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신화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청조 시대의 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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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 시대의 티베트 ~ 티베트의 불교

청조 시대의 티베트


그 다음 왕조이자 마지막 왕조인 청은 1644년에 건국되어 191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창립 시기의 가장 눈에 띄는 티베트 종교적, 세속적 지도자들은 제 5대 달라이라마, 제 4대 판첸라마[1] 그리고 구슈리 칸이었다. 그들은 1652년 대표사절로 중국의 수도 북경에 도착했다.


이듬해 그들이 티베트로 돌아갔을 때, 황제는 로장 걉쵸Lozang Gyatso(제 5대 달라이 라마)라는 ‘달라이 라마[2], 서방의 거대한 자비의 부처, 하늘 아래 불교신앙의 지도자, 영성의 소유자’라는 명예직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했다. 제 5대 달라이 라마는 청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고 그 대가로 금과 은을 받아 티베트에 13개의 노란 종파 사원을 거뜬히 세울 수 있었다.


모든 달라이 라마 환생 승계는 중국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왔고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역사적 관례가 되었다. 이후 청 황제는 7대 달라이 라마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어 판첸라마(역시 노란 종파)의 권력을 강화했다.


1713년 청 왕실은 제 5대 판첸 라마에게 ‘판첸 에르데니’Panchen Erdeni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그는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직위로 올라섰다. (판첸은 산스크리스트어로 ‘대학자’, 에르데니‘ 는 만주어로 ‘보물’이라는 뜻이다.)


당시 티베트 인구의 대부분(90% 이상)은 농노였고, 지주와 승려들은 이들을 모질게 대했다. 모든 사원은 많은 농노들을 부릴 뿐만 아니라 넓은 땅을 소유했다. 승려들도 귀족, 지주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착취를 일삼았다. 농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개인적인 자유가 전혀 없었다. 그들과 그들의 자녀는 선물이나 기부형태로 자유롭게 기증, 판매 되거나 물품과 교환되었다. 지주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말하는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1943년에도 ‘세몬 노부 왕걀’Tsemon Norbu Wangyal이라는 이름의 고위 귀족은 100명의 농노를 드리궁 지역의 승려에게 팔았다. 이 때 농노 한 사람의 가격은 4달러에 불과했다. 농노가 일할 능력을 상실하면 지주는 그의 가축, 농기구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압수한다. 만일 농노가 도망쳤다 붙잡히게 되면 그의 소유물의 절반은 잡은 사람에게, 나머지 절반은 농노가 일하고 있던 지주에게 돌아간다. 그런 다음 매질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지주들은 눈알 파내기, 손 발 자르기, 벼랑 끝에서 밀어내기, 익사시키기 그리고 머리 자르기 등 매우 비인간적으로 처벌했다. 이러한 잔혹한 처우에 대항하는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1347년 한 해에만 200건이 넘는 농노 반란이 발생했다.


외세의 침략


외세는 중국으로부터 빼앗기 위해 수 없이 티베트를 침략하였다. 이들은 중국군과 티베트 용병들에 의해 격퇴 되었다. 그 최초는 1337년 델리(현재 인도)의 ‘무하마드 투그룩’Mohammed Tugluk이 10만 명 규모의 군대를 히말라야 지역에 파병한 일이다. 18세기 후반에는 네팔 왕국의 군대가 영토확장을 목적으로 티베트를 2번 침공했다. 19세기 영국과 러시아 두 강대국은 어느 쪽이 티베트를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가를 저울질하기 위해 많은 자금과 스파이를 쏟아 부었다.


영국이 티베트를 1888년 처음 그리고 1903년 다시 침공했을 당시 러시아는 내전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의 라싸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청 정부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티베트인들은 창과 화살, 투석기, 소총으로 맹렬히 저항했으나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영국은‘평화’ 협정을 체결한 뒤 추운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철수했다. 티베트인들의 저항으로 군수물자공급에 지장이 생겨 점령군이 굶어죽는 사태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1906년 중국과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 제2항은 영국은 티베트의 관할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으며 티베트의 종주권은 중국이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조항을 손쉽게 잊어버렸다. 바로 그 다음해에 러시아와 협정을 맺어 티베트에 ‘특별한 관심’이 있음을 명시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티베트를 점령하고 식민지 인도에 병합하기 위해 자세히 설명하려면 책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물론 아직 1914년 인도 심라[3]에서 열린 회담에 대해 언급해야 할 내용이 더 남아있다. 티베트인들 그리고 친영국계 인도인들 그리고 불과 2년 전 청조를 전복한 중국 국민당 정부 대표가 이 회담에 참석하였다. 영국은 중국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새 국민당 정부의 승인을 취소할 것이며 티베트와 단독협상 할 것이라 협박하여 중국의 참석하게 했다.


