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딘지엠

좌파도서관
베트남 전쟁 기획편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
Ngô Ðình Diệm
출생
출생
1901년 1월 3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꽝빈성
사망
사망
1963년 11월 2일

남베트남 사이공
국적
국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남베트남
약력
약력


개요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혹은 고 딘 디엠은 남베트남의 정치인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생애

유년 시절

1901년 1월 3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꽝빈성 캠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베트남에서 명망있는 집안이었으며 17세기 포르투갈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한 이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10대 시절 프랑스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여 15세에 가톨릭 주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진로를 바꾸어 법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이후

1921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25세 때는 지방군의 대장까지 승진했다. 1929년에는 베트남 남부에 있는 빈투언성의 도지사로 임명되었으며, 적극적인 친불 부역자로 활동을 하였다. 이때 많은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였고 1930년에서 1931년까지 베트남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불 봉기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까지 번지자, 프랑스 당국과 함께 봉기를 진압한 사례가 있었다. 이 봉기의 주축이 되었던 공산주의지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화하게 된다. 저명한 역사학자 버나드 폴은 응오딘지엠이 봉기를 진압한 이유를 두 가지로 꼽는다. 첫 번째는 이런 무질서한 봉기로는 프랑스를 몰아낼 수 없다는 판단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관료직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1933년 당시 황제였던 바오다이로부터 신임을 받아 그의 신하로 임명받고 내각 내무장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임명된지 3개월 만에 황제와 뜻이 맞지 않아 관직으로부터 물러난 뒤 10년간 후에(Thành Phố Huế)에서 일개 시민으로 지낸다. 당시 지엠이 사임하게 된 이유는 프랑스 당국이 바오다이 황제에게 황제로서의 충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였고 이후 그는 프랑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응오딘지엠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였다.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함락되고 베트남에는 곧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했는데, 이에 응오딘지엠은 일본과 협력하여 프랑스에 대항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이런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침략했던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나타났던 현상이었으나, 당시 호치민이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에 맞서 베트민을 창설하여 자주적인 항불항일투쟁에 나섰다는 점과 대비되었다. 일본과의 협력 노선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바오다이 황제와 협력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1945년 3월 일본의 쿠데타로 바오다이가 괴뢰국 황제로 임명된 이후 응오딘지엠도 새 정권의 수상직을 제안받았으나 그는 제안을 사양했다.

일본의 항복과 1차 인도차이나전쟁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여 군사를 철수시킨 뒤 베트남에선 미국 OSS와 협력하던 호치민의 베트민이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이른바 8월 봉기를 일으켜 전국적인 민중지지기반 세력을 등에 업게되고 9월 2일 호치민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선언을 하며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당시 응오딘지엠이 한 일은 바오다이를 내팽개치고 여행을 떠나다가 베트민에 붙잡혀 국경도시로 추방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후 1946년 11월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할때 사이공으로 가서 언론 활동을 하며 영향력을 넓혔다. 이에 좌익 세력뿐만 아니라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까지 협력대상을 광범위하게 확장하던 호치민의 관심에 들어 포섭을 시도했지만, 태생적으로 관료계급이자 반공주의적 가톨릭 세력이었던 디엠은 거절하고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망명, 그리고 귀환

그는 벨기에에 잠시 정착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강화되던 1950년대 인맥을 형성했다. 1950년대 초 디엠은 미국에 정착한 뒤 장차 정계로 복귀할 것에 대비하여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던 응오딘지엠은 뉴저지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에서 몇 달을 보냈으며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메시아적이고 망상적인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초기에는 워싱턴에서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많은 미국 담당자들에게 그는 수도사 같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보였고, 정치적 자질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심지어 한 미국인 평론가는 그가 ‘메시지 없는 메시아’라고 코웃음칠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응오딘지엠이 아니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전후로 하여 응오딘지엠은 미국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강경 보수주의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이 본인들의 구미에 맞았던 인물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인 디엠이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에서 일했던 랜스데일은 1950년대 당시 응오딘지엠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탄탄하게 구축하는 것이 과제였다. 그는 응오딘지엠에 대해 “신비스럽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추켜 세울 정도였다. 그외 1953년 대한민국을 방문해 이승만을 만나고, 중화민국 장개석을 찾아가는 등 반공외교 활동을 하였다. 1953년 9월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을 받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6월 26일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괴뢰 황제였던 바오다이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기 2주일 전 응오딘지엠을 베트남국의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바오다이가 응오딘지엠을 통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한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해오던 미국은 제네바 회담을 통해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북과 남을 분단시켜버렸다. 여기에는 2년 이내의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났을 당시 북남으로 분단 된 베트남의 상황은 이러했다. 북베트남은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을 해온 호치민과 공산당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남베트남은 1949년 프랑스가 미국에게 지원받기 위해 바오다이를 내세워 형성했던 괴뢰국, 즉 베트남국이 있었다.

