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제국주의적 행보
상위문서 : 미국
이 문서는 미국의 탄생부터 세계적 패권을 쥔 이후까지 정치/경제/군사적 제국주의 행보를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문서이다.
역사
식민지 시절
미국은 국가 자체가 수백년간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말살 및 추방하고 만들어진 나라이다.
콜롬버스가 대서양을 건넜고, 그 뒤를 이어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인들은 이곳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면서 자국인들을 이주시켰다. 유럽국가들은 그리하여 1500년대부터 북미-남미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에서, 영국은 북아메리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영국은 현재 메사추세츠에 위치한 플리머스와,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제임스 타운에 각각 식민지(정착지)를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북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디언이라고 불리던 원주민의 땅을 빼앗고, 추방하건 학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대서양 연안지대에 영국계 식민지가 자리잡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민지들은 자체적으로 팽창을 시작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불렀다. 또한 다른 유럽국가인 프랑스계 식민지들과도 충돌을 불렀고, 1600년대 이후부터 북미대륙은 식민지들과 원주민 부족들 전쟁이 계속되었다.
식민지인들은 원주민들이 자리잡은 영토가 탐이나서 더욱 서쪽으로 확장하려고 했으나, 영국 본국 정부는 원주민들과의 전쟁은 과중한 군비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를 강력하게 막았다. 여기에 캐나다 지역의 프랑스계 식민지와의 전쟁으로 엄청난 군비를 소모한 영국 본국 정부는 북미 식민지들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에 분개한 식민지인들은 "대표없는 세금은 없다"는 구실로 영국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1776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 독립전쟁이다.
영국은 식민지의 독립을 막기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조지 워싱턴의 지휘를 받는 식민지군은 영국군을 패퇴시켰고, 결국 13개 식민지는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인정받고, 스스로 아메리카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연방국가를 건국한다.
미합중국 초기: 건국부터 남북전쟁 전까지
독립 초기 미국의 영역은 대서양 연안에만 발을 걸친 상태였고,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중부는 원주민의 영역, 그리고 남서부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팽창주의를 지향했고, 이것은 소위 "프론티어 정신" 혹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개념으로 미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팽창은 원래 이곳에 자리잡았던 수많은 원주민들에 대한 추방이나 학살이 수반되는 것이었으며, 이런 개념은 북미대륙이 완전히 미국의 손아귀에 넘어간 이후에는 본격적인 제국주의로 변화한다.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확장을 막던 영국정부가 사라지자, 식민지인들은 봇물 터지듯이 이 강을 넘어가기 시작한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 전쟁을 위한 전비 마련을 위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했고, 미국인들은 이곳으로도 진출한다. 미국 정부는 원주민들에게 매번 "더이상의 영토 확장은 없다"는 식으로 회유하며 여러 조약을 맺었지만, 거의 지키지 않고, 이주민들이 조약을 어기고 정착하면 이들을 원주민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는 방식으로 계속 확장했다. 이에 원주민들이 반발하면 전쟁을 선포하여 원주민들을 깡끄리 전멸시키거나 황무지로 추방하고, 영역을 차지했다. 이렇게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미국이 일으킨 원주민 학살은 헤아릴 수 없지만, 이는 "서부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고, 미국인에 의해 씌여진 영화 및 소설을 통해 "착한 개척민들이 사악한 야만족을 격퇴했다"고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는 원주민의 영역을 불법적으로 탈취했을 뿐이다. 미국 잭슨 대통령의 원주민 투쟁으로 무수히 많은 원주민이 추방당하고 죽었다.
