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10)

좌파도서관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3.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10)

무정부주의자들의 셋째 “비난”을 보자.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인민적 성격을 부인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관료주의자라고 부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사회민주주의적 계획은 혁명의 파멸이라고 주장하며 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독재를 지지하고 있는 것만큼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노동계급에 대한 그들 자신의 독재를 수립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 씨의 말을 들어 보라:


우리 무정부주의자들은 독재에 대하여 최종 판결을 내렸다. … 온갖 독재는 그 의도가 아무리 성실하다 해도 혁명을 파멸케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 독재 사상이란 노예제도를 영구화하려고 항상 노력하는 … 정부 물신성의 악독한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크로포트킨, ≪폭동자의 연설≫, 131페이지를 보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적 독재만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노동계급에 대한 독재의 지지자들이다. … 그들이 노동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는 규율 있는 군대이기 때문이다. …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의 힘을 빌려 국가기구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려고 한다. (≪빵과 자유≫,62, 63페이지를 보라.)


그루지야의 무정부주의자들도 역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독재의 지지자들은 곧 국가를 주장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독재는 전체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되지 않고 사회의 선두에 지금과 같은 대의제 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톤, ≪국가권력의 탈취≫,45페이지를 보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해방을 촉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들 자신이 지배하는 새로운 노예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독재를 찬동하는 것이다. (≪호소≫, 제1호, 5페이지, 바톤의 논문을 보라.)


이상이 무정부주의자 제씨들의 세 번째 “비난”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이 독자를 기만할 작정으로 꾸며낸 이런 상투적인 비방을 폭로하는 데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치는 않다.


우리는 모든 독재는 혁명의 파멸을 가져온다고 하는 크로포트킨의 극히 그릇된 견해를 여기서 분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무정부주의자들의 전술을 검토할 때에 언급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으려는 것은 “비난” 그 자체이다.


일찍이 1847년 말에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를 수립하려면 반드시 정치적 독재를 전취하여야 하며 이 독재에 의하여 자산계급의 반혁명적 공격을 물리치고 그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독재는 몇몇 개인들의 독재로 될 것이 아니라 계급으로서의 전체 노동계급의 독재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의 자본 전체를 점차 탈취하며 모든 생산도구를 … 지배 계급으로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킨다. (≪공산당 선언≫을 보라.)


다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몇몇 개인들의 지배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은 거의 모든 저서에서, 예를 들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계급투쟁≫, ≪프랑스 내전≫,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반뒤링론≫과 그 외의 자신들의 저서에서 이 사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또 그들이 이 독재를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겼는가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흥미 있는 것은 파리 코뮌에 대한 그들의 태도이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갖 푸줏간 주인과 선술집 주인을 포함한 도시 소부르주아와 맑스와 엥겔스가 속물이라고 한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러한 속물들을 염두에 두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 독일의 속물들[1]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을 듣고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빠진다. 신사 여러분, 이 독재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프랑스 내전≫, 엥겔스의 서문을 보라.)


보다시피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파리 코뮌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맑스주의자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파리 코뮌을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화제를 파리 코뮌으로 돌려 보자. 만일 파리 코뮌이 실지로 노동계급에 대한 몇몇 개인의 독재였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그때에는 맑스주의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타도하자! 그러나 파리 코뮌이 실지에 있어서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 그때에는 맑스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거짓말을 꾸며 내는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정부주의적 비방자들을 마음껏 조소하자.


파리 코뮌의 역사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 시기는 주지의 “중앙 위원회”가 빠리에서 사업을 지도하던 시기이며, 둘째 시기는 “중앙 위원회”의 권한이 끝나고 사업에 대한 지도가 방금 피선된 꼬뮌으로 넘어간 시기이다. “중앙 위원회”는 어떠한 것이었으며 또 그 성원은 어떠하였는가? 우리 앞에는 아르튀르 아르누의 저서 ≪파리 코뮌의 인민사≫가 놓여 있다. 이 책은 아르누의 말에 의하면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답을 준다. 투쟁이 시작되자마자 중대와 대대로 편성된 근 30만 명의 빠리 노동자들은 자기 대열에서 대표를 선출하였다. “중앙 위원회”는 이렇게 구성되었다.


자기 중대나 대대의 부분적 선거에서 선출된 이 모든 공민들(‘중앙 위원회’ 위원들)은 그들을 자기 대표로 선거한 자그마한 집단 내에서만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사람이며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고 아르누는 말하였다. 이것은 “거의 다 보통 노동자들과 소사무원들로 조직된 무명의 정부였는데 그 성원의 4분의 3의 이름은 그들이 사는 거리나 사무소 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 전통은 파괴되었다. 생각도 하지 못하던 일이 세계에서 일어났다. 그중에는 통치계급의 일원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법률가도, (국회)의원도, 기자도, 장군도 참가하지 않은 혁명이 폭발하였다. 그들 대신에 크뢰조의 광부, 제본공, 요리사 등이 나섰다.” (≪파리 코뮌의 인민사≫, 107페이지를 보라.)

