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자카리아디스
개요
니코스 자카리아디스(그리스어: Νίκος Ζαχαριάδης, 러시아어: Ни́кос Захариа́дис, 1903년 4월 27일 ~ 1973년 8월 1일)는 그리스의 공산주의자이자 그리스 공산당의 서기장이다. 그리스 공산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자카리아디스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타어냈다. 오스만 제국에서 교육을 받던 부친이 사망하자 15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노동자로 살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함께 협상국의 콘스탄틴노플 점령을 목격했다. 선박노동자였던 자카리아디스는 1921년 콘스탄틴노플에서 공산청년단체의 서기가 되었으며, 소아시아 재앙[1] 이후 소아시아를 떠나 1923년 중반 소련에서 극동노동자공산대학에 다니는 한편 소련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5월 그리스에 처음 온 그는 그리스 공산당 간부로 5년을 보낸 뒤 1929년 소련으로 돌아가 레닌대학을 다녔다. 이어 1931년부터 1941년까지 그리스 공산당의 서기를 지냈다. 그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자카리아디스의 지도 아래 탄압에 맞서 지하세포조직을 확대하는 등 조직 개편을 꽤했다. 메탁사스 독재정권이 1936년 8월 4일 계엄령을 선포한 지 1개월이 지난 뒤 자카리아디스를 체포한데 이어 1938년 4월까지 시안토스를 제외한 모든 정치국원이 체포당했다. 아무튼 이 시기를 거치며 그리스 공산당원은 1929년 1,500명에서 1936년에는 15,000명으로 증가했다.
1941년 독일의 점령시기에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하필이면 끌려간 곳이 그 유명한 다하우 수용소였다. 자카리아디스가 석방된 것은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패망할 때 즘이었으며, 석방된 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다시 서기로 활동했다. 자카리아디스는 1945년 5월 30일 영국 공군기를 이용해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했다고 한다.[2] 그 시기 그리스 공산당은 이른바 우익들의 백색테러에 저항하기 위한 대중 자위조직 건설을 호소했는데, 자카리아디스의 입장은 우익들이 테러를 중단하지 않으면 무장투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그리스 정부의 백색테러는 극심했다. 그리스 정부는 1945년 말까지 4만 8,956명의 그리스인민해방군(ELAS) 지지자를 수감했고, 이른바 1차 내전 종식을 부른 바르키자 협정 후 1946년 3월 총선까지 1,289명의 ELAS가 학살당했다.[3] 귀국 이후 자카리아디스는 제2차 그리스 내전에서 게릴라전을 이끌 그리스민주군을 창설했고, 3년간의 내전 기간 동안 그리스 우익 정부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다.
1949년 10월 16일 그리스 내전은 결과적으로 우익의 승리로 끝났으며, 자카리아디스는 결국 게릴라 2~3천 명과 함께 8월 29~30일 야간을 이용해 알바니아 영토로 퇴각했다. 9월에는 민주군대의 마지막 잔여병력 1,000명이 동부 마케도니아를 떠나 불가리아로 넘어갔으며, 이후 소련 선박들이 알바니아 항구로 들어와 민주군대의 잔존 병력을 태워 소련으로 데리고 갔다. 소련에 도착한 자카리아디스는 소련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그리스 내전 당시 영미 제국주의와 더불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노선에 대해 강력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당연히 내전 이후에도 친스탈린 노선을 고수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자카리아디스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노선에 반대했으며, 당연히 소련의 새지도부와 충돌했다.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진행하고 난 이후 자카리아디스는 흐루쇼프 세력에 의해 당에서 추방당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당은 친흐루쇼프 노선을 따르게 됐다.[4]
자카리아디스는 내전 이후 1만 8,000명의 그리스 공산당 성원들과 당시 소련 영토였던 타슈켄트에서 당을 재조직했고, 1950년 10월에 그리스 공산당 제3차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카리아디스는 반스탈린 수정주의 노선에 단호히 반대했으며, 결국 흐루쇼프 하의 소련 공산당은 이 책임을 물어 1957년 2월에 그를 당에서 제명했다. 자카리아디스는 이후 시베리아에 사실상 유폐됐고, 1973년 8월 70세의 나이에 시베리아 수르구트의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각주
- ↑ 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에 전개된 전쟁이다.
- ↑ 자카리아디스는 다음날 '리조스파스티스'를 통해 8.4왕당파-파시스트 독재정권보다 더 힘들었던 때로 돌아가거나 민족해방전선이 그리스의 민족해방을 위해 인민민주주의 구축을 완성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해결방안이 없다는 귀국 소감을 밝혔다.
- ↑ 부상자는 6,681명이고 총 677곳의 사무실이 파괴됐다.
- ↑ 현재 그리스 공산당이야 반수정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흐루쇼프의 노선부터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스 공산당이 반수정주의 및 친스탈린주의 노선으로 간 것은 1990년대 소련 해체 이후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