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남 전쟁 기획편 ▼ 베트남 전쟁 기획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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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60년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반정부 세력이 연합하여 조직한 연합체. 베트콩(Việt Cộng)이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하다.
배경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기원은 1941년 호치민에 의해 창설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으로부터 시작된다. 베트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45년 8월 봉기를 주도했다. 8월 봉기는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일어났고, 베트민은 중부와 남부에서도 세력이 강했다. 이후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키자, 호치민의 연설에 따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전쟁은 주로 북부에서 벌어졌지만, 중부와 남부에서도 베트민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분단이 결정되었음에도 이들 대다수는 중부와 남부에 남았다. 결국 이들이 남베트남의 민중운동과 반응오딘지엠 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응오딘지엠의 폭정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 됐다. 이 분단에는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을 치른다는 전제조건이 붙은 것이었다. 애초에 통일 베트남을 이룰 생각이 전혀 없었던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남베트남에 친미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내세웠고, 응오딘지엠은 1955년 부정투표를 통해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응오딘지엠에게 있어 가장 적대시해야할 세력은 바로 베트민이었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은 이들을 탄압하고자 하는 정책들을 마구잡이로 추진했으며, 소탕작전을 벌였다. 특히나 10/59법으로 대표되는 지엠정부의 탄압은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했던 학살과 구금 그리고 체포의 연속과 유사한 성격을 보였다. 10/59법이란 피고측에 일체의 증거를 허용하지 않고 심리도 행하지 않은 채 판결을 내리며, 공소없이 사형을 선고하는 제도였다. 물론 그 이전에 설치된 1956년 1월 남베트남 법령 6호도 무시무시한 탄압을 동반했지만 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 처형된 정치범의 숫자는 최소 12,000명이다. 북베트남측 연구에 따르면 그의 집권기간 5년 동안 68,000명이 죽었고, 40만 명이 체포됐다. 베트남의 정치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쩐반짜우에 따르면 응오딘지엠이 집권하고 몇 년 사이에 874개의 감옥에 275,000명이 감금되고, 53만 명이 고문으로, 230,000명이 지뢰나 폭탄에 의해 불구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80,000명의 민간인을 살해됐다고 한다. 이러한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응오딘지엠 정부는 베트민 소탕이라는 명분하에 남베트남 민중 전체를 적으로 돌렸다. 따라서 이런 폭정에 맞선 투쟁과 시위가 격화됐다.
남베트남에서의 민중운동
물론 베트민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응오딘지엠 정부가 탄압을 가속화하자, 베트민은 다시 농촌이나 밀림에 숨어 응오딘지엠 정부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와 더불어 응오딘지엠 정부에 맞선 반정부 시위도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 응오딘지엠 정부의 지지층은 부패한 가톨릭과 대지주들 뿐이었다. 반면에 베트민은 민중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들이 가톨릭을 포함한 지주들을 협박하거나 죽이면 민중들의 지지도는 상승했다. 1959년부터 베트민은 본격적으로 게릴라혁명전쟁이라는 형태의 무장투쟁 노선을 걷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1960년 12월에 탄생한 것이 바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