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초대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იოსებ სტალინი | |||
❝ |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이윽고 역사의 바람이 무자비하게 쓸어낼 것이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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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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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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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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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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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소련의 정치가이자 지도자.
1879년 러시아 제국령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1890년대 후반부터 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읽고 조지아에서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고, 체포 투옥 시베리아 유형을 여러번 반복한다. 1차대전 당시에는 투르한스크에서 보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로 돌아와 볼셰비키당에서 다시 활동한다. 적백내전기 전투 지휘관으로써 참전했고, 트로츠키와 경쟁했다. 레닌 사후 권력 공백기를 틈 타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대숙청과 공업화 등을 단행했다. 그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을 물리쳤고, 1950년대 그가 통치하는 소련은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 | 우리는 지금 선진국보다 50~100년 뒤져 있다. 우리는 이 현격한 차이를 10년 내에 좁혀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거나 저들이 우리를 압도하거나, 둘 중 하나다. | “ |
- 이오시프 스탈린 |
생애
초기 생애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현 그루지야(조지아) 동부에 있는 고리에서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비사리온(Vissarion)은 제화공이었으며, 소작 농노 집안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게오르기예브나 겔라드제(Ekaterina Georgievna Geladze)도 역시 농노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시빌리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서도 무차별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폭군이었다. 스탈린은 몇명 안 되는 평민출신(modest origins)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이유 없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스탈린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888년 9살이 되던 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어머니의 항의와 노력으로 스탈린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1894년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했다. 1888년부터 1894년까지 거의 6년의 기간 동안 그는 모범생이었고 장학금까지 받았다. 역사학자 루도 마르텐스는 스탈린이 고리의 초등학교에서 5년 학습 동안 이오세프 주가슈빌리는 총명함과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1894년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그 뿐만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을 정도로 시를 매우 잘 썼다. 그가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1899년이었다고 로버트 서비스는 책에 썼다. 반면 루도 마르텐스는 그보다 더 빨랐다고 책에 썼다. 아무튼 스탈린이 처음으로 맑스주의 비밀 단체를 알게 된 때는 15세로 신학교 2학년이이었다. 그는 크리제(Chelidze)라는 이름의 남자가 소유한 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는 젊은 급진파들이 진보적인 서적을 읽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897년, 18세의 주가슈빌리는 처음 그루지아의 사회주의 조직에 가입하였는데, 그 조직은 조르다니아(Zhordania), 커츠코벨리, 체레텔리(Tseretelli)가 이끌었으며, 스탈린은 노동자들을 위한 학습써클을 이끌었다. 당시에 스탈린은 이미 레닌의 첫 저술뿐만 아니라 플레하노프(Plekhanov)의 저술도 읽었다고 한다. 그러한 진보적인 서적들을 접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2]
혁명가 시절
스탈린이 혁명가로서 활동했던 것은 1900년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스탈린은 직업 혁명가가 되었고, 조지아 티플리스 철도 노동자 파업 준비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다. 1900년 5월 1일 스탈린은 티플리스 위쪽의 산속에서 500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불법 집회에 나가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세달 동안 티플리스의 여러 공장과 철도 회사에서 파업이 발발한 파업에서 스탈린은 주요한 선동 인사들 중 한명이었다. 당시 티플리스에서 2,000명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이 폭력적으로 개입하여 진압됐다. 6개월 후인 11월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최초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바툼으로 파견되었고, 1902년 2월 그 도시의 주요 공장들에서 11개의 비밀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다음해인 1902년 2월 29일에 정유 공장의 6,000명의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행진했다. 물론 이것도 군대가 발포하여 15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한달 뒤에 스탈린 본인도 체포되어 4월까지 투옥된 후에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 3년을 선고 받았다. 물론 탈출하여 1904년 2월에 티플리스로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사회주의 혁명가로써 시작한 첫 번째 유형생활이었다.[3]
또한 그는 러시아판 <이스크라>의 재발행과 함께 1901년 지하 인쇄소 니나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조지아어 신문 <브르드졸라>의 창간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1901년 가을 그는 티플리스 사회민주당 지방위원회에 가입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카프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었다.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었다. 혁명가로써 활동했던 스탈린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경찰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3년 스탈린은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당시 스탈린이 왜 볼셰비키를 지지했는지를 루도 마르텐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 시베리아에서 머무는 동안 스딸린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의 조직적 임무에 대해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 Comrade on our Organizational Tasks)>라는 문건을 요청하고, 자신이 레닌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1903년 8월회의 이후에 사회민주노동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되었다. 그루지아 대의원들은 후자에 속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를 읽었던 스딸린은 주저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하였다. 그레이는 ‘그것은 신념과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트란스코카시아(Transcaucasia)에서 − 캅카스 지방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지역(역자) −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라고 썼다.15) 1905년, 그루지아 멘셰비키의 지도자인 조르다니아는 스딸린이 지지한 볼셰비키의 테제에 대해 비판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루지아 혁명 운동에서 스딸린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같은 해에 <무장 봉기와 우리의 전술들>에서 스딸린은 멘셰비키에 반대하며 짜리즘을 타도하기 위한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지지했다. | “ |
- Another View of Stalin p.16 |
1907년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스탈린의 강도 행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 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탈취했었다.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스탈린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3년 스탈린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되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6번째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고, 북극해 근처인 투르한스크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운 좋게도 왼쪽 팔이 불구였던 바람에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다. 2월 혁명 이후인 1917년 3월 25일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왔고, 거기서 프라우다 편집진을 다시 한 번 맡게 되었다.
2월 혁명으로 들어섰던 임시 정부는 결국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끈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적군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아래 구 황제를 복원하고자 하는 백군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적백내전이었다. 적백내전 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더불어 레닌이 선출한 볼셰비키당 정치국의 위원이 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차리첸(현 볼고그라드)에서 적군을 지휘했었다. 그리고 1922년 스탈린은 코민테른에서 민족문제를 담당한 부서에서 근무했다.
내전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자주 경쟁 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경쟁은 격해졌다. 당시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지만, 트로츠키는 수도 바르샤바를 공격하려 했었다. 둘 다 서로를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폴란드 전쟁은 1921년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1921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지만, 혁명 러시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제국주의 국가가 일으킨 내전으로 인한 경제난은 러시아인 수백만을 기아와 굶주림에 빠뜨렸고, 결국 레닌은 기존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NEP(신경제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의 악화되어가던 레닌은 1924년 사망했다. 레닌 사망으로 인하여 소련은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권력을 획득하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소련은 당내 투쟁에 휩싸였다. 레닌 사후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은 트로츠키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 공산당에서의 스탈린의 인기는 그리 높지 못했다. 트로츠키와 그 외의 당내 투쟁이 치열할 때 트로츠키 반대세력은 스탈린하고 협력하고자 했지만, 나중에는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스탈린에 맞서야할 처지가 되었다. 즉 레닌 사후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28년 당내투쟁의 혼란속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사람은 결국 스탈린이 되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했다. 1934년 12월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을 시작으로 오르조니키제,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투하쳅스키등 많은 인물들이 스탈린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은 1936~1938년 '대숙청'의 서막이었다. 숙청을 직접 관장한 기관은 1918년에 만들어진 체카의 후신인 국가보위부(OGPU)가 1934년 7월에 확대 개편된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1936년 8월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 등 16인이 당시 해외에 망명해 있던 트로츠키와 연계하여 비밀 테러집단을 조직, 키로프를 암살하고 다른 지도자들의 암살을 예비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공개재판에 회부됐다. 이른바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합동본부사건'에 대한 제1차 모스크바 재판이었다. 피고들은 재판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인정한 후 총살당했다.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일각에서는 트로츠키가 미제 간첩이라 주장하지만, 박헌영과 마친가지로 확실한 증거는 없다.