1954년 8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 구상은 ‘바오다이를 통한 해결’을 ‘응오딘지엠에 대한 해결’로 대체하는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일단 군권은 디엠에 반대하는 친프랑스 집단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갱 집단인 빈쑤옌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친프랑스적인 호아하오와 까오다이 교파들도 그에 대항하는 조직이었다. 비록 아직까진 프랑스가 만들어낸 토착 지배세력의 권력이 강했지만, 미국이 선택한 것은 토착 지배세력의 중심이 아닌 반공 민족주의적 관료계급인 응오딘지엠이었다. 그는 CIA 요원 에드워드 랜스데일의 지원을 받으며 즉각 반대파를 분쇄하고 베트민에 가담했던 인사들에게까지 탄압을 시작하여 베트민측이 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원회 사무실들을 강제로 폐쇄했다. 그렇게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친프랑스 계열 조직인 빈쑤옌, 항일 항불투쟁의 대중적 조직인 베트민을 동시에 탄압하며 남베트남의 지도자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남베트남 대통령으로

1955년 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국의 계획대로 디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 혹은 디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55년 10월 23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국민투표가 실행됐다. 결과는 득표율 98.2%의 지지를 얻은 응오딘지엠의 승리였다. 개표결과 찬성이 572만 1,735표, 반대가 63,017표 그리고 무효표가 44,105표였다. 물론 이 투표 자체는 부정선거였다. 이렇게 해서 응오딘지엠은 1955년 10월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이른바 남베트남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56년 4월에는 호아하오 지도자 바 끌의 마지막 무력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봉건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끊임없는 부정부패와 정책실패, 폭정

응오딘지엠은 정권 초기 바오다이 축출과 빈쑤옌 세력 제거 밑 통합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월남한 80만 난민의 정착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국정안정과 대중적인 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난민의 대부분은 카톨릭교도, 몰락한 지주, 친불부역자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그가 점차 미국의 후원을 대대적으로 받아가며 미제국주의의 반공의 보루로써 역할을 하게 되며 나타났다.

토지개혁에 있어서도 베트남 인구의 극소수(10%미만)인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토지를 할당했으며, 불교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 했다. 또한 응오딘지엠은 족벌 정치를 실행하여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는 남베트남의 수석 보좌관으로, 응오딘누의 부인 마담누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 마담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디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그리고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응오딘지엠 정부가 주도했던 토지개혁은 경제·사회적인 부정부패와 불평등을 보여주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인 전 개인소유지 24만 6천 헥타르를 남베트남 정부에게 반환했는데, 이 반환받은 토지를 포함한 전체 토지중 1958년 기준 농지개혁 계획으로 농민에게 재분배한 것은 24만 8천 헥타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분배되지 않은 농지는 대부분 정부가 쥐고 있었고 정부는 그것을 최고가격으로 입찰하는 이들에게 임대했다. 이러한 토지개혁의 실패, 족벌 정치로 인한 심각한 부정부패, 그리고 민중에 대한 억압정치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과오는 항불항일 투쟁을 했던 베트민에 대한 억압조치였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반체제, 반정부인사들과 베트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 역사를 연구한 알렉산더 캔드릭은 <미국의 갈등>이란 책에서 응오딘지엠 집권 기간동안 응오딘누는 75,000명을 살해하고 5만 명을 투옥했다고 썼다. 베트남의 쩐반쟈우는 “지엠이 집권하고 몇 년 사이에 874개의 감옥에 275,000명이 감금되었고, 53만 명이 고문으로, 23만 명이 지뢰나 폭탄에 의해 불구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8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1956년 남베트남 정부는 최고 2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재교육센터에 감금되었다고 발표했고, 프랑스 학자 드빌레는 그 수치를 최소 5만 명이라고 추정했었다.