한편 현재의 텍사스 지역은 멕시코의 영역이었으나, 미국은 이곳에 눈독을 들였고, 미국인들을 텍사스 공화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운 후, 미합중국에 가입시키게 하는 형식으로 자국에 편입시켰다.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한 미국은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을 일으켜, 현재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콜로라도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무력으로 빼앗았다. 이로서 미국은 캐나다 지역과 멕시코 지역을 제외한 북미대륙의 중앙부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영토편입은 미국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편입된 새로운 영토의 노예제 인정을 둘러싸고, 남북주들 간에 갈등이 벌어지고, 노예제들을 지지하는 남부주들이 미국에서 탈퇴하자, 미국은 탈퇴한 남부주들의 독립을 막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5년간의 격전끝에 남부주들은 패배하고, 독립시도는 좌절된다. 이런 노예제 폐지는 민주주의와 인권역사상 특기할만한 것이지만,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태도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이전까지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선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남부에 있던 흑인들은 이번에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농장주들에게 착취 당해야 했다. 더 나아가 그 시기부터 남부의 백인들은 흑인들을 이전보다 극도로 혐오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하여 KKK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주의 단체가 생겨났다. 남부의 백인 지배계급들은 그 악명높은 짐 크로우 법을 재정하여 흑백분리정책을 대략 90년간 실행했다. 미국 정부는 북아메리카 대륙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하고 학살했는데, 그런 극심한 탄압과 학살의 절정은 1889년 '운디드니 대학살'이었다. 그 운디드니 대학살에서 미제국주의 군대는 대략 300명의 원주민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와 유아를 무차별 학살했다. 그 시기 미국은 자본주의로 발전하면서 제국주의 기업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했고, 이에 반항하면 아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억압했다. 1913년 기업가 록펠러가 저지른 러들로 학살이 그러했다. 이 러들로 학살 당시 록펠러 휘하의 군대는 개틀링건까지 사용하여 학살하는 만행을 보이기 까지 했다.
북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은 미국은 이제 해외영토에 눈을 돌려 하와이를 보호국으로 삼아 아시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어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리던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나중에 하와이를 완전히 자국 영토로 삼았다.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키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훨씬 경제규모가 큰 청나라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며, 프랑스 및 영국과 같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함께 중국의 이권을 강탈하였다. 이런 제국주의의 행패에 분노한 중국인들은 의화단의 난으로 제국주의를 몰아내려고 했으나, 오히려 역습을 받아 청나라의 반식민지화는 가속되었다.
한편 1898년 미국은 쇠락한 식민제국인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쿠바와 필리핀을 강탈하였다.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미군을 도왔으나, 미국은 독립을 주기는 커녕 새로운 지배자로 필리핀을 지배하려 했고, 이에 반항하는 필리핀인 수십만명을 학살하고 필리핀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한다. 당시 쿠바가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을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어 미국은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 합병을 묵인해주는 대신, 필리핀 지배를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멕시코와의 국경분쟁을 해나가고 있었고, 1917년 독일이 멕시코에게 보낸 치머만 전보가 알려지면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은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12000명의 군대를 보내 적백내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와 냉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립을 지켜오다 1941년 일본에게 기습공격당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게 된 미국은 한때 추축국에 맞서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경쟁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냉전이다. 1945년 일본의 항복하고 난 뒤,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개입한다. 당시 조선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토대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들을 전개해 나갔는데, 한반도 이남에 들어온 미군정은 소련군과는 달리 이를 강제 해산시키고 친일파들을 앞세워 분단의 틀을 구축했다. 미군정은 경제정책에서도 실패했는데,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을 조선 경제에 적용 시키는 바람에 쌀값 폭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미군정에 맞서 1946년 대구 10.1 항쟁이 일어났고, 1948년 제주 4.3항쟁이 일어났으며, 그해 10월 여순 항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런 민중항쟁을 친일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미국은 중국의 국공내전과 그리스 내전 그리고 필리핀 문제에 개입했다. 중국 국민당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국공내전 시기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던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하자 미국은 마르코스를 앞세워 이들을 분쇄시키고, 마르코스 우익 독재정부를 수립했다. 그리스가 나치독일로부터 해방된 이후 영국이 그리스 문제에 개입했었는데, 2차세계대전 이후 그리스 내전이 좌우익 간의 갈등으로 확대되자 미국은 벤 플리트 장군을 비롯한 군사 고문단을 그리스에 파견하고 물자와 무기를 그리스 극우세력들에게 지원함으로써, 우익 독재정부를 수립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돕기 위해 즉각적으로 군사를 투입했고, 전세를 역전시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노근리 학살을 자행했고, 이후 대한민국의 군경과 우익 청년단의 무차별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도왔으며, 북한 지역을 폭격하여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극에 달했던 사례가 또 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호치민이 독립을 선포하자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기위해 개입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미국은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프랑스를 지원했고, 프랑스 전쟁 비용의 80%를 대신 지불했다. 심지어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가 함락될 것 같자,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군대 투입까지 고려했었다.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통일을 위한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미국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내세워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1960년대 남베트남 독재 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놓이자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을 침략한다. 베트남을 침략한 미국은 민가에 융단 폭격을 가하고 고엽제를 투하함으로써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테러했다. 베트남 전쟁이 미제국주의의 추악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게 바로 미라이 학살 사건이다.