공업화와 대숙청
1928년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기존에 펼쳤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경제개발은 국가주도의 경제 개발이었다. 즉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식 경제개발이라 불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그 나름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였다. 1931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 |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 “ |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
“ | 기근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뱟까(現 키로프 일대 - 주) 북부에서도 마주쳤던 여름의 반(半)건조성 기후대는 1932년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남부 지역 전역에 걸쳐 흉작을 야기했다. 둘째, 집산화를 둘러싼 투쟁은 작황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집산화는 관료적 규범에 바탕을 둔 질서정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집산화는 당의 지원으로 빈농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빈농들은 "쿨락"의 토지를 몰수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집단농장에 기초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는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당은 1930년 무렵부터 일찍이 실수를 밝혀내고 과오를 정정하기 위해 당원들을 파견했다. (...) 1933년의 강우량은 시의적절했다. 당은 꼴호즈의 운영을 돕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바탕으로 선별된 당원들을 농촌에 파견했다. 당원들은 성공했다. 1933년의 풍작 이후 농촌의 상황은 경이로운 속도로 급격하게 개선됐다. | “ |
Tottle, Douglas. Fraud, Famine, and Fascism. Toronto: Progress Books, 1987, p. 102 |
스탈린의 공업화는 급속도의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처럼 대기근이 발생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략 300만이 아사하는 사태가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시기 있었다. 그것이 바로 홀로도모르(Holodomor)다. 이 기근은 카자흐스탄과 남부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고, 특히나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심각하게 일어났다. 일각에서는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 발생한 홀로도모르(Holodomor)를 마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학살인 것 처럼 주장하지만 사실상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같이 정책적인 실책이었다. 물론 홀로도모르 그 자체는 비극이나, 조직적인 학살인냥 얘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학살이라는 식의 주장은 반공주의자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홀로도모르가 조직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기근이 일어날 당시 우크라이나측의 기후를 보면 생산력에 영향이 생길 정도로 좋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번째는 부농과 소작농의 계급투쟁이었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소련 정부가 기근 도중에도 곡물징발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스탈린의 지도부는 기근에 대응하고 곡물 수출을 줄이고 모자라는 곡물을 수입해서 기근 지역에 보내는 등 기근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소한 소련 공산당은 기근을 의식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의도적으로 학살하려고 벌이지는 않았다. 홀로도모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역사학자이자 농업 학자인 마크 타우거(Mark Tauger)는 "소련 정부는 소량의 곡물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을 끊임없이 배포했으며, 소련 전역이 식량 부족에 실질적으로 직면했고, 곡물 수매량과 배분량에 대한 정보가 의심의 여지 없이 정확했다는 사실에 미루어볼 때, 당대의 소련이 명실상부하게도 극심한 식량 부족에 부딪혔기 때문에, 기근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1931년과 1932년의 흉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4] 그 외에도 타우거 교수는 2017년에 출간된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의 저서 『붉은 기근: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전쟁 1921~1933(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1921~1933)』에 대한 반박 서평을 실은 적이 있다. 타우거 교수는 애플바움은 1930년대 초반의 식량부족 사태가 "이전보다 많은 곡물을 생산하려는 농민들의 동기를 총체적으로 무너뜨린" 식량 부족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정부의 곡물 수매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하지만 이후에는 1930년의 수확량이 1929년의 숫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도 말했지만, 애플바움의 말대로, 농민들의 동기가 "완전히 일소"됐다면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애플바움은 또한 1929~1930년 당시 소련의 기근 구제책에 대해서도 논하지만, 흉년과 기근에 대한 구제가 농민들에게 동기를 마련해준 경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단지 1928~29년 곡물 위기 도중에 소련 지도부의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위험요소로 지목했고,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계열 조직들에 대한 약식재판을 열며, 농민들의 저항이 민족주의와 연계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의도적으로 강조했음을 지적했다.[5]
타우거 교수에 따르면 애플바움은 곡물 수매계획의 축소에 대한 1932년 7월 스탈린과 카가노비치의 대화를 인용하지 않을 뿐더러, 스탈린과 카가노비치가 실제로 곡물의 수매 비중을 축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았다. 애플바움은 또한 1933년 겨울에 스탈린이 곡물 수매량을 축소할 것을 거부했다고 주장하지만, 애플바움이 인용한 자료들에서는, 스탈린 정권이 우크라이나에서 곡물 수매량의 목표치를 4배로 줄였고, 1932년 5월에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130만 톤이 감소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수매량에서 10% 이상의 비중을 점했던 65만 6천톤으로, 1932년 10월에는 115만 톤이 추가적으로, 그리고 1933년 1월에는 45만 9천 톤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애플바움의 염원과 희망사항과는 달리 1932년 5월 이후 일련의 조치들에서 스탈린은 굶주리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요구에 응답하여 곡물의 수매량을 감축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식량을 지원하면서, 애플바움이 언급하지 않는 기타 지역들의 요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1933년 2월 5일, 소비에트 정권은 지역 관리들에게 곡물의 수매를 멈출 것을 요구했고, 종자의 배양과 식량구호의 공급을 개시할 것을 주문했다. 따라서 이러한 근거를 보았을 때, 스탈린이 일부로 기근을 일으켜 우크라이나인들을 굶겨 죽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6]
우크라이나에서 기근 사망자의 수치는 출처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 6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정보의 1차 출처가 바로 1930년대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연설이었다. 당시 나치는 반볼셰비즘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던 집단이었고, 나치독일 측의 반소련 반공주의적인 입장들이 서방에게도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여졌다. 1934년 선전장관 괴벨스는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 선전을 시작했는데, 여기서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극렬 반공주의자였고, 그는 독일로 가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그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우크라이나 대기근 학살이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계급투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빈농과 부농의 관계, 그리고 소련의 농업 진단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1929년 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부를 독점하고 인구의 10%에 불과했던 농촌의 부농 쿨라크와의 마찰을 촉발했다. 부농들은 가축을 도살하고 식량을 불태우면서 소련의 농업집단화에 저항했다. 소련의 집단화는 빈농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부농과의 마찰이 생기며 이것이 기근으로 이어진 것이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와 그외의 몇몇 지역에서 일어났던 기근이 특수했던 것도 아니었다. 자연재해에 의한 타격도 분명히 힜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 교수인 마크 B. 타우거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기근이 소련 정부의 인위적인 정책으로 인한 것이 아닌 악조건에 놓여했던 환경상황에 의한 것 즉,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잘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소련의 제1차 공식자료에 따르면 1928년에서 1929년 당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 소련에서 있었다. 