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현실
포스터 스톡웰
포스터 스톡웰 [Foster Stockwell]
티벳 부근의 중국 쳉두(Chengdu)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을 수차례 방문한바 있고, 중국의 종교에 관한 다수의 책을 썼다.
서양의 티베트에 대한 관념은 현실이라기보다 신화에 가깝다. 티베트는 평화로운 불교도로 이루어진 억압된 국가이며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독특한 티베트의 신앙 형태에 따른 1,700명 이상의 ‘현존 부처들’ 중 한 종파 지도자가 아니라 세계 불교의 지도자라는 믿음은 사실 종교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같은 신화는 과거 티베트가 접근 불가능한 지역이었기 때문인데 이 점이 히말라야 중턱에 위치한 이 신비로운 땅에 대한 환상을 부추겼다. 이런 환상은 달라이 라마의 측근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교묘히 조작되어 왔다.
모든 신화가 그렇듯 신화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것이 아직 유지되고 있다면 이 중국 점령 지역에 대한 몇 가지 유용한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적절한 태도가 될 수 있다.
우선 티베트는 몽골이 원(1271-1368)을 건국하기 시작한 1239년 병합된 이후 줄 곳 중국의 영토였다. 이것은 마르코 폴로가 유럽에서 중국에 도착하기 이전부터 그랬고 콜럼부스가 신세계 항해를 시작할 때보다도 2백년 이상 앞섰던 일이다. 중국은 때때로 이 지역을 압박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과 많은 티베트인들은 원 제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초기 티베트인들은 수많은 경쟁적 유목부족으로 진화했고, 본교[1]Bon이라 알려진 종교를 발전시켰다. 이 종교는 많은 동물과 때로는 사람을 신전에 바치는 등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주술사들이 이끌어나갔다. 이 부족들은 더 나은 방목지를 위해 서로 싸웠고, 정복전쟁에서 승리하면 상대를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 그들은 티베트 국경을 훨씬 넘어 중국의 쓰촨, 윈낭 지역, 신장, 간쑤 그리고 칭하이에 이르렀다.
결국 이들 부족 중 하나인 투보족Tubo이 가장 강성해져 모든 티베트 지역을 장악했다.(티베트라는 명칭은 투보에서 왔다.) 중국 당태종은 투보의 국왕 송첸 감포(608~650)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의 수양딸 ‘문선공주’(文宣公主)를 그에게 출가시켰다. 이러한 돈독한 관계 속에서 투보족은 당 왕실과 가까운 우호관계를 발전시켰고 두 지배 세력은 정기적으로 선물을 교환했다. 공주는 수백 명의 하인, 숙련 기술자, 서기의 호위를 받으며 티베트에 도착했다. 다른 당 황제와 같이 그녀는 불교도였으며 불교는 주로 그녀의 영향력에 의해 티베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후 분노한 본교 주술사들에 의해 억압되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 두 지배자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또 다른 당나라 공주가 다른 투보 국왕과 결혼했다.
그러나 서로 결합된 왕실이었고 활발한 거래(티베트의 말과 중앙평원의 차)가 있었다고 해서 티베트인과 중국인 사이에 분쟁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당과 투보군 사이에 전투가 간혹 발생했는데 주로 영역 다툼이었다. 서기 750년 어느 날 투보인들은 당나라의 반란을 틈타 당의 수도 ‘장안’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를 점유할 수는 없었다. 838년 투보 국왕이 2명의 친 본교 내각에 의해 암살되었고 본교는 티베트의 유일 종교로 부활했다. 이에 수많은 불교도들이 탄압을 받았고, 은둔하게 되었다.
비록 두 지배세력의 관계가 한정되어 있었으나 티베트와의 교역은 5대 왕조동안 계속되었고, 당조와(907-960) 당 멸망 후 송조(960-1279)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티베트 지역의 불교는 다시 살아났는데 이는 불교도들이 본교의 관습을 기꺼이 받아들인 결과다. 그런데 이렇게 두 종교가 결합하여 나타난 불교는 그 이전의 티베트 불교 그리고 중국이나 다른 동남아시아의 불교와도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다. 흔히 라마교라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징기스칸의 지휘 아래 러시아의 대부분, 유럽의 일부 그리고 중국 전역을 정복한 몽고인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몽고인들은 티베트인들과 같이 유목부족이며 본교와 유사한 애니미즘을 갖고 있었다. 원나라 초대황제 쿠빌라이 칸이 티베트에 총관을 보낼 때 그는 티베트 불교의 사캬Sakya 종파의 지도자를 중국 모든 불교의 지도자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이로서 그 승려는 이전에 어떤 불교도도 갖지 못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임명에 대해 티베트의 다른 불교 종파 지도자들과 이보다 훨씬 많은 중국의 비(非) 티베트 불교도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의 결정에 어떤 반발도 하지 못했다.
원은 티베트를 여러 관할 구역으로 나누고 총관부가 감독하게 했다. 더 나아가 원 왕실은 통치의 일환으로 티베트에서 봉건제를 장려했다. 원이 멸망하자 명(1368-1644)이 들어섰다. 그러나 명조는 몽골의 유산을 물려받은 제국이 아니었다. 명조가 많은 귀족들에게 세습직위를 허용하고 분립과 통제의 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티베트는 분할되었다.
비록 명 왕실에서 티베트에서 가장 큰 세력의 하나인 린뿌 가문의 지도자에게‘데시’Desi(지도자 라마)라는 명예 직위를 수여한 동시에 그의 가신들에게 충분한 공식 직위를 내림으로써 티베트 지역 내부에서 분할통치를 유도했다. 이들 직위 중 하나는 노란 종파로 더 잘 알려진 새롭게 창설된 갤룩파 종파의 지도자에게 수여되었다. 이 후 그는 ‘달라이 라마’라는 직위를 수여 받는다.
- ↑ 폰교라고도 한다. 티베트의 원시적인 애니미즘으로 우주 간에 무수한 영혼이 존재하여 그 발동에 따라 세상의 길흉화복이 나타난다고 한다. 나무 ·돌 ·조가비 등을 숭배했다. 이후 불교신앙이 전해지면서 그 세력을 빼앗기기도 하고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통속 신앙이 불교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