그외에도 미국은 1950년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혁명 시기 그들의 적이었던 바티스타 정권을 지원했고, 1961년 쿠바를 봉쇄하여 그들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등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1970, 80년대 남미 문제에 개입하여 우익독재정부를 무수히 많이 세웠다. 대표적으로 1973년 칠레에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아옌데를 암살하여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세운 것과 1982년에 단행한 그레나다 침공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을 향한 전폭적인 지원 등을 들 수 있다.
현대
1991년 소련이 해체 된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적이 사라지자 미국에게는 또 다른 적이 생겼다. 바로 중동과 이슬람이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공했다. 특히나 이라크 전쟁의 경우 9.11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신무기가 있던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침략한 사례였으며, 이라크에 있는 석유를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을 고립시켰고, 현재도 우익인 과이도 정권을 지원하며 제국주의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년간 지속되었가며 미군의 공습으로 적잖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었다. 그리고 최근엔 이란에 대해 경제제재와 군사위협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의 국제법 위반 사례
미국은 타국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이익이나 세력확장에 방해되는 국가에는 협잡이나 범죄적 음모를 사용해왔고 그것도 안되면 아예 전쟁을 일으켜 왔다.
중남미
1823년 미국이 아직 대서양 연안에 발을 걸친 3류국가였을 시절,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은 '먼로주의"를 내세워 유럽국가가 남북아메리카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신대륙 전역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삼으려는 것이었고, 이후 200년 가까이 남북 아메리카 모두에서 미국의 착취와 간섭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일단 이들 나라에 미국은 좌파나 개혁정권이 들어서면 '민주화' 또는 '인권탄압'을 들어 경제봉쇄를 실시한다. 물론 미국은 이전에 혁명으로 쓰러진 우파 정권의 독재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서 그 나라의 국부를 갈취해 왔다. 경제봉쇄를 실시하게 되면 민생이 어려워지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패한 이전 집권세력이 '민주세력'으로 가장하고 개혁정권과 혁명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인다.(후안 과이도, 그리고 니카라과의 비올레타 차모로) 이래도 정권이 바뀌지 않으면 아예 우파 반군을 지원하거나(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 군부를 동원해 쿠데타를 기도한다.(칠레, 볼리비아) 그것도 안되면 아예 민낯을 드러내 미군을 동원해 직접침공(피그만 사건, 그레나다 침공, 파나마 침공)을 하여 좌파정권의 전복을 기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파정권이 들어서면 혁명으로 실시된 개혁은 모두 폐지되고, 부는 소수에 더욱 집중되게 된다. 남미각국이 빈곤을 벗어나지 못고 정치가 계속 혼란한 이유는 미국이 이렇게 잔인하게 중남미 각국의 정치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쿠바
1959년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자, 미국은 피그만 침공사건을 일으켜 전복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며, 그 이후로도 쿠바를 군사적으로 계속 위협했다. 뿐만 아니라 CIA는 무려 638번의 피델 카스트로 암살기도를 벌이기도했다. 1962년 핵전쟁까지 갈 뻔한 쿠바 위기 이후에는 군사적 침공은 포기하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도 계속 경제재재를 가하고 있다.