당시 기근이 번진 우크라이나의 경우 소련 정부로 부터 다른 지역들 보다 원조를 받았다. <Blood Lies(피의 거짓말)>을 집필한 몽클레어 주립 대햑교 교수인 그루버 퍼 또한 “홀로도모르 음모론 그러니까 소련 정부가 우크라이나 빈농 계급들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의 악의적인 거짓말이 명백하게 틀렸다”는 것을 입증된다고 한다.[7] 서방에 알려진 홀로도모르의 자료들은 조작된 것들도 상당히 많다. 캐나다 역사학자인 더글라스 토틀은 『사기, 기근 그리고 파시즘: 우크라이나 학살 신화 히틀러에서 하버드까지(Fraud, Famine, and Fascism: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라는 책에서 1987년에 나온 영화 <절망의 추수>에서 사용된 사진들이 1921년에서 1922년 볼가 기근(Volga Famine) 당시의 사진이라는 사실과 사진이 1932년에서 1933년 기근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8] 더글라스 토틀에 따르면 억만장자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1934년 여름에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독일이 허스트 소유의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ternational News Service)사의 국제 뉴스를 구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으며, 당시 나치 출판물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기근에 대한 다른 비슷한 기사가 허스트사에 의도적으로 실렸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기근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분명 적지 않았으나,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를 놓고 학계의 의견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 최소 100만 명에서 많게는 1,500만 명 그리고 심각하게는 2,000만 명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보통의 경우 300만 정도로 보고 있다. 300만이라는 수치는 2021년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베스트 셀러인 티모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Blood Land)』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수치다. 그러나 300만 또한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티모시 스나이더의 책을 체계적으로 반박한 그로버 퍼(Grover Furr)는 『Blood Lies(피의 거짓말)』에서 반박했다. 반면 러시아 우익 학자인 올레크 흘레브뉵이나 미국 후버 연구소의 로버트 서비스 등은 500~700만 명이 기근으로 죽었다고 주장한다. 벨기에 노동당 당수이자 역사학자인 루도 마르텐스가 쓴 『스딸린 바로 보기(Another View of Stalin)』를 보면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 700만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출처가 니콜라스 프리초드코(Nicolas Prychodko)라는 인물로 키예프에서 나치가 통제한 '문화 교육 장관'을 위해 일했던 나치 협력자였다. 1933년 미국인 기자 프레드릭 비첼(Frederick Birchall)은 400만 명 이상 죽었다고 했는데, 그는 그 당시 베를린에 있었고 히틀러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최초의 미국인 기자이기도 했다. 반면 모스크바에 있던 '뉴욕 해럴드 트리뷴'지 미국인 기자인 랄프 바네즈(Ralph Barnes)와 '뉴욕 타임스'의 기자 월터 듀런티(Walter Duranty)는 가장 낮은 수치를 주장했다. 랄프 바네즈는 100만 명이 기근으로 죽었다고 했고, 듀런티는 2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즉 이러한 수치를 보았을 때, 3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수치도 과장일 가능성 있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지 않음을 알 수 있다.[9]
애초에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적백내전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상황이었던 것과 소련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농업생산량을 풍족하게 늘리기에는 굉장히 까다로운 국가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쉽게 말해 농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미국이나 중국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척박하다는 얘기다. 현재 러시아만 보더라도 시중에 돌아다니는 농산품들 대부분이 수입산이라는 사실에서 러시아의 농업조건이 정말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스탈린이 기근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인들을 혼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는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증거는 없다.
대숙청
그러나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일정 부분 일부 계급이나 혹은 민중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들을 강화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가장 극심하였던 '대숙청'으로 대표되는 공포정치를 시행한 스탈린의 비밀 경찰인 NKVD(엔카베데는 레닌 시기 창설했던 체카와 오게페우를 계승한 조직이다. 이후 엔카베데는 1950년대 소련의 KGB가 된다.) 또한 적백내전기부터 체계화된 정치범 수용소는 스탈린 시기에 와서 굴라그(Gulag)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굴라그와 감옥, 그 외의 수용소 수감자 수치의 경우 연구자마다 제시하는 숫자가 다른데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1940년대 당시 수용소와 감옥에 185만 258명이 같혀 있었다고 한다.[10] 박노자 교수가 이정도로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NKVD가 체포 및 총살 대상자를 정확히 파악해서 기록해 두었고, 그러한 기록이 문서 보관소에 그대로 보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번역한 스웨덴 공산당원 마리오 소사가 집필한 '진실이 밝혀지다'에 따르면 굴라그를 포함한 감옥 시설의 최대 수감자 수를 대략 250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즉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 니얼 퍼거슨 그리고 <붉은 기근:Red Famine>의 저자 애플봄과 같은 반공주의적 인물들이 제시하는 굴라그 수감자 수치는 과장되었다는 설이 있다.
1937~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3백만 명이 아닌 16만 명이고, 1950년에는 1200만 명이 아닌, 57만 8천 명의 정치범이 노동수용소에 있었다.[11] 스탈린 대숙청에 대해서 수정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역사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대숙청 희생자수를 68만명으로 보고 있다. 그가 러시아 혁명에서 참고한 NKVD 문서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굴라그의 수감사 수는 1937년 1월 1일 80만 명에서 1939년에는 130만 명으로 50만명이나 증가했다. 굴라그 죄수의 40%는 ‘반혁명’ 범죄로 기소됐고, 22%는 ‘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분자’로 분류됐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다고 한다.[12] 또한 대숙청의 정리하자면 로버트 콘퀘스트같은 학자와 미국의 허스트 언론사 나치 독일 그리고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짬뽕되어 그 수치가 매우 과장되었다는 얘기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냉전 시기 '이오시프 스탈린 개인'에 대한 비판점으로 많이 사용되는 소재였다. 앞서 언급한 로버트 콘퀘스트와 같은 인물들은 대숙청 시기의 피해자들의 수치를 매우 과장하기도 했으며, 개인 독재의 강화나 인민에 대한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했었다. 심지어 허위정보들이 비판없이 개재되는 영어 위키피디아에는 굴라그의 수감자 수치를 솔제니친급으로 과장하거나, 스탈린의 정치투쟁인 대숙청을 인종청소로 표기하지만, 이것은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급의 극우성을 잘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베트남 전쟁과 그 과정속에서 일어난 68혁명을 경험한 새로운 세대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과 소련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1970년대에는 이른바 수정주의 학파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앞에서 인용한 쉴라 피츠패트릭이다. 피츠패트릭은 스탈린 체제 성립에 적극적 대리인이었던 거대 인구집단에 주목했다. 그녀에 따르면, 스탈린 시기 등용정책을 통해 노동자·농민 출신의 많은 청년들이 교육과 사회적 승진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고, 스탈린 정권이 ‘노동자에게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대로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집단에게 권력을 부여한 것은 아니지만, 개별 노동자가 행정적·전문적 엘리트로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피츠 패트릭은 이른바 스탈린의 집권기를 러시아 혁명의 연장선상으로 연결해서 보았는데, 이 과정에서 "위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더불어 이런 일련의 과정과 정책들이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대략 2년간 이오시프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은 이러한 것과 연결된 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시각은 이러했다. 대숙청이 무고한 희생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혁명의 과정이었다. 예를 들면 스탈린 혁명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은 지역 관리의 '권력 남용'을 고발하도록 권고 받았고, 그렇게 고발당한 관리는 조사를 받고 종종 해임됐다. 대숙청 시기 군부나 고위 관료, 정치 지도자 등과 같이 소련 사회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계급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대중에게 지목받아 처벌당한 부분이 있엇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참여가 없었다면 대숙청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리즘과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쉴라 피츠 패트릭의 주장이다.