이런 조치들이 계속되면서 1959년부터 베트민 잔존 세력들과 일부 민중들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에 나섰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적 조치들을 성공적으로 마친 호치민의 북베트남 지도부는 “전체회의 결정과 더불어 주의 깊게 지켜보며 기다리던 자세를 버리고 남부 통일에 제일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억압적이고 반민중적인 조치가 계속되자 남베트남에 남았던 잔존 베트민 세력과 민중들은 하나의 조직으로써 뭉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60년 12월 20일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 약칭 베트콩이었다. 베트콩은 북베트남의 지원 없이도 스스로의 부대원을 충원했으며, 남베트남 사람들의 지원을 통해 생존할 수 있는 자생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북베트남에서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는 인원도 대부분 남베트남 출신으로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이 분단됐을 때 월북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미국과 동맹국들은 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부패하고 민중들의 요구를 무지막지하게 탄압했던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지원이 더 많은 베트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콩들이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목표로 투쟁을 전개하자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 누 그리고 미국의 로버트 맥나마라은 자신들의 또 다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그게 바로 전략촌이었다. 전략촌은 1962년 케네디 정부의 야심찬 전략으로 4,000개가 세워져 남베트남 총인구의 39%를 정착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의 그것에서 발전한것이 없었고, 평정지역의 관리 또한 너무 허술했다. 심지어 베트콩을 격퇴하고자 마을별로 총기를 배포할 때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경우 배급하지 않는 일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한 적대정책과 과도한 팽창 그리고 허술한 방어력으로 인해 이 전략촌을 베트콩과 혁명세력들이 적잖게 접수하게 되면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과 연합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는 1960년에 이르러 175,000명의 정규군과 10만 명의 민병대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엄청난 규모에 비해 너무도 허술했다. 특히나 1963년 1월 압박 전투에서 후인반까오가 지휘하는 1,700명의 남베트남군은 미고문단이 지원한 전투헬기와 APC 장갑차량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300명 안팎의 베트콩 부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당시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83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 그리고 5대의 헬기와 3대의 APC 장갑차가 파괴될 동안 베트콩의 전사자는 18명이었다. 쉽게 말해 남베트남군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농민 군대인 베트콩에게 참패했다.

틱광득의 순교, 거세지는 민중의 저항

1963년 6월 11일. 응오딘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에 견디지 못한 틱광득이라는 고승이 사이공 거리에서 온몸에 기름을 붓고 소신공양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응오딘지엠의 제수 마담 누(본명 쩐레쑤언)는 "중놈 바베큐가 된게 뭐가 대수냐!"는 망언으로 남베트남 민중의 분노를 키웠고,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보내 군사적으로 지원하던 케네디 정부마저 등을 돌리게 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자 남베트남에선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격하게 일어났으며, 학생과 지식인 승려 그리고 일반 시민들 까지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뒤어어 더 많은 불교 승려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반대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분신하기 시작했다. 이에 남베트남 경찰은 사이공 씨로이 사찰을 습격하여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과 민간인 200여명을 체포했으며 사찰을 폐쇄시켰다. 사이공에서도 학생괴 승려를 비롯한 민중들의 시위가 잇따랐는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옛 베트남의 수도였던 후에에서는 1만 명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쿠데타와 최후

결국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을 제거할 계획에 착수했다. 1963년 10월 2일 케네디는 CIA에서 한 달이 넘도록 세밀하게 검토한 수정 계획을 승인했고, CIA는 즈엉반민을 포함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 있는 남베트남 군부와 접촉하여 쿠데타 계획에 착수했다. 쿠데타는 1963년 11월 1일에 개시됐다. 오후 1시 30분에 시작된 쿠데타는 주요 시설들을 장악한 뒤,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당시 응우옌 반 티에우 대령은 1개사단을 지휘했었는데, 그 또한 이 쿠데타에 참여했다. 대통령궁을 포위한 쿠데타 군은 응오딘지엠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2번이나 항복을 거부했고, 오후 4시에 쿠데타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다음날인 2일 새벽 3시 30분, 대통령궁에 대한 전투기와 탱크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되자, 응오딘지엠은 경비대에 전화를 걸어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3시간 뒤인 오전 6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항복과 명령 자체는 전화를 통해 이어졌고, 그때까지 쿠데타군은 그의 위치를 전혀 알지 못했다. 쿠데타군이 응오딘지엠을 발견한 곳은 쩌런(차이나타운)의 가톨릭 성당이었다. 항복을 선언한 디엠은 동생 누와 함께 무장 호송차에 태워졌고 호송 도중 총살당한다. 그렇게 1963년 11월 2일 62세의 나이로 그는 사망하였고 그의 정권도 쿠데타로 무너지게 된다.

참고문헌

남베트남군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불편한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