칠레
1970년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는 합법적 선거로 집권했다. 아옌데는 민주사회주의적 정책을 펴려고 했으나 미국은 이런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다국적 식품기업인 네슬레를 이용해 칠레 경제위기를 조장하고, 칠레 군부에게 쿠데타를 교사했다. 미국의 충견 칠레 군부와 그 수장 피노체트는 1973년 혼란 수습을 이유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피노체트는 쿠데타 이후 아옌데 및 정부 요인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양민들과 시민들을 3만명이나 학살하고 17년간 집권했다. 덤으로 피노체트 시절 미국의 시카고 학파 학자들은 신자유주의를 실험한답시고 칠레에서 무분별한 민영화 및 사회복지 제도 폐지정책을 펼쳤다. 우파들은 칠레의 경제가 중남미에서 제일 견실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미국이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칠레에는 음해나 전복공작을 펴지 않기 때문이다. 피노체트와 군부가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서 기득권들이 부를 독점한 결과 칠레의 빈부격차와 정치적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이며, 2019년 11월에도 이에 분노한 민중의 봉기로 소요사태가 벌어진 바가 있다.
니카라과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은 이란에 잡혀 있는 인질들을 방치한 채 이란 정부에게 불법적으로 무기를 팔고, 니카라과에서 활동하던 친미 성향의 콘트라 반군을 그 돈으로 지원했었다. 미제국은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여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던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시키려 했다. 또한 1979년 혁명으로 집권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도 후에 선거를 도입해 소위 민주제도를 도입해 선거에서 승리해 미국 기준으로도 합법적으로 집권하고 있지만, 미국은 항상 위협을 가하고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동적인 콘트라 반군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하여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으며, 최소 3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레나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침공하여 그레나다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파나마
1989년 12월, 미국은 파나마의 노리에가 대통령이 마약을 밀수하고 있다는 이유로 파나마를 무력침공했다. 마약 밀수는 사실 명분이었고 이 마약판매 또한 미국이 중남미 우파 게릴라들을 돕기 위한 자금으로 쓰였던 것이었기 떄문이 미국도 공범이었다. 실제 침공 이유는 노리에가가 파나마 운하에서 미국의 입김을 배제하려고 하자 선수를 친 것이었다. 이 침공은 국제적으로 규탄되었으나, 미국은 소련이 약화된 틈을 타서 밀어붙였고, 결국 노리에가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후 미국의 입김아래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기예르모 엔데라가 당선되었고 엔데라는 미국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베네수엘라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사회주의를 내걸고 불평등 해소를 약속한 우고 차베스가 당선되자,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경제봉쇄를 펼쳤다. 2000년대에는 고유가 때문에 베네수엘라 경제는 나쁘지 않았지만, 2010년대 저유가 시대가 되자 미국의 경제제재와 겹쳐서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바닥을 치게 되었다. 미국의 언론들은 석유 공급 실패로 인한 사회주의의 실패라고 음해하고 있는데, 미국 언론을 단순 번역해 보도하는 한국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혼란 조장에도 불구하고 차베스의 후계자인 마두로를 수반으로 하는 좌파정부의 지지도는 매우 높으며, 이후에도 미국은 2019년 후안 과이도를 내세워 쿠데타를 벌였으나, 하루만에 무혈진압되었다.
볼리비아
이외에도 미국은 중남미 각국의 정치에 개입하고 있으며, 가장 최근의 예로는 2019년 10월,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실각시킨 쿠데타를 교사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쿠데타는 미국의 교사임이 거의 확실하고[1], 이들은 자원산업을 국영화시킨 모랄레스의 개혁조치를 되돌리려고 했지만, 2020년 10월 벌어진 총선에서 다시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모랄레스의 정당인 좌파 사회주의 운동당이 다시 집권하였다. 미국을 등에 업은 우파는 다시 쿠데타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현재 미국 자체가 혼미한 정국이라 개입을 못하고있다.