고려인 강제 이주
1930년대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스탈린이 단행한 공업화는 그 시기상 필요했던 조치였다. 스탈린이 공업화를 단행하던 시기인 1931년 극동에선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1933년 나치 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공산당을 누르고 정권을 잡게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스탈린의 소련은 극동과 유럽에서 압박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업화를 단행하며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대표적인 예가 연해주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이 그러했다. 스탈린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 이에 따라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고,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러한 조치들이 인종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소련당국에서 민족의 가치를 고양했던 배경에서 벌이진 일이었다.
스탈린이 집권하던 1920년대 중후반 소련은 소수민족의 언어, 문화 등을 강력히 보호해주었으며, 고려인들 또한 한국 신문을 자유롭게 낼 수 있었고, 고려인 학교들의 경우 소련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었다. 따라서 소련 시절 고려인들은 소수 민족들이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고, 자기들만의 테두리를 지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1930년대 극동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부상하면서 부터였다. 이 당시 소련이 고려인을 강제이주했던 겅은 만일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이들이 어떤 편에 설지 장담할 수 없었던 데에 이유가 있다. 폴란드나 독일인들 또한 강제 이주를 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것이 강제이주의 맥락이었다.[13]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 미국이 전쟁 국가인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은 탄압하지 않았던 반면에 일본인들만 강제로 이주시켰던 행정명령 제9066호하고는 매우 다른 맥락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스탈린의 경우 비단 고려인 뿐만 아니라 체첸인이나 독일인, 아르메니아인들도 강제이주당했다. 이말은 인종 구분 없이 국가 안보에 위협의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주시켰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스탈린 시기의 강제이주는 인종주의적 차별이 아닌 정치적 탄압 및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맥락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고려인의 강제이주가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민족가치를 보호하는 입장으로 소련의 노선이 바뀌었다는 점과, 그 덕분에 현재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들의 대다수가 한국말을 일반적으로 미국 교포들 보다 잘하고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사는 고려인 김 블라디미르(한국명 김용택씨)의 경우 고려인 강제이주가 과하게 덧칠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일부 작가나 화가, 기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이나 글에서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려고 역사적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한 그는 한국에서 공산당 싫어하니까 소련 공산당의 악행을 비난하기 위해 그런 작가들의 말과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부각시킨 것도 고려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부풀려지게 된 한 원인일 것이라고도 했다.[14] 또한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과거 소련 연방시대를 그리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민족주의적 흐름이 강화되면서 고려인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다.
김 블라디미르(김용택씨)의 말에 따르면, 스탈린 정부 시절의 고려인 강제 이주는 분명, 스탈린 정부의 강압에 의한 부당한 소수민족차별 정책임은 확실하지만, 수만 명의 사망자가 생긴 것은 과장이라고 주장했다. 즉 수 만명이 병으로 죽거나 피살됐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하며, 20만명 가까운 사람들을 집단이주시키면서 당시의 철도 수준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했겠으나, 한 소련 학자가 집계한 사망자는 열차 사고등을 포함해 524명으로 나와있다며, 사망자 숫자가 과하게 덧칠 됐음을 주장했다. 물론, 이후에 정착을 하면서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물 설고 낯선 새 정착지에 도착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소련의 붉은군대를 적극 도와 극동지역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는데 누구보다 앞장섰고, 항일전에 몸을 바쳤던 고려인들로서는 당시 소련 정부가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적잖이 서운했을 것"이라며 "고려인은 일본이라면 이를 갈았고,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적군을 도와줬는데 일본의 첩자로 몰아가니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라고 했다.
공업화의 성과
1931년 당시 스탈린이 했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양질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유급휴가와 주거 의료 그리고 교육이 보장되었다. 특히나 스탈린 시기를 거치면서 90%가 넘던 문맹률은 1% 줄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 인민들의 수명 또한 늘어났다. 1933년에 발표된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4년 3개월 동안에 공업부문은 5년 목표의 93.7%를 달성했다. 중공업 부문은 목표를 초과달성해 목표치의 103.4%에 이르렀고, 경공업 부문은 목표의 84.9%에 달했으며, 산업 성장률이 연평균 20%를 기록했다. 이를 낮게 잡은 서방측의 통계로도 연평균 최소 10% 이상의 성장을 했던 것이다. 총공업자본량은 1928년의 348억 루블에서 1933년에는 757억 루블, 1937년에는 1190억 루블, 그리고 1940년에는 1700억 루블로 증가했다. 1928년에서 1937년 사이에 공업생산 총액에서의 중공업 부문의 비율은 31%에서 63%로 증가했고, 중공업에서의 노동자 1인당 생산고는 1928년에 경공업의 그것의 94%에서 1933년에는 140%로 증가했다.[15] 1928년에서 1956년까지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연평균 12.7%나 성장했다.[16]
홀로도모르가 끝난지 1년 뒤인 1934년 부터는 정부가 집단농장으로부터 사들인 농산물에 다시 이익을 붙여 시장에서 팔기도 했었다. 가축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소련 정부가 농업 집단화 정책을 조금 느슨하게 바꾼것이다. 이제까지 소규모 형태로 운영된 농업 생산방식 대신 1천 에이커 단위의 농업이 시작됨으로써 집단화된 토지에는 트랙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과정에서 전국에 수백 개의 트랙터 공급처가 생겼고 정부는 트랙터 본부를 설치하여 영농기계를 집단농장에게 빌려주고 생산물의 20퍼센트를 사용료로 받았다. 이러한 농업의 집단화와 기계화를 통해 농업 생산물에 대한 정부 통제가 가능해졌고, 생산은 증대되었으며, 또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공장 노동자로 전환됐다.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인구는 약 2천만 명에 이르렀다.[17] 이런 공업화에 힘입어 1928년에 300만 톤이었던 소련의 강철 생산량은 10년 만에 1,500만 톤으로 증가했다.
