일로 넘어가 ‘전독일노동자협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라살레파와의 차이는 분명했고 분열은 예정되어 있었다. 리프크네히트는 한동안 기간지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진에 참여하는 등 라살레파와 협력했지만 라살레파가 프로이센 국가에 우호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이론적, 정치적 차이가 더욱 분명해지자 ‘전독일노동자협회’에서 나와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시기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했던 지도자가 아우구스트 베벨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중심인물인 요제프 몰, 하인리히 바우어 등이 모두 직인 출신이었다.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은 당시 ‘전독일노동자협회’와 경합하던 ‘독일노동자협회동맹’에 참여하여 이를 새로운 정치조직으로 변화시킨다. 이 조직을 기반으로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은 1867년 프로이센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일부 동참하는 ‘작센 인민당’을 결성하여 의회에 진출했다. 그리고 1869년 9월 독일중부에 위치한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이 이끈 사회민주노동자당은 이후 ‘아이제나흐파’로 불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아이제나흐파의 등장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의 오랜 동지들이 주도해서 결성한 당이었기 때문에 이 당에 사상적, 이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에는 라살레파 ‘전독일노동자협회’의 조직력과 규모가 더 컸으나 점차 노동운동의 주도력은 아이제나흐파에게 넘어온다. 1874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라살레파는 아이제나하파보다 1만표 더 득표하지만 의원은 아이제나흐파가 6명으로 라살레파보다 3명 더 가져갔다. 라살레파의 회원수는 1870년 25,000명 정도 됐으나 1874년에는 5,000명으로 급감했다. 이는 라살레파의 이론적, 실천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프로이센 국가와의 협조노선을 밟았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성장하고 있는데도 노동조합의 의의를 부정했다. 또한 라살레 이후 의장을 지낸 슈바이처는 반민주적, 독재적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커져갔다.
결국 라살레파가 먼저 양파의 통합을 제안하여 조직통합이 시도됐다. 양파 통합 추진의 또 다른 배경으로 독일 사회주의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지배계급의 노동자 탄압이 거세진 상황이 존재했다. 통일 독일제국의 재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과정에서 반전 태도를 일관되게 지켰을 뿐 아니라 성장일로에 있던 사회주의노동운동 세력을 가장 큰 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1875년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고타라는 도시에서 통합당대회가 개최되어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이 결성됐다.
아이제나하흐는 통합이라는 대의에 매몰되어 라살레파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 특히 통합당대회에서 결정될 당 강령의 초안은 라살레주의에 대해 너무 많은 이론적 양보를 한 것이었다. 맑스는 정치활동의 일선에 있지는 않았지만 아이제나하파에 큰 이론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를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양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강령 초안을 비판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내용
「고타강령 초안 비판」은 비판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주로 라살레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비판 형식 속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비판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명제도 여기에서 등장한다.
마르크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지적한 라살레주의의 문제점들은 이러하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라살레주의가 “현존 사회를 현존 국가의 기초로 취급하는 대신에 도리어 국가를 그 고유의 '정신적이고 윤리적이며 자유로운 기초'를 보유하고 있는 하나의 자립적인 본질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다. 즉, 오늘날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따라서 오늘날의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라는 계급국가일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라살레는 자본가계급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했지만 또 다른 지배계급인 봉건적 토지소유계급에 대해서는 타협적 태도를 보여, 자본가와 맞선다는 명목으로 토지소유계급과의 협력을 추구했다. 이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비판한 ‘봉건적 사회주의’와 유사한 것이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도 이런 내용이 거론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노동 수단은 토지소유자(토지 소유의 독점은 더구나 자본 독점의 토대이다)와 자본가의 독점이다.” 라살레는 “자본가계급만을 공격하고 토지소유자는 공격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라살레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임금철칙설이었다. 이것은 영국에서 주로 나온 ‘임금기금설’과 대동소이한 주장으로,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는 사회적 몫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라살레는 이것을 ‘철칙’이라 부르며 불변의 법칙인 것처럼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임금인상 투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라살레파는 노동조합의 존재도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이 실제 결정되는 원리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이었고, 성장하고 있는 노동조합 운동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라살레가 죽은 이래로 우리 당 내에는, 임금이란 외견상 그런 것, 즉 노동의 가치나 가격이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나 가격의 가장된 형태일 뿐이라는 과학적 통찰이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고타강령 초안’은 “라살레의 교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라살레는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적 활동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가 중시한 정치적 활동이라는 것은 노동자를 주체로 보고, 노동자의 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고,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위해 정치권력의 획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설명한 국가에 대한 우호적 태도, 토지소유계급과 대결하지 않으려 하는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라살레는 국가가 보조하는 생산협동조합의 조직이 노동자들을 위한 대안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국가를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켜 주는 시혜의 주체로 보고, 노동자를 그 시혜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노동자를 위해 행동할 국가로 라살레가 상정한 존재는 바로 반동적인 프로이센 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