과테말라
냉전 초기 과테말라에는 기존의 낡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아르벤스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개혁정권이 들어섰다. 아르벤스가 개혁을 시작하자 미국은 곧바로 과테말라 문제에 개입했고, 특히나 제국주의적 독점 기업인 연합과일회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당시 아르벤스가 첫 단계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 토지 947㎢(2억 8,646만 평)에 대한 국유화에 착수했는데, 이 중 90% 이상이 놀리는 땅이었고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다. 1950년대 초 해리 트루먼은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계획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파들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한 아르벤스는 1954년 결국 자진사퇴했다.
이후 과테말라에는 미국이 이끄는 친미정권이 들어섰고, 이런 사태는 당시 남미를 여행하던 중 과테말라를 들렸던 체 게바라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과테말라는 내전에 휩싸였고, 친미진영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1980년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은 과테말라 친미세력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도움으로 과테말라의 정부군은 1981~83년 아메리카 원주민 농민 약 10만 명을 살해했다. 대표적으로 1982년 과테말라 정부군이 도스 에레스 마을에서 저지른 학살은 160명이 학살당했는데, 이중 65명이 어린이었고, 죽이는 방법도 매우 잔혹했다. 아무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 과테말라 정부군은 강간, 고문, 거세, 사지절단, 참수, 시실 절단 같은 악행을 저질렀고,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자유의 전사”로 치켜세웠으며,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이 지원하는 과테말라 정부에서 학살당한 사람이 20~30만 명이나 된다.
콘도르 작전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은 1968년부터 1898년까지 미국이 남미에서 극우정권을 조종하여 민주화인사나 좌파인사를 무차별하게 암살하거나 투옥한 작전을 말한다. 미국은 CIA를 앞세워 남미전역(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콜롬비아, 페루, 베네수엘라)의 군부독재자나 우파독재자를 지원했으며, 이들에게 살해되거나 실종된 인사는 5-8만명 이들에게 감금된 인사는 4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CIA는 이들 남미 독재국가에 물적지원뿐만 아니라 고문과 같은 인권유린을 전수했다. 또한 이런 정치적 탄압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퍼뜨려 남미 민중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중동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거의 매년 비무장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폭격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란
1953년에 이란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하마드 모사데그를 친팔레비파와 공모하여 그를 실각시키고 친팔레비파를 복원했다. 팔레비 정권이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자 이란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를 가하고 있다.
리비아
- 1986년 카다피를 죽이기 위해 리비아를 폭격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 리비아를 경제봉쇄 끝에 무장해제시킨 후 자유리비아군을 지원했고,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 리비아는 걷잡을 수 없는 내전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라크
- 1991년 걸프 전쟁 이후 미국과 서방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고립시킴으로써, 150만 이상의 이라크 민간인을 아사시켰다. 그 중 50만 명은 유아나 아이들이었다.
-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다"는 이유로 침공해서 이라크를 점령했으나, 미국 정부의 조사기관조차도 대량살상무기는 없었다고 보고서를 냈다. 당연히 이런 명분없는 전쟁은 전쟁범죄였으나 아무도 법적 처벌을 받는 바 없다. 거기다 이 전쟁에서 미군이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최소 6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아프가니스탄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돕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침공했다. 2001년 부터 오늘날 까지 미국에 맞서 싸우고 있는 탈레반은 사실 1980년대 미국이 지원했던 동맹세력이었다. 현재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무차별 폭격으로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생명을 빼았아 갔다.
동아시아
필리핀
1899년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인들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을 도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나, 미국은 필리핀인들을 배신, 독립을 선포한 필리핀 제1공화국을12만명의 병력으로로 침공해서 필리핀을 미국 보호령(사실상이 식민지)으로 삼았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필리핀군이 아닌 민간인은 25만에서 100만명까지 사망했는데, 이는 미국 책임이지만 친미파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축소하고 있다.