소련 정부의 노력으로 1937년에 와서 소규모 농민 경제에서 사회주의 대형 농업 체제로 전환하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 스탈린은 전국 경작지의 98%가 사회주의 소유제로 전환되었고 집단 농장이 소유한 토지가 전체 경작 면적의 99.1%라는 통계를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소련은 산업 개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농업 집단화로 농업 기계화가 빠르게 향상되었다. 도시 주민들에 대한 식량 공급과 공업 원자재 공급도 확보되었으며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전체적으로 개선되었다. 집단 농업은 또한 공업이 발전하는 데 상당한 자본과 노동력을 제공해 주어 소련의 국방력과 종합 국력을 크게 강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소련은 국가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통해 사회주의 제도의 기반을 다졌다.[18] 어쨌든 스탈린 시기 소련은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보더라도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특히나 대학 입학률이 증가하여 1930년대 후반에는 100만 명이 대학에 입학하는 고등교육의 대량화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었다.[19]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은 복지 부분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볼쇼이 극장이 1루블이었고, 여성들에게도 월경휴가를 제공했으며, 무상교육을 실행했다. 또한 소련은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 잡았고, 무상의료 제도를 실시했다. 굴라그 같은 곳이 예외이기는 했지만, 1930년대 후반까지 스탈린은 8시간 노동제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대조국전쟁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3년 나치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뒤 유럽정복의 야욕을 드러냈으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1936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던 1936년 스페인에선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스탈린은 전차부대를 포함한 일부 부대를 보내어 반프랑코 세력을 도왔다. 그리고 1938년에는 조선과 만주 소련 근처인 하산 호에서 일본군과 교전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소만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전투를 벌였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와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이오시프 스탈린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알려진 독-소 불가침 조약은 서방 학계에서 스탈린에 대해 비판할 때 많이 사용되는 소재 중 하나다. 더 나아가 서방의 반공학계에선 독-소 불가침 조약을 히틀러와 스탈린 간의 동맹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불가침 조약이었지 양국간의 군사동맹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Blood Lies>의 저자 그로버 퍼는 자신의 책에서 소련과 나치는 절대 동맹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당시, 소련은 중립을 선언했었고, 당시 국제연맹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한 그로버 퍼는 독-소 불가침 조약에서 "나치독일과 소련의 군사동맹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이를 확실히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 또한 내놓지 않았다"고 비판했다.[20] 심지어 스탈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역사학자인 올레그 흘레브뉵 또한 “스탈린이 히틀러를 잠재적 동맹으로서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다”고 하며 정말로 “그가 독일 지도자를 신뢰했다면 강력한 반 나치 선전 캠페인이나 독일계 소련인 탄압이 소련에서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본인의 저서에서 주장하기도 했다.[21]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스탈린은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대략 수천명의 폴란드 장교를 처형하는 카틴 대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이 때문에 폴란드의 경우 반소련 감정이 생기기도 했지만, 동부 폴란드의 소수 우크라이나계와 벨라루스계 주민들이 소련군을 환영했고, 1939년 10월 하순 소련군 점령지 일대에서 군중집회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의 합병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폴란드에 있는 일부 주민들은 독일의 지배보다는 소련으로의 편입을 선호했었다.[22] 아무튼 이 기세를 몰아 소련은 1940년 핀란드 침공과 동시에 발트 3국을 합병하였다. 겨울전쟁은 소련군이 핀란드군에 10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사실 핀란드의 경우 일각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과는 달리 전쟁 이전에 소련은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소련은 처음에는 핀란드에게 상호원조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그에 대한 핀란드의 거부 이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선을 이동하여 두배 정도 규모의 영토를 교환하여 해군기지 설치를 위한 땅을 임대해달라는 역제안을 했는데, 이것을 거절한 것은 바로 핀란드였다.[23] 소련사 연구학자인 스티븐 코트킨은 <스탈린, 히틀러를 기다리다>에서 소련-핀란드 전쟁에 대해 도덕적으로는 옳았지만, 지정학적으로는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즉 그는 핀란드인들이 스탈린의 의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보았다.[24]
사실 히틀러와의 불가침 조약 협정은 매우 불안정한 협정이었다. 애초에 히틀러는 1925년 자신이 쓴 자서전에서 레벤스라움을 얘기하며 러시아 지역으로의 영토확장을 주장했고, 반 볼셰비즘적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적 성향이 강한 국가였고, 러시아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판단하였으며, 소련의 유전지대와 보급물자에 야욕이 있었다. 결국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바르바로사 작전에 개시하면서,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반 소련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독일군에게 밀렸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은 주력 항공기 1200대 이상을 대부분 지상에서 잃었고, 독일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였으며, 수십만의 소련군이 나치독일군에게 항복했다. 1941년 9월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고, 1941년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었다. 모스크바를 사수하기로 결정한 스탈린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크렘린 궁에서 집무를 보았다. 1941년 11월 7일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처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했다. 1941년 12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오자 모스크바 공방전은 보다 치열해졌고, 1942년 1월 독일군을 모스크바에서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42년 봄부터 독일군은 다시 진격하여 1942년 8월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했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스탈린그라드의 전세는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고 끝났다. 대략 20만 명이나 되던 파울루스 장군 휘하의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했고, 이 때부터 독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은 단결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소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찍어냈고,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총 1523개 공장(이 가운데 군수 공장이 1360개)이 볼가 강 유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전했고, 여기에는 총 150만 대의 철도 차량이 동원되었으다. 중공업 시설 대규모의 이전과 재조직은 인내력과 조직력의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였다.[25]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3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쿠르스크에서 대 반격을 시도했지만, T-34 전차의 물량에 밀려 이마저도 실패했다. 독소전쟁 초반인 1942년만 보더라도 6개월 동안 소련이 생산한 항공기가 15000대, 탱크가 13000대였다.[26] 이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성장은 히틀러에 맞선 반파시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소전쟁 시기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자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했고, 이로부터 4일 뒤인 12월 11일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을 돕겠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그게 결국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1942~1943년에 미국은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소련에도 물자를 지원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 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제공했다. 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소련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경제는 전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에게 스팸이나 시레이션 같은 식량도 제공했는데, 이는 독소전쟁 시기 소련군 참전용사들이 스팸에 대해 추억이 있는 이유가 되었다.
1943년부터 소련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양측 합쳐서 탱크 1만 대와 대포 3만대 그리고 항공기 5~6천대가 투입된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략 7000대 이상의 탱크를 잃은 소련군은 피로스의 승리를 이루었지만, 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고, 그 전투를 기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그리고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전략전술이 효율적으로 독일군을 섬멸했기 때문이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2개월에 걸쳐 소련군이 전개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한 이후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1945년 4월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26일에는 라인강에서 미군과 만났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함에 따라 나치 독일은 5월 8일 무조건 항복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600만 명(이중 1000만명 이상은 소련군인이다.)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은 승리했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 이후 소련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는데, 그게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그해 7월 스탈린은 유럽에 있던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하여 만주로 옮겼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극동에 배치된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만주 전역에서 진공작전을 감행했다. 8월 폭풍 작전에서 총 15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동원되었고, 이는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가 전투에 투입됐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이 있은 직후에도 진격을 계속하여 한반도 이북까지 군대를 진격시키고, 21일부터 23일 사이에는 원산과 함흥 그리고 개성까지 접수했다. 또한 극동의 소련군은 1945년 8월 18일 사할린 섬을 차지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잃었던 사할린 절반을 다시 되찾게 된다.