심라 회담은 실패했다. 중국과 13대 달라이 라마 모두 티베트의 분할(내內 티베트와 외外 티베트)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담은 분쟁의 원인이 된 문서 하나를 양산해냈다. 이 문서는 영국 대표 ‘맥마흔 경’Arthur H.McMahon이 작성한 지도안으로 중국에 전혀 공개하지 않고 티베트 대표단에 비밀리에 전해졌다. 맥마흔의 지도는 영국의 인도 식민지내에서 몽율, 로율, 그리고 자율 등 티베트를 3개의 지역으로 구분한다는 대목을 포함한 새로운 경계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것이 ‘맥마흔 라인’이라 불리는 것으로 회담 및 다른 외교적 문제를 문서화한 후 23년 만에 최초로 공개되었다. 맥마흔 라인은 1962년 인도의 실패한 티베트 점령시도의 근거가 되었다.


영국은 티베트의 원래 영토에서 그들의 인도 통치지역에 이르는 9만 평방킬로미터를 추가한 이 지도안(벨기에 3배 크기이다.) 을 채택함으로써 심라 회담에서 ‘티베트의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그리고 영국이 인도로부터 철수한 직후 미국 전략사무국(OSS - CIA의 전신)은 냉전 전략에 따라 티베트 ‘독립운동’의 선동자로서 영국 외무부와 협력하였다.


OSS가 티베트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정보의 많은 부분은 워싱턴 D.C 부근의 CIA 본부에 비밀문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음모들 중 하나는 널리 공개되었다. 여기에는 1933년 사망한 13대 달라이 라마를 이은 어린 제 14대 달라이 라마를 위해 임명된 섭정에 대한 비방선전도 포함되어 있다.


섭정은 티베트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음모에 적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O.S.S는 그의 무능함과 범법 행위에 대한 악 소문을 퍼트렸다. 결국 섭정은 이런 혐의로 체포되어 티베트의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이후 14대 달라이 라마의 부친이 섭정의 친구라는 이유로 독살되었다.

티베트의 불교

오늘날 티베트를 생각할 때, 하나의 종교로서 티베트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할 것들이 있다. 본교의 수용으로 티베트 불교는 다른 불교와 매우 다른 형태가 되었다. 특히 보다 대중적이고 규모가 큰 중국의 선불교(일본에서는 ‘젠’Zen이라 한다.)와는 특히 달랐다.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볼 수 있는 탱화 다른 불교사원 보다 훨씬 살벌하며 티베트의 종교 의식 중 일부는 인간의 두개골, 피부 그리고 싱싱한 내장을 사용했던 본교의 애니미즘적 요소를 명백히 반영하고 있다.


또한 티베트 불교는 회전 예배기[4]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 다른 대부분의 불교에서 비난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기도가 올려져있는 이 장치는 물이나 바람에 의해 계속 돌아가는데 자연의 힘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극락으로 보내준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의 독특한 점인 생불의 환생은 1294년 까규종파 산하(‘검은 모자’로 알려진)의 카르마 까규 종파에서 시작되었다. 이 후 티베트의 모든 불교 종파와 사원으로 전파되었으나 1419년까지 갤룩파 종파(달라이 라마와 판첸라마가 이끄는 종파)에는 전파되지 않았다. 시작부터 생불의 간택은 악용될 우려가 있었다. 간택위원회 소속의 교활한 승려가 특정한 아이를 간택할 목적으로 아동 후보임을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을 조작해내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 4대 달라이 라마는 몽골인 지도자 아틀란 칸Altan Khan의 증손자였다. 이 아이가 선택되었던 시기는 갤룩파 종파가 아틀란 칸의 추종자들의 보호를 몹시 필요로 했던 때였다. 왜냐하면 이 노란 종파의 급속한 성장을 경계하는 기존 티베트 종파의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장악한 라마교의 우두머리,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서열로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2. 달라이는 몽골어로 ‘대양’, 라마는 티베트어로 ‘지도자’ 라는 뜻이다.
  3. 인도 북부 Punjab주의 도시, 영국 통치 시대 하기(夏期) 인도 정부 소재지
  4. 물레가락에 달려 있는 바퀴로 바퀴 위에 기도나 주문이 적혀있다. 티베트 불교에 의하면 이 바퀴의 회전이 암송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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