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좌파도서관

문혁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문화대혁명(無産階級文化大革命[1] / 无产阶级文化大革命)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약 10년간 벌어진 중국의 사회 운동이다.

개요

마오쩌둥이 주창한 전근대적 문화와 자본주의적 요소를 타파하자는 운동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으로부터 받아들여진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과정 중에 모험주의적 과오가 있었던 점으로 비판 받을 지점이 있다.

전개

1965년 상하이 당위원회 서기이자 후일 4인방의 일원으로 불리게 되는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이라는 비평글을 통해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唅)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하였다.

1966년 4월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이 해임되고,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1966년 8월 천안문 광장에서 100만인 집회가 열렸고 이곳에 모인 홍위병들이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였다.

1967년 1월 마오쩌둥이 중국군에게 문화대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인민해방군은 각지의 학교•공장•정부기관을 접수하고 홍위병들을 깊숙한 산골로 추방하였다.

1968년 9월 전국 각지에 인민군 대표, 홍위군 대표, 당간부의 3자 결합으로 '혁명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진정국면으로 들어섰다.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문화대혁명은 절정에 달하였다.

1971년 국방장관 린뱌오가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를 당하고,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바쳤던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1973년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덩샤오핑이 권력에 복귀하였다.

1976년 1월 1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데 이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후계자 화궈펑에 의해 10월 10일 린뱌오와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을 비난하는 데 앞장섰었던 4인방이 체포되어 축출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공식적으로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되었다.

성과

폐해

학살

문화 파괴

교육 피해

반응

현재의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를 과오로 보고 비판하고 있으며 최고 책임자였던 마오쩌둥에 대해서도 비판하지만 직접적인 비판은 '4인방'으로 불리는 장칭(江青),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张春桥), 야오원위안(姚文元) 이 넷과 실각당한 린뱌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1. 무산계급문화대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