밀리터리 덕후들을 비롯하여 역덕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인해전술식 전략을 구사하는 것 처럼 묘사한다. 이는 서방에서 만든 영화 <에너미 엣더 게이트>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로 유명한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에서도 마찬가지며, 유명한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실제로 소련군은 그렇지 않았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소련의 군사전략가들은 1930년대부터 전차를 중심으로 한 종심 전술을 연구해왔고, 1932년에는 전차 군단을 만들었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1941년 부터 1942년 까지는 소련군에게 있어서 후퇴가 거듭되는 절망적인 시기였지만,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의 전략전술도 체계적으로 변모하여 독일군의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게오르기 주코프나 바실레프스키 그리고 로코소프스키 등의 지휘관들과 1942년에서 1943년 부터 잘 협력했다는 것과 그 나름의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다. 독소전쟁사의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로가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 50주년 기념일에 미국의 어느 잡지는 표지에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젠하워가 히틀러를 패배시킨 장본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명칭은 사실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그리고 아마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좀 더 일반화하면 1941년에서 1945년 까지 독일에 대항한 소련군과 다민족인 소련 인민들이 전투에서 가장 큰 몫을 해냈다.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에 1931년부터 계속 시달려 온 중국 정도가 소련의 시련과 노력의 정도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자면 중국의 기여는 소련에 비해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군의 거의 절반과 계속 전투를 했었다. | “ |
- 독소전쟁사 p.355 |
전후복구와 냉전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무려 2500만 명의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의 공장, 6만 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전쟁으로 국부의 약 1/3이 날아간 것이다.[27] 대략 9만8천 개의 협동조합과 5천 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나 농업기계 창고가 나치에게 약탈당했으며, 수만 개의 병원, 학교, 예술학교 고등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의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조 6천억 루블이나 됐다.[2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동맹관계가 아니었다. 따라서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부흥을 절대 돕지 않았고, 오히려 지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소련은 서유럽 경제학제들의 예견을 무색케 했고, 소련의 침체를 바라던 자들에게 보기좋게 한방 먹였다. 제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경제개발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서방측의 경제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더라도, 국가가 계획적으로 사회의 소비를 억제하는 노력을 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재의 생산도 연률 5.8%의 비율로 확대되었다.[29]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두 차례 5개년 계획기간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노력들이 성과를 좀 더 거두었던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농업성장률이 4%를 넘어섰고, 농업분야에서도 자립기반이 확보됐다. 그 시기에도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 성장을 유지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화학' 공업이 중점으로 육성되어, 합성물질, 석유화학제품, 화학비료 생산 기업이 대규모로 건설됐다. 이런 전후복구와 경제 성장을 통해 1950, 60년대 소련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사라졌다.1960년대 기준으로 소련의 1년 1인당 육류 소비량은 최소 40kg이었으며, 소련말기에는 일반 서방국가들하고 비슷한 수준의 소비량을 보였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초등과정과 중등과정의 무상 의무교육도 실시됐고,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수도 증가하여 청년층의 약 30%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 할 수 있었고,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은 그럭저럭 경제 문제로 크게 고통받지 않았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 전후복구는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통치 시절까지 자본주의 보다 괜찮은 생활을 인민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기본적인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유학했고, 기본적으로 친서방적 성향이 드러나는 학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또한 1947년에 배급제가 폐지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소련에서 밥을 굶은 사람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란코프 교수에 따르면 레닌그라드 뿐만 아니라 멀고 먼 시골에서도 밥, 빵, 쌀, 감자 그리고 말린 국수는 소련 전국 어디든지 값싸게 살 수 있었고, 1970년대 레닌그라드에는 우유도 있었고 유제품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1970년대 후반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우유나 유제품의 경우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육류의 경우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와 같은 대도시이면 돼지고기는 보통 상점에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밥을 굶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이다.[30] 자유주의 성향의 학자인 안드레이 란코프야 당연히 소련과 사회주의권을 부정적인 입장에서 말하지만, 그런 란코프 또한 최소 스탈린 시절 소련 인민들이 평균적으로 최소 1주일에 한번정도는 육류를 섭취했다고 주장했다.[31]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소련이 1947년에 배급제를 폐지한 것은 전후 일본보다 2년 먼저 빠른 것이라고 한다. 일단 소련 말기(1970년대를 기준으로 한 것 같다.) 기준으로 평균 저숙련 노동자 임금(약 200루블)으로는 쇠고기 (1kg당 약 2루블)의 거의 100kg을 살 수 있었다. 빵과 우유 등 기본 식량품의 가격들은 생산비용 수준 이하이었으며 좀처럼 인상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기본 식량품 가격 안정 정책이 계획적으로 실시된 셈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전성기 소련은 우유나고기 과일 소비량에서 서구 국가에 뒤지지 않았었다고 한다. 오히려 빵이나 우유, 감자 등 채소 소비는 서구 수준을 상회했을 정도였다. [32]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 맞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했다. 소련에 대한 서방의 정책은 1946년에 더욱 분명해졌다. 1946년 3월 5일 미주리 주 풀턴에 았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윈스턴 처칠이한 연설은 소련을 회유하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과 공산당 지도부가 유럽의 중심에 '철의 장막'을 쳤다고 말한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윈스턴 처칠이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를 사용해가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단결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부터 윈스턴 처칠이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치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소련군이 자력으로 함락시켰고, 동유럽 인민들은 자국 내에서 반히틀러 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뭉쳐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고, 6월에는 마셜 국무장관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이렇게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세계가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스탈린과 소련도 이에 대응했다. 1947년 10월 '몰로토프 플랜'이라는 이름의 동유럽 경제부흥계획이 수립됐고, 10월에는 9개국 공산당 대표가 모여 정보와 경험의 상호교환을 목적으로 코민프름을 결성했다. 1948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던 김일성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9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또한 스탈린은 1950년에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이런 미소 냉전의 갈등을 격화시켰던 것은 독일 문제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은 서독지역에 독자정부를 수립하여 서유럽 사회에 편입시켜 반공과 반소의 보루로 삼으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겨갔고, 당연히 소련은 이에 반발하여 1948년 6월 동독지역 내에 있던 서베를린의 육로 출입을 봉쇄했다. 그러자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비행기로 서베를린 시민들의 생필품을 공수하기도 했다. 결국 소련은 1949년 5월에 서베를린 봉쇄를 해제하였으나,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유럽과 서유럽이 미소양국 세력으로 갈라지며 냉전이 심화된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군사비용을 굉장히 많이 투자했다. 그외에도 여러분야에서도 경쟁했다. 스탈린의 부하인 리브렌티 베리야는 이고르 쿠르차토프에게 핵개발 프로젝트의 기술 부문을 이끌도록 했다. 