베트남
1960년대부터 공산주의 확대 저지를 이유로 남베트남 문제에 개입하여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함으러써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대략 수백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하고 엄청난 양의 고엽제를 투하하여 수백만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일반적으로 미군은 정규전을 벌였고, 베트남 해방전선은 게릴라전 및 도시테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연구그룹'(study group)이라는 이름이 붙은 범죄적인 특수부대(MACV-SOG)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부대의 주요 임무는 전쟁 범죄적인 것으로, 북베트남 주요 인사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여러 남베트남내 민주인사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통킹만 사건도 이 부대의 조작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은 정규 작전중에도 무수한 민간인 학살을 벌였지만, 아예 전쟁범죄만을 저지르는 테러조직을 정규군으로 운용했다.
라오스
미국은 라오스 사태에 초기부터 개입하여, 반공주의자들을 지원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똑같이 네이팜 폭탄과 고엽제를 살포했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라오스에 200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이 자극한 라오스 내전에서 라오스 인구 1/10 이상인 35만 명 이상이 이렇게 사망했다.
캄보디아
미국은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베트남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부터 인근 공산국가인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크메르 루주는 원리주의적인 계급투쟁관을 고수하면서 당시 소위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여러 학살극을 벌였는데, 베트남과 외교분쟁을 일으켰다가 베트남군의 침공을 받아 밀림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과 그 동맹국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태국을 통해 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할리우드를 동원해 1986년에 크메르 루주를 비판하는 《킬링필드》라는 영화를 만들어 마치 자신들은 전혀 이와 무관한 것처럼 행세했다.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1970년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과 베트남 전쟁 시기 부터의 무차별적 폭격의 영향이 컸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에 대략 60~70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하여 최소 4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렇기 때문에 친미반공 론놀 정권이 몰락하고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인도네시아
미국 CIA는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인사 수하르토를 사주하여 반공쿠데타를 획책, 공산당원 및 소수민족 50만에서 100만명 많게는 300만 명 이상을 무차별 학살했다.
북한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미국은 여러번 약속을 어기면서도 마치 북한만이 약속을 파기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과 1994년 제네바 핵합의를 하고 북한이 핵개발을 유보하면 5년안에 신포에 핵발전소를 건설해주기로 약속했으나 핵발전소는 5년은 커녕 2001년까지도 부지공사만 하는식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오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후 부시 정부가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고 인정했다"고 일방적인 주장을 펴면서 2001년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부시정부는 9.11 테러를 핑계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더불어 악의 축으로 분류했다. 결국 북한은 핵개발을 재개했다. 2005년 6자회담 이후 북한이 9.19합의로 핵동결을 약속했는데, 바로 방코 델타 아시아 은행의 북한계좌를 동결했고, 결과적으로 9.19합의도 깨졌다. 이후 북한은 일사천리로 핵개발을 진행했다. 2019년 2월에도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회담전 합의된 내용을 뒤집어서 결과적으로 정상간 회담은 없어졌다. 문제는 미국의 입장만을 발표하는 미국언론 및 국내보수언론에 의해 한국에서는 "미국은 약속은 지키는데 북한은 속임수를 쓰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한반도 남부에 점령군으로써 입성했고 최소 3년간 군정을 실시했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자주적으로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가면서 새 나라 건설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미군정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과거 일제에 협력하던 경찰들을 군정하에 편입시켰다. 경찰 고위층의 최소 85% 이상이 친일 경찰이었으며, 과거 일본군 출신 인사들을 군에 편입시켰다. 감옥의 수감자는 일제 시대보다 더 증가했으며, 이승만 정부 초기에 이르러선 대략 12만 명 이상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감옥에 수감됐다. 뿐만 아니라 대구 10.1 항쟁과 제주 4.3 항쟁 그리고 여순항쟁에 미군이 개입하여 경찰과 군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학살하도록 도왔다. 이러한 행위는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반복됐으며, 적잖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이후 미국은 한국이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독재정권을 옹호하기도 했으며, 이들이 필요가 없어지면 제거하려는 노력도 했다.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며, 적잖은 범죄와 사건이 일어나지만, 제대로된 처벌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윤금이 사건이나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유럽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여 소련을 붕괴시킨 보리스 옐친을 도와 당선시켰다. 이때 미국의 여러 선거전문가들이 러시아에 파견되어 옐친을 도왔다. 옐친은 소련 붕괴후 갖은 실정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었으나 서방전문가들의 현란한 선거전략 및 흑색선전에 힘입어 간신히 당선되었으며, 옐친은 계속된 실정으로 더욱더 러시아를 약화시켰다. 그 결과 러시아는 초강대국에서 지역강국의 하나 정도로 전락했으며, 고유가가 되는 2000년대 중반까지 국민의 삶은 소련 시절보다 더 나빠졌다. 아버지 부시를 이은 아들 부시 대통령은 NATO를 러시아 국경쪽으로 더 확대시켰다. 나토 확전의 2단계 물결은 2002년 말에 시작되어 2004년 3월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까지 확장했고, 러시아와의 군사적 대립을 유발시켰다. 부시는 러시아의 의견은 대놓고 무시한 채 나토에 관할지역을 더 확장시키라는 압력을 가했었다.