파리 코뮌은 그 창건 첫 시기에 이렇게 행동하였다.


아르튀르 아르누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앙 위원회’ 위원들은 말하였다. “우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관이며 공격받은 인민의 수중에 있는 소박한 도구이다. … 우리는 … 인민의 의사에 복무하는 자이다. 우리는 그들의 메아리가 되며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인민이 꼬뮌을 원하므로 우리는 꼬뮌 선거에 착수하기 위하여 남아 있을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이 독재자들은 군중보다 더 높이 서 있지도 않았으며 더 낮게 서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군중과 함께 살며 군중 속에서 살며 군중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은 군중과 시시각각으로 상의하며 의견을 듣고 들은 것을 전달하면서 오직 30만 명의 의사를…, 가급적 간명하게 전달하기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책,109페이지를 보라.)


파리 코뮌은 그 창건 첫 시기에 이렇게 행동하였다.


파리 코뮌은 이런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이런 것이다.


이제 우리는 “중앙 위원회” 대신에 코뮌이 활동하던 시기인 코뮌의 둘째 시기로 넘어가자. 2개월간 계속된 이 두 시기를 이야기하면서 아르누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민 독재였다고 감격적으로 부르짖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들어 보라.


이 인민이 두 달 동안에 보여 준 위대한 광경은 우리에게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 힘과 희망을 준다. 이 두 달 동안에 빠리에는 진정한 독재, 한 사람의 독재가 아니라 정세(situation)의 유일한 지배자인 전체 인민의 가장 완전하고 논쟁할 여지없는 독재가 수립되어 있었다. … 이 독재는 3월 18일부터 5월 22일(1871년)까지 2개월 이상이나 중단됨이 없이 존속하였다. … 본래 … 코뮌은 정신적 권력일 따름이었고 공민들(Bürger)의 … 전반적인 동의(Zustimmung) 이외의 다른 물질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민은 곧 통치자, 유일한 통치자였으며 그들 스스로 자기의 경찰과 사법제도를 창설하였다. … (같은 책, 242, 244페이지를 보라.)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의 성원이며 그 백병전의 적극적 참가자인 아르튀르 아르누가 묘사한 파리 코뮌의 특징이다.


파리 코뮌의 다른 한 성원이며 역시 그러한 적극적인 참가자인 리사가레도 파리 코뮌의 특징을 그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그의 저서, ≪파리 꼬뮌사≫를 보라.)


“유일한 통치자”로서의 인민,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독재” ―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었다.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고, 엥겔스는 속물들에게 외쳤다.


바로 이것이 맑스와 엥겔스가 생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보다시피 프롤레타리아 독재, 파리 코뮌,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이 계속 “비판”하는 맑스주의에 대한 무정부주의자 선생님들의 지식이란 중국 문자에 대한 나와 독자 여러분의 지식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두말할 것도 없이 독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소수의 독재, 소수자 집단의 독재, 인민을 반대하는 트레포프 도당과 이그나치예프 도당의 독재가 있다. 이와 같은 독재는 보통 비밀 결정을 채택하는 독재자의 비밀고문단에 의해 지휘되며 이들은 대다수 인민의 목에 올가미를 씌운다.


맑스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독재의 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자들은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는 무정부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완강하게 헌신적으로 이러한 독재와 투쟁한다.


다른 종류의 독재, 부르주아지에 대한, 소수자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다수의 독재, 대중의 독재도 있다. 이 독재의 우두머리에는 대중이 서 있으며 여기에는 비밀고문단도, 비밀 결정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공개적으로 가두에서, 군중집회에서 진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두의 독재, 대중의 독재이며 온갖 압박자들을 반대하는 독재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쌍수를 들어” 이런 독재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독재는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의 장엄한 시초이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 제씨는 이 두 개의 상호 부정하는 독재를 혼동한 까닭에 맑스주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환상과 싸우며 맑스, 엥겔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의 돈키호테처럼 풍차와 싸우는 가소로운 처지에 빠진 것이다. …

이것이 셋째 “비난”의 운명이다. (다음 호에 계속)[2]


  1. [편집자 주] 엥겔스가 작성했던 원래의 표현은 “사회민주주의의 속물들”이다. 이 서문(≪프랑스 내전≫ 독일어 제3판 서문)은, 1891년 파리 코뮌 2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내전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의 이론지 ≪신시대(Die Neue Zeit)≫에 최초로 발표되었는데, 이때 편집자들이 이 부분을 “독일의 속물들”로 바꾸어 출판했고, 스탈린도 이렇게 수정된 판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2. [편집부] 출판물은 계속하여 발표되지 못했다. 그것은 1907년 중기에 쓰탈린 동지가 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의하여 당 사업을 하기 위해 바쿠로 갔는데 그곳에서 몇 달 후에 체포되었고,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란 저작의 마지막 몇 장의 원고가 경찰의 수색 시에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