쿠르차토프는 유능한 물리학자들을 모아 팀을 만들었고, 소련 첩보기관은 미국에서 요원들이 빼낸 기밀 자료를 건네주어 그들은 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이 프로젝트에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1949년 8월 29일 소련은 카자흐스탄에서한 핵실험이 성공하면서, 미국 다음으로 핵폭탄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소련이 만든 핵폭탄은 미국의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간의 핵무기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냉전초기 소련의 정책은 미국에 비하면 소극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동유럽을 강제로 점령하여 소련식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대다수 서방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스탈린은 발칸반도의 게릴라 본거지에서의 경우를 제외하면 친소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거기다 스탈린이 개입했던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나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는 스탈린의 조언을 거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입장은 국제적으로나 각국 내에서나 전후의 정치가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안에서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붉은 군대가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에서 지배하거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군사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권을 그 이상으로 확대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과 폭력을 휘둘렀던 것은 소련이 아니라 바로 미제국이었다. 스탈린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동유럽에 국한해서 할 당시, 미국은 한반도와 중국, 인도차이나 반도, 그리스, 터키 그리고 과테말라와 같은 남미 국가들에 개입했으며, 미국이 지원했던 세력은 반공을 내세우는 기존의 지배세력들이었다. 이러한 점들 또한 소련과 미국이 지원했던 세력의 차이점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개입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과 박헌영의 전쟁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왜냐하면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9년에 소련이 자력으로 수소폭탄을 소유하게 되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면서, 1950년이 되어 김일성의 요청을 끝내 허락했다. 1970년대 초 애덤 울람 같은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도 불렀다.[33]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로버트 서비스도 자신의 책 스탈린 강철권력에서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많은 부분 스탈린에게 있었다. 그가 만일 김일성에게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무장도 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치열한 내전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이는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에 불과하다.[34] 물론 그가 북한에게 무기를 지원한건 사실이지만, 한반도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것은 전적으로 미국과 이승만 탓이었고 실질적으로 스탈린이 지원한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이승만과 달리 분단을 획책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었다. 최소한 이승만처럼 1946년에 전라도 정읍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묻는 반공주의자들의 의견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아무튼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위 서방세계는 공산주의의 공포를 조성시킬 때마다 스탈린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미국은 냉전 초기 스탈린에 대한 공포심을 부각시킴에 따라 자신들의 반공체제를 강화시킬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소련 경제가 전후재건을 통해 빠르게 회복하자, 1950년대 초의 소련은 미국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경쟁하는 초강대국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2년 스탈린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됐다.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거기서 여유롭게 왔다갔다하며 살다가 195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있었고,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 되어 레닌과 더불어 레닌 묘에 전시됐다.
사후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많은 이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모였다. 그를 이어 말렌코프가 서기장을 맡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서기장을 맡았다.
이후 소련의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발언을 한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사회주의 원칙을 위반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하며 스탈린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이후 굴라그에 수감되었던 수감자 90%가 석방되었으며, 레닌과 함께 뭍혔던 스탈린은 결국 화장되어 크렘린 묘역에 안장되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에 따르면 스탈린 사후 소련에는 대략 100만 명 정도가 굴라그에 있었는데, 흐루쇼프 시대에는 1,000명까지 줄었다고 한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사실상 굴라그가 사라졌으며, 정신병원 수준으로 변모했다.
입장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 | 사회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파시즘의 온건파입니다. 그들은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쌍둥이에 가깝습니다. | “ |
- 이오시프 스탈린 |
아나키즘에 대해
“ |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이 같은 원리에 기초하고 있고, 둘 사이의 불일치는 전술에만 관련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진짜 적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 적들에 대항하여 진정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 |
- 이오시프 스탈린, 아나키즘이냐 사회주의냐(1906) |
평가
이 문단에 다중 관점 적용이 필요합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러시아에서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잔혹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최빈국이었던 소련을 초강국으로 성장시키고 나치를 물리친 지도자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최근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러시아에선 대략 70% 정도가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한다.[35] 비록 스탈린 시절 폭압적인 통치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발전하고, 나치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다 스탈린이 재건한 소련 시기 인민대중의 복지가 보장되어, 살기 좋았던 점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된 러시아인들에게는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향수다.
한국의 경우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스탈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박정희 시절 반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세대들은 6.25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장본인으로써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운동권의 경우 노동자 연대를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단체에선 그의 권위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다. 노동자 연대 측은 그를 아예 반혁명분자로 간주한다. 즉 노동자 연대의 논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관료 계급에게 자본가를 대신하는 역할을 맡김으로써 무제한 착취를 하던 국가자본주의자다. 노동자 연대 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회주의 그룹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스탈린주의를 추구하는 집단 혹은 단위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과 노정협(전국노동자정치협회)쪽인데,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에 비해 마이너 하다. 국내에 출간된 서적들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 운동권 단체들에서도 매우 안좋은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연대에서 주장하는 스탈린의 반혁명 혹은 국가 자본주의식 클리프주의 논리는 소련사를 전공한 노경덕 교수가 체계적으로 반박한 적이 있다. 그의 논문인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국가자본주의론 분석」에 따르면 클리프가 이용한 자료들은 대체로 소련 출신 서방 망명자들의 기록과 회고, 그리고 빈약한 사료들에 기초하고 있는 일부 서방 학자들의 2차 연구서들이다. 쉽게 말해 소련 사회경제와 정치 영역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며, 1990년대 중반 이후 문서고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연구서들이 밝혀낸 소련의 사화경제 및 정치 영역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실증연구에도 한계가 있다. 예를들면 1930년대 소련 사회에서 왜 관료층들이 대두하고 노동계급을 착취하게 되었는지, 왜 노동계급의 자본축적에 종속되었는지, 왜 당 내 그리고 국가 영역에서의 민주주의가 쇠퇴하게 되었는지, 왜 소련은 노동자 국가에서 국가 자본주의가 되었는지 같은 질문들에 대한 체계적인 답변이나 증거가 없다. 그러니까 노동자 연대에서 주장하는 국가 자본주의론은 합리적 설득보다는 애초부터 그렇게 믿기를 원하는 사람들끼리의 감정 공유라는 목적이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노경덕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반박했다.[36]
