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 전쟁의 논리

좌파도서관
좌파도서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4일 (목) 13:49 판 (맑스주의 역사강의(한형식)서 상당부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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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및 전개

근대 이후 세계에서의 전쟁은 자본가 계급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이익 확보를 목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국가간의 전쟁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1870년 보불전쟁을 둘러싸고 "과연 모든 전쟁에 반대해야 하느냐"는 논쟁이 격화되는데, 당시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유도하였으나 선전포고는 프랑스의 전제 군주 나폴레옹 3세가 하였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승리할 경우, 제한적이나마 보장되던 독일 노동운동의 성과가 전부 사라질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한 각 민족이 자결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근대 민족 국가를 통한 근대화와 그 속에서 빚어지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성숙 또한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 경우 노동자 계급은 민족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의식화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엥겔스는, 역사 발전 단계의 수호와 민족 단위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의 '방어 전쟁'을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치게 됩니다.

이후 전쟁의 양상이 제국주의에 따른 식민지 쟁탈전으로 전환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같은 국가주의적 세력은 이 개념을 악용하여 반전 운동을 외면하고, 식민주의적 정책을 옹호하게 되었습니다.

반전 투쟁을 반대하고 식민주의에 찬동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애국주의적 프로파간다를 활용하는 한편, 이 논리를 제국주의 열강인 자신들의 조국(프랑스 또는 독일)을 위해 복무함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내세워 자국이기주의를 정당화한 것입니다.

프랑스 노동당의 창립자 쥘 게드베른슈타인류의 개량주의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으나, "반전 투쟁은 자국에서 지지받지 못하므로, 계급 투쟁을 저해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독일 사민당 주류에선 러시아 제국의 반자유주의적 행보와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맑스가 독일 노동운동의 성과를 프랑스 전제정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만약 "야만적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독일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전쟁 수행을 방해할 경우, "후진적 성격"을 가진 러시아 노동계급은 침묵할 것이기에 독일에만 타격이 있을 것이고, 이는 결국 차르를 돕는 일이라는 겁니다.

"뒤쳐져 있는 러시아"가 "야만적 힘"을 통해서 "선진 서유럽"을 퇴보시키리라는 인종주의적 편견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도 만연하여, 이유 없이 러시아 노동운동을 폄하하였습니다. 볼셰비키를 적대시하고 1917년 혁명을 비난하였죠. 카우츠키는 아예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을 지원합니다.

비판과 그 이후

네덜란드의 페르디난드 니우엔하위스(Ferdinand Nieuwenhuis)는 방어 전쟁과 공격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쇼비니즘적이라 비판하였는데, 본질적으로 동일한 두 개념을 구분하는 것은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기인한 애국주의적 충동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조류에서는 노동자 계급에겐 국적이나 공격의 성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국가와 관련된 모든 이데올로기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슈투트가르트 결의안

📃 이 문단의 본문은 슈투트가르트 결의안입니다.

전쟁에 대한 논쟁은 1907년 극에 달하는데, 이 때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독일 사민당의 베벨, 쥘 게드, 장 조레스와 에두아르 바양이 각각 다른 결의안을 제출합니다. 세 안을 둘러싼 논쟁이 봉합되지 않자 대회 대신 소위원회로 이관되었는데, 그 위원회는 레닌, 룩셈부르크, 마르토프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더욱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찬전, 내지는 소극적 반전 세력과는 다른 입장의 결의안이 작성되었고, 소위원회 이관 전에도 시간이 흘렀던 탓에 슈투트가르트 대회 마지막날에 가서야 제출됩니다. 제대로 검토되지 않고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안은 상당히 급진적이었습니다.

이 안은 노동자 계급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신속한 종결을 위해서만 전쟁에 개입해야 하며, 전쟁이 야기하는 모든 경제적·정치적 불안을 혁명을 위해 활용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는데요. 각국의 자본가 계급에 대항해 내전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분리

통과 이후 뒤늦게 문제 제기가 이어졌습니다. 슈투트가르트 결의안에 찬성하는 진영은 이후 레닌을 위사한 "공산주의" 세력으로, 반대하는 진영은 "사회민주주의"로 갈라서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독일 사민당을 위시한 사회민주주의 진영은 전쟁을 옹호하였는데, 항복 이후 반생한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폭력 진압하며 지배 구조의 공고화에 기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