유고슬라비아
동구권 해체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붕괴되며 보스니아 내전(1992~1995)과 코소보 내전(1999)이 일어나자 미국은 NATO군이라는 이름으로 내전에 개입했다. 개입한 미군은 항공력으로 그 나라의 도시와 마을을 초토화 시켰고, 수많은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문화-이념 방면
미국의 할리우드는 겉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워 진보적인 척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정적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 미국제국주의 정당화, 반공주의를 전세계에 퍼트려왔다. 그리하여 미국의 폭력적인 제국주의를 은폐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정당화하고 있다.
1980년대에 미국이 주도한 신우파 운동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지구인들을 우경화시켰고 그 결과로 지구인들이 서로 분쟁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결과를 유발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때부터 여러 선전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소리나 자유아시아방송이 대표적이다. 미국 국무부나 CIA의 심리전단부가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이런 선전기관은 마치 중립적인 정보를 제공하면서 미국 제국주의를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포장해 왔다. 실제로는 미국의 적성국가의 국민들에게 미국의 입장을 선전하고, 국론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먹이감이 되기 쉽도록 하는 심리전의 일환일 뿐이다.
경제방면
미국이 주도하는 각종 국제 금융기구들은 경제적 미제의 선봉에 서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은 국제기구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미국의 지분이 가장 크며 의결권을 대부분 미국의 뜻대로 행사되고 있다. IMF는 개발도상국이 경제개발을 하면서 취약점이 발견되면 마치 구제금융을 해 주는 것처럼 행세하며 바로 국제(실제로는 대부분 미국 월가 소속) 투기자본에 그 나라의 국부를 헐값에 넘기곤 한다. 이것의 피해자 중 하나가 1998년의 한국이며, 그밖의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IMF는 비슷한 행동를 하면서 그 나라 민중들이 피땀흘려 쌓아올린 국부를 강탈해갔다. 원래 이런 부는 민중이 아니라 그나라 지배계급이 보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IMF는 구제금융이라는 미명하에 이런 부를 아예 국제 투기 자본세력에게 헐값에 넘겨 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선전 언론
미국은 언론기관을 가장한 선전기관을 여러개 운영중인데, 실제로는 미국 이념의 우월성과 미국과 대항하는 나라에 대한 심리전을 수행하고 있다. 즉 미국의 선전언론은 독재국가에서의 국영언론과 마찬가지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부지원 없이 자원봉사자들의 모금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가장된다. 이들은 모두 미국 국무부, CIA의 직접지원, 그리고 혹은 데일리 NK같은 순수민간단체를 가장한 CIA 산하 민간 위장재단의 돈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극동방송이나 아시아방송같이 순수 기독교 종교 방송으로 보이는 언론들도 기원을 따지면 모두 미국의 선전방송의 일환이었다. 공산국가에서는 국영언론이 직적 당의 방침을 선전하지만, 미국은 이들 공산국가보다 훨씬 더 위선적으로 이런 방송을 이용하여 적성국에 대한 심리전을 수행하고 있다.