구소련권 나라들의 경우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소수민족 강제 이주와 독재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적잖게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것에 대해서 만큼은 높게 평가한다. 다만 1940년 소련에 편입된 발트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나 193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홀로도모르를 겪었던 우크라이나의 경우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나 우크라이나는 1932~33년에 발생했던 대기근에 대해 스탈린의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학살로 간주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법원에서 이에 대해 책임을 물어 기소한적도 있었다. 다만 2014년 러시아에 편입된 크림 반도나 소련 시절 부터 친소련 성향이 강했던 동우크라이나 도네츠크 같은 곳에선 평가가 다르지만 말이다. 2010년 봄에 우크라이나에서 스탈린 기념 동상이 건립되자, 당해 12월 말에 머리가 잘리더니 급기야는 폭발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즉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스탈린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에 대한 반감으로 반스탈린 및 반소감정이 더 격화되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올레크 흘레브뉵은 그가 소화해낸 기존의 기록들과 의사록 등 문서고 속에 있는 정책 결정 관련 미출간 문건들을 두루 활용하여 스탈린 전기를 출간했다.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러시아 우익학계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올레크 흘레브뉵은 스탈린에 대해 개인 권력을 강화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독재자로 평가하며 사실상 과거 냉전시기 팽배했던 전체주의론적 접근을 했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은 차가운 합리성이 냉혹한 성격과 공존한 독재자이며, 그러한 성격과 독재자적 행위들이 소련 사회에 수많은 과오와 실책 그리고 학살을 불러왔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스탈린 신화 깨기”라는 정치적 목표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합리적인 비판보다는 정치성이 짙은 스탈린 전기들의 서술을 연상시키는 자료의 선택적 이용, 비약과 억측 그리고 역사적 맥락의 생략 등과 같은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에 대해 1990년대 문서고 개방 이후의 대숙청에 대한 아치 게티나 쉴라 피츠 패트릭 등 수장주의 학파들의 자료들을 전혀 참고하지 않고 연구들을 전부다 무시하고 오로지 스탈린의 개인범죄로만 서술하려는 모습들이 자주 포착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스탈린이 전쟁 초기에 대한 군사적 실책이나 오류들을 지적하지만, 당시 민중들이 왜 이오시프 스탈린을 앞도적으로 지지하며 반파시즘 투쟁에서 보여준 그들의 조국 방어 의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하지만 그는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정치적 편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 교수의 경우 소련 통치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비록 독재자이기는 하지만 스탈린을 굉장히 유능한 전시 지도자로 간주하며, 전시 지도자로서의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재건 과정에서 하급 관료들의 악행과 비리에 대해 실랄한 비판을 하며 스탈린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려 하지만, 그러한 계급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려 했던 것이 스탈린이라는 사실은 손쉽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37]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의 저자이자 이란 공산주의자인 바만 아자드는 자신의 책에서 사회주의 모델에 대한 비판을 ‘스탈린주의’와 같은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고 한다. '스탈린주의’와 같은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내에서의 일련의 경위를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다시 당과 노동자계급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해서는 각 단계의 사회주의를 형성하는 내부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는 다시 사회주의 체제의 현실적인 사회적·역사적 모순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해서는 또 다시 세계적 규모에서의 보다 보편적인 모순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원칙들이 변증법적이고 동적인 탐구 방법과 정적이고 추상적인 탐구 방법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 공산주의 운동의 과제로 되어 있는 이러한 과학적인 연구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방법론상의 원칙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스탈린 시기 공업화를 진행하며 범한 실책도 있고, '폭력의 정당화'라는 점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왜곡된 자료를 어떠한 검증없이 받아들이며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내리는 평가가 그렇듯이, 그는 소련이 어렵던 시절 위기를 돌파했고, 인민대중의 복지를 증진시켰으며, 히틀러에 맞서 싸워 반파시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가 분명 있다. 따라서 그런 그의 업적은 재평가가 필요하다.
관련서적
현재 국내에 출간된 스탈린 관련 전기로는 로버트 서비스가 쓴 <스탈린 강철권력>[38]과 2017년에 번역되어 출간된 올레크 흘레브뉴크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책이 있다. 올레크 흘레브뉴크의 책은 신화화된 스탈린의 모습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억측이 들어간 부분들이 꽤나 많다. 대표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스탈린의 실책만 얘기할 뿐 그가 승리에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선 전혀 언급치 않고 있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은 냉전 이후에 나온 책이고 흘레브뉴크의 스탈린은 최근에 발굴한 러시아측 문서들을 참고하여 집필한 것은 그 나름의 의의가 있을지는 몰라도, 둘 다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서술된 책으로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한 책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하고 읽어야할 책이다. 이 책들은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것들이고, 1990년대 국내에서 스탈린 선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다만 구하는 게 매우 힘들다.
국내에는 출판되지 않았지만, 2세대 수정주의 역사학자인 아치 게티(Arch Getty)가 쓴 '대숙청의 기원(The Origin of Great Purges)'이라는 책도 영어실력이 된다면 나름 읽어볼만 하다. 로버트 콘퀘스트등이 과장하고 왜곡한 것들이 어떻게 해서 거짓과 과장이 뒤섞였는지 알 수 있다. 스웨덴 공산주의자 마리오 소사(Mario Sausa)가 쓴 '진실이 밝혀지다'라는 책에도 대숙청 부분에서 게티의 수정주의 연구가 인용되어 있는데, 다소 감정적이긴 해도 읽어볼 가치가 꽤 있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기획연재로 번역했던 벨기에 노동당 당수이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가 쓴 스딸린 바로 보기(Another View of Stalin)이 있다.[39] 원본은 1996년에 출간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전기로, 주로 우익 학계에서 내놓는 주장들을 반박했다. 스탈린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알고 싶은 이라면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한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아주 유용할 것이다. 원본은 Another View of Stalin을 번역본은 스딸린 바로 보기를 보면 된다.
각주
- ↑ I know that after my death a pile of rubbish will be heaped on my grave, but the wind of History will sooner or later sweep it away without mercy.
- ↑ 스딸린 바로 보기 2
- ↑ Another View of Stalin p.15~16
- ↑ Mark Tauger. 「Natural Disaster and Human Actions in the Soviet Famine of 1931-1933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2001, p. 5
- ↑ Mark Tauger,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2018.07.01 글을 참조 링크는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 ↑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 ↑ The Holodomor Hoax: Joseph Stalin’s Crime That Never Took Place
- ↑ 홀로도모르 사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범죄
- ↑ 집산화와 “우끄라이나의 대학살”
- ↑ 러시아 혁명사 강의 p.162
- ↑ 진실이 밝혀지다 p.40
- ↑ 러시아 혁명 1917~1938 p.295를 참조
- ↑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노경덕 교수 강연) 참조.
- ↑ <고려인> ④ "강제이주 과하게 덧칠됐다"
-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109~110
-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118
- ↑ 이야기 러시아사 p.435
- ↑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10 러시아사 p.245~246
- ↑ 러시아 혁명사 강의 p.158
- ↑ Blood Lies The Evidence that Every Accusation Against Joseph Stalin and the Soviet Union in Timothy Snyder's Bloodlands Is False, Red Star Publishers, 2014 p.328
- ↑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p.291~292
- ↑ 독소전쟁사 p.42~43
-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2
- ↑ Just like that Sheila Fitzpatrick
- ↑ 독소전쟁사 p.105~106
- ↑ 스탈린 강철 권력 p.714~715
- ↑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p.412
-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116
-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118
- ↑ [1] 자유 아시아 방송 기사로 안드레이 란코프의 인터뷰를 참고.
- ↑ [2] 안드레이 란코프의 인터뷰인 "흐르쇼프 통치하의 소비생활"을 참조.
- ↑ 정말 못 살았을까? 민중, 계획경제 주체 못돼 뼈아파 기사를 참조
-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08
- ↑ 스탈린 강철권력 p.937~938
- ↑ Anticommunism Fails: 70% of Russians have a positive opinion on Joseph Stalin
- ↑ 노경덕,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 ↑ 노경덕, 「러시아 역사가의 스탈린 신화깨기 기획」
- ↑ 2010년에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이라는 부 제목을 달고 재출간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둘 다 절판된 상태다.
- ↑ <기획번역> 스딸린 바로 보기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